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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7 – 울타리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 기형도, 「장미빛 인생」(1987)에서
울타리가 높다. 높으면 담장이라던가. 담장들은 점점 높아간다. 일인가구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그가 슬픔에 민감하게 된 것은 이중으로 이유가 있다. 군대 내에서 사회불안장애 판정으로 고생했던 이래 한 세대가 지난 오늘까지도 사회생활 적응에 능숙하지는 못하다. 그 중 하나가 그 사회불안장애의 약자를 해마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고 느낀다. 사회불안장애를 의사들처럼 영어로 해보다가 약자로 읽으면 SAD - 이건 문자 그대로 슬프다는 뜻이다. 사회불안장애는 슬픔을 뜻한다.
슬픔은 기쁨, 신뢰, 두려움, 공포, 놀람, 혐오, 분노, 호기심 또는 사랑, 미움, 노여움 같은 정서의 하나로 분류된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노여움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려다가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의 복받쳐 오는 감정, 느리게 또는 급하게……. 결국은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울타리 안으로 숨어들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그 단계에 이르면 슬픔이 극복되는 것이겠거니. 그래야 살아남을 것 같다. 심리학 서적은 열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는, 승욱은, 그 나름대로 슬픔에 대항하기 위해서 숨을 크게 쉬는 버릇을 키웠다. 비릿한 슬픔이 서서히 밀려올 때면 말이다.
비릿함으로 버물려진 여러 감정들, 그 가운데는 우선 비굴함이 섞인다.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비굴해지는 하루하루는 군대 이후가 아니었다. 실은 군대로 도피하려던 시절부터의 버릇이었다. 군대로의 도피는 어떤 의미에서는 특권이었다. 군복을 입어보고 싶어도 군대 밥을 먹어보고 싶어도 입대 자격에 미달했던, 그러니까 학력미달로 병역면탈된 불우한 청년들도 함께 살았던 나라였으니까. 남북의 철조망이 아니더라도, 쉽게 넘을 수 있어 보이는, 그러나 쇠심줄 같이 넘지 못할 울타리들이 널브러진 세상이었다. 갈대 울타리로 보인다 해도 한 올 한 올 와이어로 감아서 결코 넘지 못하는 울타리들 말이다. 신의 아들들, 장군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 모두 영화나 소설작품들의 이름을 딴 은어인데, 이런 부류들이 각각 울타리로 나뉘어 살았음 직하다. 아무튼 그는, 승욱은 그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범주였나, 실존의 고뇌로 인하여 대학캠퍼스에서 군대로 피난을 갔었다.
군 생활은 그러나 도피에 최적인 무릉도원일 리가 없었다. 지금도, 십 년 이십 년 해가 바뀌어도 그 시절 군부대 내의 의문사 이야기가 불려 나왔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라서 언제나 또 오래오래 가슴을 후벼 파는가. 시도 때도 없이, 최근에 부쩍, 군사정권 시절에 관한 관심들이 고조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영화 《서울의 봄》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두 사람 몫의 영화표를 샀다. 그런데 노쇼를 택했다. 함께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혼자서 보러 갈 것이었으니까. 그저 그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를 표한다는 심정으로 표를 샀고, 그러다가 실화를 굳이 영화로 보고 싶지 않아서 안 갔다. 그는 인지의 폭이 넓지 않아서 정우성으로 장태완을 보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것도 아닌 이태신이라는 제3의 이름으로 장태완을 봐야하는 것이 불편했다. 울타리 이쪽저쪽으로 편 가르기, 더럽고 치열한 싸움을 재차 체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돈이 남아돌아서 표 두 장을 산 것은 아니었다. 어떤 다른 영화 때는 다섯 장을 샀었고, 혼자서 갔다. 가끔은 책도 두세 권, 또는 딱 한 번이었는데 10권도 샀다. 실업 중인데! 실업 중이라도 살 것은 샀다.
이야기가 삼천리로 빠졌다. 이야기란 늘 그런다. 설명하려던 가닥을 잃고 더러는 주제도 잃고 헤매게 되는 것이 이야기다. 다시 의문사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시청한 PD수첩에서 시작된다. 80년대 초 군대 내 비극들, 그가 입대하기 전에 생겼던 일들이다. 그 시절에는 어딘가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했다. PD수첩과 상관없이 또 다른 끌려간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무렵 국보위에서 사회정화를 위한답시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놓고는 할당량을 주니까, 술 과하게 먹고 전봇대 아래서 토하던 공무원도 끌려갔다 했다. 심지어는 말썽꾸러기들을 정신개조해서 보내준다는 선전을 믿고 어머니가 아들을 일부러 집어넣었다고도 했다.
