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25. 3. 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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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2024.12.3.

 


수상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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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자리에 서서 좀 떨립니다.

소설가라는 아이덴티티로서 이 자리에 선만큼 1930,40년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던 하이데거의 인용으로 시작할까 했습니다. 하지만 곧 언어 중에서도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라는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한 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얘들아, 사자다! 오른쪽으로 도망쳐! 이런 말은 기린도, 사슴도 합니다.

우리 이제 해가 지는 쪽으로 날아가자! 철새들도 말합니다.

엄마, 배고파! 라고 실제를 말하기도 하지만, 이잉, 나도 날개를 갖고 싶어... 엄마, 날개 사 줘! 라고 아주 엉뚱한 말도 하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어쩌면 이라는 개념도 이처럼 픽션의 언어가 창조해낸 작품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실만을 말한다면 그는 온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꿈도 언어로 표현하고, 불안도 언어로 표현하고, 슬픔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 그것이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들, 또는 반대로 쓸모없는 언어생활로 인해서 가장 가성비 낮은 인간군. 그렇습니다. 오직 쓸모로만 인간을 평가하는 자유시장경제사회 속에서 별 쓸모없으면서도 제 나름 버티며 살아내는 인간들,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 작가인가 싶습니다. 이야기가 밥 먹여주냐!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랐으면서도 밥 못 먹여주는 이야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 가성비 낮은 동지애로서 오늘 여러분들을 품으며, 서툰 인사말씀을 가름합니다. 감사합니다.

* 시간에 주눅들어서 요만큼도 다 못했습니다.

 

 

소개의 글 [대표] ............................................................

 

한겨례 - 정대하
코로나 시대 환자·보호자·요양보호사 삼각관계형상화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 장편 날마다 시작출간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1164718.html

 

광주일보 - 박성천

43회 조연현문학상 수상자로 서용좌 작가 선정

20241119() 18:50

http://m.kwangju.co.kr/article.php?aid=1732009800776409007


코리아헤럴드  - 김성곤
[Kim Seong-kon] We should start ‘a new beginning every day’

Published : Jan. 8, 2025 05:30:00

https://www.koreaherald.com/article/10385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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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5. 3. 1. 12:26


[12월의 말픽션의 언어

 

 

 

 

    12월에는 하루하루 저물어 가는 날을 산다. 상징적으로 그렇다. 상징이 우리를 그런 감정으로 이끈다. 상징을 말하자면 혼돈이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태양신 ‘라’부터 떠오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그러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말씀이 먼저였다.

 

    인류는 보도 듣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는 신들을 혹은 신을 우러르면서, 보고 듣고 만지는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신들에 또는 신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는 허구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먼 오래된 허구가 우리의 구원이었고 구원이다.

    허구, 픽션이라는 말은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드는 것을 이름한다. 좁게는 소설이나 희곡 따위에서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 내는 것을 말한다. 창조는 오직 신의 것이다? 포이에르바흐에 기대어 말해보자.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면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추상화해서 절대적인 존재로 신격화 것, 그것이 인간이 신을 창조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한 창조 행위, 물질적, 비물질적 질료를 이용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사피엔스의 언어적 특성 때문에 가능했다. 단세포 생물로서 바닷속을 떠다니다가 ‘자연선택’에 의해 현재에 이른 생물학적 인간은 초파리와 유전자 70퍼센트 정도를 공유한다. 최근 14만개의 뉴런과 5,000만개 이상의 시냅스로 구성된 초파리의 신경구조를 담은 뇌 지도를 그려낸 연구 결과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어느 시기부터인가 뇌의 특별한 진화로 인해서 놀랍도록 유연하고 독특한 언어적 기능이 생겨났다. 이것은 유발 하라리의 설명이다. 언어가 뒷담화와 수다에 사용되면서 사회적 협력이 발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없는 것,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다른 동물들의 언어와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허구를 말하는 능력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허구는 거짓의 영역이 아닌 포이에시스의 영역이다. 비존재로부터 존재로의 모든 움직임의 원인으로서.