군 입대도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부동시다 뭐다로 태어나서 또는 그렇게 만들어서 군대라는 단어를 모르는 특권층이 있었지만, 가끔 느닷없이 아무데서나 잡혀서 끌려간 대학생들도 있었다. 잡혀서 군대로 끌려갔다, 이것은 승욱의 표현이 아니라 팩트였다. 그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중에 입영통지를 받아들고 휴학계를 써야했고, 특수지원자로 분류되어 신체검사도 없이 바로 훈련소를 거쳐서 주로 전방 GOP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입대했다기 보다 입대 당했다. 강제입대, 강제입영. 요즘 요양원 강제입원과 맞추어보면 강제입대, 강제입영이라는 단어가 적정하다.
강제로 끌려간 병들일랑 그냥 거기 처박아 두지. 거기서, 울타리에 갇혀 30개월쯤 썩다 보면 – 썩다, 아주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때 그들은 딱히 그런 기분이었다. - 대개는 꺾이어 나오는데, 그냥 놔두지.
문제는 꺾이다가 못해 더러는 자멸한다는 데에 있었다. 자멸시킨다, 죽게 한다, 죽인다가 더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날 티비 프로그램에서 다룬 L이병들 말이다. 40년도 더 넘은 옛 이야기이지만 너무도 시퍼렇게 가슴을 도려내는 살아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승욱이 아직 중학생일 때쯤의 일들이었다. 연두는 더 후배인데도 해직교사인 오빠에게서 들었다고 종알거리는 것들이 많았다. 뭘 모르는 자신과 비교 되어 늘 불편했었다.
5.18을 죽어라 감추고 왜곡하려던 군사정권 최악의 시절, 광주 밖에서 5.18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가가 먼저였다. 군은 대학가를 차단의 첫 목표로 삼았고, 여차 하면 강제입영, 이어서 군대 내에서 소위 녹화사업을 벌였다. 푸른숲 가꾸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죽음을 가꾸었다. 그날 프로그램 도입부에 소개된 경우는 1962년 생 L, 2대 독자로, 그러니까 입영대상자도 아니었던 2학년 학생의 죽음이었다. 체포 3~4일 후 군대에 처박았다는데, 6개월 차 의가사제대 일주일을 남긴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이유야 무엇이었건 군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서, 소속 GOP도 아닌 2xx 보안부대에서, 하필 목을 매달기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테니스장 심판대에 매달린 채로.
그 프로그램은 6명의 젊은이들을 다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서러운 것은 48장의 유서를 남겼다는 1961년 생 H군의 이야기였다. 눈물 없이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철도고를 마치고 서울대 장학생,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입대했을 때까지는 꿈을 실현해 나가는 탄탄한 인생이었단다. 그러던 것이 1년 만에 정기휴가를 나왔다가 귀대 후에 곧바로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었고, 5일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문제는 그 직후였다. 제출했던 진술서에는 주로 본인의 학생회 활동과 동료들을 위한 변명이 담겼다지만, 바로 그 진술서가 그로 하여금 죽음을 결행케 한 범인이었다.
특별정훈교육 대상에겐 두 갈래 길 뿐이다. 프락치가 되느냐, 죽느냐! 승욱이 그런 생각에 미치자, 티비 시청 도중에 순간 엉뚱한 인물이 떠올랐다. 근년 들어 엄청나게 이슈화되었던, 초고속으로 벼락출세한 경찰간부 K였다. 그 네모난 얼굴의 소유자는 조사의 막바지에서 살 길을 택했던 사례였다고, 여론은 술렁거렸다. 삶을 택한 네모난 K도, 죽음을 택한 얼굴 없는 H도 다 같이 시대의 강요로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던 청춘들이었다.
프로그램 말미에서 누님이 읽어 내려간 H의 유서 한 대목이 귓속에 박혔다. 그간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주위의 모든 분들께 이 땅의 민주주의가 오기도 전에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합니다. 수 없이도 삶에 대한 미련이 많은지 몇장을 새로 써도 드릴 말씀이 적당치 않고 제가 부족하여 [……] 하느님과 제 이웃형제들의 사랑에 저희 가족을 맡깁니다.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와 경제 정의를 이루어 주십시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책임…… 티비 프로그램이 사람을 울렸다. 그를 울렸다. 승욱은 목 놓아 울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H를 찾아서 치열했던 그 삶을 돌아다보았다. 스물 두 살의 그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노동자 야학인 샘터교양교실에서 교사로 활동했었고, 울톨릭(서울대가톨릭학생회)에서의 활동도 적극적이었고, 3년 여 울톨릭 사무실에 남겼던 글들은 사후 자료집으로 나왔다고 했다. 다 찾아서 읽어보진 못했다. 소개에 의하면 그의 사상적 중심은 가톨릭신앙이었고, 수난자 예수의 삶을 따라 졸업 후 노동사목 신부를 꿈꾸고 있었다는데. 참으로 열심인 청년을 자살로 내몬 것은 ‘80cm 길이의 곤봉’으로 초죽음이 되어 ‘확인하면 다 나타날 부분’만 써낸 40장에 걸친 진술서와 반성문이었다. 그렇게 풀려나온 이튿날 새벽근무를 자청한 그는 실탄 15발을 지급받아 나갔고, 곧 죽음을 선택했다. 전 현실에 순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전 현실이 요구하는 비인간적이고 나태한 길을 거역한 사람입니다.
안타깝다. 아깝다. 몇 년 전 승욱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속없는 동기들의 괴롭힘을 못 이겨 생을 마감했던 중학생의 유서가 다시 떠올랐다.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가 왜 이렇게 진지한가, 생각하다가 그는 자신의 천박함에 놀랐다. 얼마나 진지한 사람들이 자살을 준비했겠는가. 그 참담한 절명의 순간들에 공감을 못하면서 그들의 유서나 읊는 비인간적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살은 유서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사고보다도 무섭게 다가왔다. 티비 프로그램에서 거론되었던 다른 이름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의문사라고 하더라도 사고사이기를, 차라리 타살이기를 바라면서 옛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1960년생 K, 고려대학 경제학과 80학번, 현대철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4학년 봄 강제징집당한 그도 유서를 지니고 있었더란다. 그러니까 자살이었다. 아, 그 특별한 유서!
기다림밖엔 /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 끝없는 끝들이여 / [……] /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 죽기 전엔 디뎌보마 / 죽기 전엔 / [……] / 끝없는 끝들이여 /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 죽기 전엔 기어이 /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
유서는 곧 그가 쓴 글도 그의 필적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너무나도 유명했던 김지하의 시 「끝」을 친구가 적어 보내주었던 것이랬다. 그때까지는 대학생들의 우상 중 하나였던 시인 김지하!
시를 다시 읊어보던 승욱의 마음은 좀 복잡해졌다. 당시 김지하는 매사에 어중간한 그도 들어서 알게 된 저항시 「오적」 의 시인이었다. 시인이 일찍이 무엇인가로 – 그때 그는 민청학련사건 같은 것을 이름도 잘 몰랐었지만 - 사형 언도를 받았던 일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국제PEN클럽 세계본부며 사르트르며 세계적 석학들이 구명 탄원서를 냈을 정도의 거목이라 했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노래로 불리어, 그것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아니, 간첩도 부러 따라 외웠을 것이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 내 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그런데 승욱이 아직 군에 있던 1991년, 대학가에서 P양의 분신으로 촉발된 분신행렬들 속에서 「오적」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걷워 치워라.’ 불이나면 누군가는 불을 꺼야하고 찬물도 끼얹어야 했겠다. 하지만 그때는 찬물의 효과는 보려하지 않았고, 찬물 끼얹는 사람에 대한 증오만 증폭되었다. 몇 해가 흘러도 무엇이건 격한 소용돌이 속이었다. 젊은 시절이었나. 그런 시절이었나.
또 다른 죽음들도 출발은 시위 도중의 체포였다. 1982년 또는 1983년 어느 날 가두시위 중 체포당하여 두 세 명이서 45인승 버스에 실려 병무청 직원 5~6명, 경찰 2~3명 함께 새벽 1~2시경 전방에 도착했던 K 일행을 마중(?)나온 보안부대 중사의 손에는 급조된 병적기록카드들이 들려있었겠다. 이름과 생년월일, 학력이 적혀있고, 오른쪽 상단에 빨간색 고무인으로 특수지원(대학에서 시위하다 강제입영)이라고 찍혀있었겠다. 그리고 누군가는 3개월을 또는 얼마를 버티다가 자살로 타살로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겠다.
자살자 상당수는 녹화사업에 다녀오면 죽었다. 녹화사업이란 것의 정체가 바로 살인의 시작이요 완성이었다. 가장 양심 있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양심 없는 변절을 강요했으니.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실토한 동지들의 이름, 동지들의 미래에 대한 죄책감, 그것을 넘지 못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더러는 이겨내고 살아남은 모두를 긍휼히 여길밖에. 누구라도 그 무서운 시험에 들게 되면 떨었을 것이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주십시오.’(마태오 26:39) 예수님을 따라 이렇게들 기도했을까. 신앙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무서웠을까. 다행히 K도 또 다른 학생들도 교회 대학생부에서 활동한 신자였다 하면 그것이라도 위안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예비해두신 천국이 있다면, 있을 것이다, 분명 거기에 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H도 K도 또 다른 K도 과거의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과거에 끝나버린 사람들이다. 끝났다고 그 과거를 외면할 수도 없다. 사는 것이 목적인 생명체, 그 생명체를 누가 짓밟았는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내몰린 죽음의 원한을 꼭 기억해야한다.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할 것 같다. 슬픔도 좌절감도 비릿함으로 녹아든다. 창문을 연다.
한편으로, 같은 1960년 1961년 1962년에 태어난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의 주인이 되어있다. 떠들썩한 주인공들, 젊은 시절의 공으로, 또는 그저 운이, 타고난 수저가 좋아서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세상을 흔드는 그들 말이다. 심지어 아주 밉상도 있다. 많다. 세상의 정점들, 검찰이라는, 국회라는, 여러 이름의 어마어마한 권력 집단에도 득시글득시글하다. 그들이, 저들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어디로? 그들은 오늘도 공개적인 울타리를 쳐서 안과 밖을 가른다. 울타리는 견고하다. 철옹성이 고수된다.
나머지, 승욱이 우리들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그들은 무엇인가가 불발인, 많은 것이 불발인 시간을 살아간다. 우리들 – 그렇게 말하자면 조금 비겁한 느낌도 든다. 그가 생각하는 우리들 1969년생도 어쩌면 세상을 이끌어가는 저들과 동년배다. 잘난 사람들은 벌써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무리에 속해있다. 낭패다. 세상을 한탄하기에는 위정자들 탓만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니! 그는 다시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이들의 책임, 아니 이미 젊지도 않는 우리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운다. 인간의 책임이라는 단어는 짐이자 모멸감으로 돌아온다. 그는 모멸감에 운다.
지금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불우했던 군 생활도 끝나는 날이 왔었다. 1992년 여름이었다. 그때 브이 자를 그리면서, 웃자면 두부라도 먹으며 나서야했던 철문을 나서서 집으로 향할 때, 승욱의 발걸음은 보무가 당당하기는커녕 비실거렸다. 두발로 걸어 나왔으니 소위 꺾이고 망가졌다기 보다는, 아마 배추절임 정도였을까. 여름에 푹 절여져서 돌아온 그는 아팠다. 아프고 싶어서 아팠다. 등록 기간을 놓쳐가면서 아팠다. 가벼운 입퇴원을 반복했다. 군대에서의 병명이 핑계가 되어주었다. 어머니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일면서도, 입대 전에 그 나름 겪었던 악몽의 가을학기가 떠올라서 등록의 손이 머뭇거려졌다.
복학을, 왜 2학기 등록을 망설였을까. 그는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도 그때의 자신을 모른다.
그래, 집에서 푹 좀 쉬자이. 무탈하게 제대했응께 얼마나 이뻐! 기특한 겨!
꾀병 같아서.
꾀병이라니. 원래 재수들도 하고 뭐, 또 연수도 가고 그런담서. 대학공부가 이러저러 뽈강 4년만 걸린다냐. 몸이 몬자제이.
예, 엄니.
숨 좀 돌리고요, 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대한민국 젊은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군 생활을 마치고 온 것이 무에 대단해서 숨을 돌리겠다고 말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더라도 그렇게 시골집에서 9월을 넘겼다니. 복학 기간을 완전히 넘기고도 미적거리고 있었다. 군인도 학생도 아닌 젊은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군 입대를 정하고 비실댈 때보다 더 미묘한 일렁임으로 편치 않은 날들이었다. 일단은 대학가로 돌아와야 했다. 슬그머니 돌아왔다.
가을 들어서는 느닷없는 방향에서 뉴스가 튀어나왔다. 이름도 특이한 M교수의 소설책 한 권이 질러댄 불꽃이었다. 서울 명문대에서 강의 중이던 교수가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혀가서 구속되었다. 출판인도 함께였다. 말을 섞는 사람이거나 말을 숨기는 사람들 모두가 속으로는 다 같이 불이 붙었다.
엥? 필화사건인가? 필화라고 하면 「오적」 쯤이라야 되는 줄로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승욱의 눈으로는 실망스러운 주제였다. 이 판국에 외설이라니! 문제의 소설 제목은 『즐거운 oo』였다. 그래도 승욱의 느낌으로는 일단 표현의 자유 편을 들고 싶었다. 그러다가 잠시 곧 막혔다. 외설 그것은 아무래도 편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제목도 너무 진부하다고 느꼈다. 문학작품이라면, 문학작품에서 문제적 성생활을 쓰고 싶었다면, 제목이 이렇게 순진무구하다면 그건 아니다 싶었다. 통속 중에서도 통속소설들과 다를 게 뭐야. 최소한의 아이러니도, 그런 빌미도 없는 적나라한 그냥 이야기라면.
문득 「장미빛 인생」 이란 시가 떠올랐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그렇게 끝났더라 싶어서 책을 찾아보았다. 군대에 유일하게 들고 들어갔던 시집이라서, 늘 가까이 있던 시집이라서 곧 찾았다.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 [……] /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 [……]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밋빛 인생을 증오할 수 있어야 시다, 라고 승욱은 생각했었다. 시인 기형도가 – 앗, 그때 문제된 M교수와 같은 대학이었다 - 첫 시집도 나오기 전에 서른 해도 못살고 요절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깝고 서러워도, 그 때문만이 아니라 시가 끌어당겼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놀라고 놀랐다. 2학년 2학기를 비실댈 때, 그도 인생을 증오했었다. 차마 증오까지는 못가는 에너지로, 비실비실 인생을 피했다. 장밋빛은커녕 우선 연두를 피했다. 강의실을 피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시집이었고, 이후 그 작은 시집은 늘 그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외설 논란이 들끓을 때, 어쩌다 들린 서점에서 또 다른 기형도를 발견했을 때 승욱은 너무 놀랐다. 놀랍고 반가웠다. 유고시집 『입 속에 검은 잎』 아닌 또 다른 유고가 발표되어 있었다니. 유고들이 쌓여있었구나, 참 다행이었다. 그때 발표된 것은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었다. 그 중 1984년 6월 「편지11」을 읽었다. ‘이상해. 요즈음은 매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제는 국문과 ooo교수와 장밋빛 인생인가 하는 데서 마셨다. oo형이 나에게 성격 파탄자라고 말했다.’ 아아, 그 둘은, 아홉 살 차이 그 둘은, 문학회 소속의 정외과 복학생과 신임 국문과 교수는 바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었구나. 누구는 장밋빛 인생이라 쓰고 인생을 증오했고, 누구는 장밋빛 인생을 외설의 빌미로…….
단어가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단어는 그냥 거기에 있다. 단어를 삼키는 것은 인간이고, 그것을 소화해서 내뱉는 것도 인간이다. 그렇게 재창조되어 나온 단어를 확산시키는 것도, 파묻는 것도 인간이다. 칭송과 매장은 어느 지점에서 갈리는가, 누가 가르는가.
평생 공부하려고 했던 역사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역사적 사실은 사건들의 파편으로 존재한다. 역사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파편들을 모으고 정리한다. 파편들은 우선순위로 배열되고 단어들에 의해서 채색된다. 우선순위는 누가 정하는가. 수채화 물감은 누가 고르는가. 아예 유화물감으로 덧씌우지는 않을까. 진실의 파편들도 두껍게 덧입혀 가릴 수 있다. 그러고도 명화가 탄생한다. 세계적으로 그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화들은 지속성이 탁월한 유화작품들이다.
언뜻 고등학교 미술시간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키 작은 여선생님이었다. 처음 반년은 연필화만 그리게 하셨다. 대상을 마음대로 크게 또는 작게 스케치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예요. 데생이 기본이라고 하시면서도, 머리통을 너무 크게 그려도, 너무 작게 그려도 괘념치 않으셨다. 칠판에 여섯 장 씩 늘어놓고 품평을 할 때, 그림을 그린 애들도 왼쪽 오른쪽으로 세 명씩 서 있었다. 자신의 데생이 이야기될 때면 어깨 넓은 녀석들도 대개는 고개를 숙였다. 보는 아이들도 가끔 키득거렸지만, 선생님은 다 괜찮다 하셨다. 그렇게 보여서 그렇게 그리는 것이라고, 보이는 대로 그려진다고. 자신감 있는 터치만 강조하셨다.
다음 반년은 수채화만 그리게 하셨다. 이번에는 무슨 색을 칠해도 괘념치 않으셨다. 다만 덧칠했을 때 속에 비치는 색깔 때문에 나중에 칠한 색이 달라 보이는 것을 유념하라고 하셨다. 그랬다. 누가 덧칠한 초록과 다른 누가 덧칠한 초록이 사뭇 달랐다.
앗, 초록, 초록들! 그러니까 녹화사업! 빨갱이 빨강 물을 빼내고 초록물을 들이는 사업! 그런데 대개는 단순 시위중 잡혀갔던 그들에게, 상당수 기독교인이었던 그들에게 빨강 물이 들어있었을까. 억지 빨강 위에 덧칠한 초록은 뭘까. 노리끼리, 노르스름, 누런, 연노랑, 샛노랑, 진노랑 등 하고 많은 노랑에, 하늘도 푸르고 숲도 푸르다는 우리 민족의 색감은 예민하면서도 너그러운 편이다. 다만 그것이 무슨 사업이 되면 혹독했다.
선생님은 그때 인생은 늘 덧칠을 하는 것이라고, 처음 도화지 상태에서 색칠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젊어서 너무 섣불리 너무 확 칠해버리면 살 여유가 적어져요. 살 여유 – 그런 단어는 피 끓는 열혈 남자애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단어였다. 아예 귓등을 스쳐가버린 단어였었다. 그게 왜 장밋빛 인생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랐을까.
그는 고개를 휘둘렀다. 보이는 것은 무색, 그러니까 회색 그리고 침묵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주제는 실은 역사학이었다. 그가 복학을 실행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도 역사학은 이미 복학한 다른 친구들의 형태로 그의 주변에 있었다. M교수 사건에 열을 올리고 교수를 성토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는 약간의 거부감에도 옹호하는 쪽 울타리에 들기로 했다. 예술의 자유에 비하면 반대 논리가 마땅치 않아서였다.
이 쑥맥이가! 복학은 안 해놓고 뭔 딴 소리다냐!
친구들은 그를 놀렸다.
소설이 윤리도덕은 아니잖어. 작가가 이 소설은 인간의 자아확립이 주제라고 하잖아! M교수는 대학 수석졸업에 어디까지나 실험정신이 강한 교수로서……. 게다가 유럽에서는 성인이 성인물을 향유하는 것을 개인의 권리로 인정하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
뭐라? 문학평론이라도 하려는 거여? 사회학과로 전과할 텨? 게다가, 너, 노승욱 투틸로! 너네 교황님은 뭐라시는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황이 되시어 10여년 만에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셨으니 한국에서도 유명인사였다. 세계 평화와 반전사상을 설파하셨고, 개신교와도 경직되지 않고, 모든 면에서 너그러우신 특출한 분이셨다. 물론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좀 심하지만, 밥 딜런도 좋아하신다는 교황님은 연애소설에 대해서도 한없이 너그러우실 게다. 친구들에게 딱히 말로는 안했지만 그런 생각이었다.
승욱은 그 당시 M교수의 편에 서는 것이 문학, 심리학 또는 윤리학 측면에서 옳다기보다는 그냥 소수자에 대한 동조라고 믿었었다. 그렇게 괜한 일에 열을 올리면서 실제의 문제인 복학과 대학생활에 대한 확신의 부족을 감추었다. M교수 사건도 그의 뇌리에서 곧 희석되었다. 다른 교수들도 다른 이유들로 해직, 복직, 재임용탈락, 복직의 험난한 교수생활을 맞닥뜨린 경우들도 드물지 않았으니까. 울타리 밖은 늘 그렇게 쉬이 잊히곤 했다.
승욱이 다시 M교수를 떠올린 것은 얼마 전 70대 독거노인의 고독사 기사 때문이었다. 노인이 영어교사였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만, 언제더라, 결국 M교수도 외롭게 사망한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자살이라고 했었다. 짧은 유서가 있었다. 그리 되도록 세상은 이슈에만 민감했었다. 덩달아 가슴이 덜컥했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그렇게 마감하는구나. 그렇게 마감되는 것이구나.
평범해도 잊히는 사람들 천지다. 평범했을 그 영어교사는 끔찍하게, 더는 끔찍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발견되어서야 신문에 났다. 어떻게 된 것이, 약을 먹은듯한 쥐들이 죽어있는, 밀폐된 쓰레기통 같은 방 안, 삶을 포기한 흔적이 가득한 곳, 한쪽에 그대로 쌓여 있는 택배박스, 그 안에서 나온 건강보조식품이라는 이질적 존재는 인생이란 불가해의 존재라고 믿기에 족했다. 더욱 그로테스크한 조합은 또 있었다. 유명한 역사인물의 자서전이나 『행복론』과 같은 책들, 마치 수험생의 교재처럼 여러 번 그어 짙어진 밑줄과 동그라미 표시들. 그 지독한 더러운 불행 속에서 인생행복론을 외우려고 했을까.
『행복론』 - 기자는 굳이 저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세네카의 책이었겠지 싶었다. 평생 교사였던 노인은 재산과 명예 또는 쾌락은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고 설파한 대목을 믿고자 했을까, 믿었을까. 최악의 밑바닥에서 과연 정신의 건전성에 기댈 수 있었을까. 그런 책들일랑 조각조각 찢어버리는 것이 제 정신이 아니었을까. 최종적으로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잡힌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죽은 쥐, 건강보조식품, 책들? 곰팡이 슬은 벽 혹은 천장? 보이지 않은 울타리? 울타리.
아무튼 엄동설한에 고장 난 보일러가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시신이 그나마 덜 흉측하게 보존되었다는 그 기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했다. 냉혹한 아니러니 그 자체였다. 기록만이 아니라 애초에 인생이 아니러니일 터다. 장밋빛 인생을 증오한다는.
생의 마감 – 저절로 마감된다. 스스로 마감된다. 차이는 차치하고, 마감은 말 그대로 죽음이다. 그는 긴 생에 관해서보다 짧은 죽음, 순간의 죽음에 대해서 왜 더욱 가슴이 아픈지 의아했다. 긴 삶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분명 합리적일 것인데 죽음이 늘 선두로 다가왔다. 그가 바라다보는 천장, 하늘대신 바라다 보이는 천장은 죽음의 파편들로 가득하다.
사실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는 그것을 실감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발딱 일어나야 정상이다. 젊은 놈이. 물론 젊은 놈은 이미 아니다. 상대적으로는 행여 젊겠다. 아무튼. 눈 뜨고 할 일이 배를 채우는 일이라면, 그 다음 급한 일도 없이 그뿐이라면 서두를 필요가 없질 않은가. 그만한 일로 서두르기가 민망했다. 시간표가 필요해, 시간표가. 그에게는 시간표라고 하는 나사가 필요했다.
시간표에 의해 요일에 따라 움직여 온 그의 삶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의 이니셔티브가 아니었다. 그가 살았다기 보다는 어떤 거대한 기구가 그에게 주는 과제 또는 계획에 따라 맞춰 돌아갔음이 분명해졌다. 풀이 자라면 풀을 매주고 병충해가 생길 조짐이면 병충해 약을 치는 농부와도 비슷했다. 결정은 농작물이 하고 농부가 서두르듯이, 강의라고 하는 일이 대단히 적극적이기는커녕 매우 수동적인 무엇이었다. 강의란 그 내용에서도 전혀 주관적일 수 없고, 최소한 표준화된 전문지식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간의 노력으로 점철된 세월들은 독창적인 학문의 고지에 이르는, 행여 이를 수 있을까 조바심 내는 과정이었다. 첩첩산중을 넘어 무지개 같은 것을 바라다가, 도중에 멈추어버렸다. 어쩌면 이대로 도태될 수도 있을 그의 상황은, 그의 상태는 회색 안개다. 3년마다 채용되는 전공 시간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글쓰기와 같은 교양과목으로라도 방향을 틀어보는 것이 현명할까, 비굴할까. 행여 다른 대학을 시도해볼까. 겹치기 하는, 잘 나가는 동료들도 있었다. 왜 그는 못할까.
실패의 먼 원인은 대학생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제대 후에 곧 바로 복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전공에 대한 방만한 회의였었다. 역사학이란 이름으로 된 기록물들은 승리자의 시각에 의한 것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자 – 그것들이 무의미한 군대생활을 이겨내면서 깨달은 결론이었다. - 모래위에 짓는 집을 어찌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었다는 말이다.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집이라면 외면하자, 그것이 하나였다. 그런데 외면은 간단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 것은 맞다. 그럼 반석을 찾아……. 딱 거기까지였다.
예컨대 『세계문화사』 , 15cm x 21cm 크기에 370쪽 안에 깨알같이 함축된 내용들은 어떻게 간추려졌을까. 또는 앙드레 모루아가 쓴 『영국사』도 『미국사』도 객관적일 것이라는 장점을 지닌 채 번역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일사』 그리고 당연히 『프랑스사』도 있었는데, 물론 사학과에서는 이 모든 것이 기본적인 추천도서들이었다. 한 인간이 이 나라들의 역사를 다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감탄도 하면서 의아하기도 했었다. 한꺼번에 다 빌려와서 넷을 포개어 놓는다면 목침 베개 높이도 넘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일까. 그땐 몰랐었지만, 만일 모루아가 유대인임을 감안하면 달리 읽혔을까. 유대인들은 역사란 목적이 있고 인간에게는 도달해야할 목표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니까.
아니다. 어쩌면 이 모든 변명은 다 거짓이다. 사학과로 복학하는 일에 울타리를 친 것은 과가 아니라 그였다. 그 자신이었다. 지금에 와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때 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선뜻 그리고 당연하게 복학을 결정하지 못한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연두, 연두였다. 어떻게든 그 거리를 정돈하지 않고서는 연두를 다시 만날 첫 순간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연두는 교정에서라면 눈을 뜨면 바로 보이는 과 후배였다. 그때 입대를 결정하고 나서 연두에게는 무슨 의미 있는 말이라도 해야 했을까. 대신 아주 대수롭지 않게 휴학을, 군 입대를 말했었다.
왜? - 응. 공부가 안 되네.
왜? - 그냥. 학교생활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왜? - 왜는 왜! 안 되니까 안 되는 거지.
덜컹거리는 맘을 접었다. 와락 껴안을까, 아냐. 흔들리는 각도를 접었다. 사랑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수평이 되어버리면, 수평이 되어버린 사랑은 순간에 멈춤을 깊이 느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하지 않았던 말, 그의 침묵은 30개월의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만 갔다. 숨구멍이 없었으므로 침묵으로 상상하는 단어들도 희미해갔다. 이제 와서 연두를 어떤 말로서 만날 것인가. 와락 껴안을까, 미친 듯. 연두가, 캠퍼스가 두려움이었다.
어느 여름 한낮, 온 나라가 휴전선을 돌아 돌아 북쪽으로 날아간 여학생의 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 때, 승욱이 도서관에서 맥없이 쓰러졌었던 일이 그 시작이었다. 전깃줄에 내려앉으려는 순간 풀썩 땅바닥으로 꽂혀 널브러진 새의 이미지와 더불어 끊겨버린 기억, 그리고 도서관 앞 풀밭에서 눈을 뜬 순간 바로 코앞에서 만났던 간지러운 머리카락. 연두, 처음 본 여자애, 과 새내기라던.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이 황새는 참새와 달리…….
연두는 나중에 그가 지껄였다던 이상한 말의 뜻을 묻곤 했었다. 그는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더란다. 그가 다시 눈을 감았을 때, 어쩌면 널브러진 큰 황새의 이미지를 찾고 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감전된 느낌을 받았었다. 그 애는 손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누르면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팔은 맨 팔이었다. ㄱ의 팔과 ㄴ의 손바닥은 전류가 통하는 물질이었을까. 눈을 감은 깜깜한 세상 속에서는 소리 없는 마른번개가 흘렀다. 감은 눈을 치켜뜰 힘도 없었고, 뜨고 싶지도 않았다. 살살 간질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시 한 번 전류의 습격이 왔다. 그는 그냥 꿈을 꾸기로 했다. 지면과 연결된 철탑이나 전봇대에 닿으면 참새든 사람이든 감전을 피할 수 없어요. 그 순간, 어린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귓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그 애가 뭐? 그러게나. 그 애가 뭔데? 그는 그러고 있었다. 군대생활 30개월 동안 그가 주소를 알리지 않았고 휴가도 어머니에게로 가 보냈으므로, 연두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연두와 연락이 닿지 않도록 주소도 보내지 않았고 휴가도 고향 어머니 집으로만 갔다는 표현이 정직할까. 그냥 있는 사물들처럼, 그냥 있는 친구들처럼 걸리고 켕기는 것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걸리고 켕겼다.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여자애가 꼭 ‘형’이라고 나를 부르며, 학과에서 추천된 역사책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는! 엉뚱한 독일현대소설 과목이나 수강하자 했던 연두. 어떤 소설의 부제가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낼 수 있는가’ 라고, 꼭 듣자고 졸랐었던.
승욱은 최근에 알만한 교수의 책 『자유의 폭력』을 손에 들었을 때,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연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 세월 지나고서도 연두의 목소리가. 그런데 그 때는, 군대로 피신해서도, 복학을 앞둔 당시에도, 그 애의 목소리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무섭기까지 했다.
울타리는 있거나 없거나 부담이었다. 캠퍼스를 떠나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실감하며 숨을 죽였던 30개월은 간질거리는 머리카락에 대한 그리움을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 그리움만으로 연두를 맞닥뜨리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무심한 듯 소화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낼 연두의 입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서 그림자처럼 떠오르는 연두의 오빠, 독문과 출신이라던 오빠도 여전히 무거운 존재였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무거운 부류, 전교조 해직교사는 연두가 박씨처럼 물어 나르는 이삭이 널린 밭이었다. 누군가는 또는 많은 사람들이 심어 가꾸어야 하는 씨앗들은 더러 자라고 있었을까. 연두는 그대로라면 4학년일 것이고, 그 가을 겨울을 지나면 졸업을 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 못할 두려움에 대한 비겁한 답은 침묵 그것이었다. 게다가 세상이란 기어코 도망치려는 사람에게는 옆길을 슬쩍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순간 울타리를 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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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문학, 2024, vol.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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