    물론 동물들도 언어적 소통에 능하다. 이를테면 사바나 초원의 기린도 말을 한다. ‘얘들아, 사자다! 뛰어, 무조건! 살짝 오른쪽으로! 저 바위 무더기를 넘으면 곧 포도나무 숲이야.’ 매우 실용적인 언어생활이다. 인간의 어른은 아이에게 곧잘 거짓말도 한다. ‘쉿, 거짓말하면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진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수많은 허구를 말한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혁명이었다. 신화 종교 문화 나아가서 국가 이데올로기까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언어가 해낸 것이 바로 파피루스에 적은 신들의 세계요, 신들에, 신에 대한 온갖 희망적 픽션에 기대어 인류는 현실과 현실의 고통을 그 불합리성을 견디어냈다. 대자연을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세계가 구동하는 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떤 위대한 개념으로 숭상함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 개념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음으로 해서 실체가 아닌 가상으로 존재하는 힘이었다. 그 가상, 즉 픽션의 힘으로 신들을 창조했고, 신들 혹은 신을 숭배하면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파피루스에 남은 문서들에서부터 발견된 픽션의 언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거쳐 유일신의 질서를 떠받드는 중세에 이르러 어쩌면 단테의 『신곡』(1472)에서 정점을 이루었을 것이다. 단테의 상상력이 녹아든 「지옥」 편과 이를 형상화한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형도〉(1495)만 보더라도 온갖 앞선 허구들이 망라되어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이 픽션의 정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와 정신문화적 변화를 거듭하는 동물이다. 신의 권능이라는 픽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인간들은 이번에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역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개념을 그 자리에 대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에 문학과 사학과 철학의 흠결들을 말해서 무엇 하리. 오늘날은 해체의 구조마저 해체하기에 남은 것이 없다. 그 다음은? 준비된 것도 없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1942)의 주인공 푸네스가 말한다. ‘내 기억은 쓰레기장이다.’ 한번 들었던 것은 정확하게 반복될 수는 없는데…… 나무가 나무라고 지칭되는 것은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을 보편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내 손은 정말 내 손일까. 거울에 비칠 때마다 다르게 인식되는데. 이 믿거나 말거나의 픽션, 이것이 보르헤스의 힘이다.

    이러한 전통소설 형식의 파괴 또는 초월은 이미 로베르트 무질에게서도 극점에 이르렀다. 미완성 장편소설 『특성 없는 남자』(1930~1943)에서는 계몽과 합리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대시민계층의 사회가 현대의 대중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병발되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단절이 관심사이다. 가장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 울리히의 ‘가능성 감각’이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좋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가능성,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는’ 감각을 말한다. 정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샘 솟아나고 꽃 피어나는 그 무엇으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토피아로 나아간다. 주인공은 작가를 대신하여 생각한다. ‘서사문학의 영원한 비결은 생 그 자체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의 생은 이야기 될 수 없다. 그것이 패러독스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음이, 보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음이 픽션의 힘이다.

 

    인간만이 지닌 가능성 감각, 아직 없는 것을 말하는 픽션은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숨 쉴 수 있게 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어쩌면 살기 위하여 숨을 쉬기 위하여 소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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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2024년 12월 통권 305호, 10~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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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5. 3. 1. 12:14

침묵9 – 연두

 

 

 

 

 

 

 

 

 

 

 

 

 

 

 

말을 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번 먹는 데
하루, 이틀, 사흘 [……]
낼 다시 만나면
속 시원히 말해야지
눈치만 살피다가
일 년, 이 년, 삼 년 [……]
눈치만 살피다가
지나는 한 평생
- 송창식 맨 처음 고백 중에서

 

                                                                   

                                                                                *

 

    연두에게서, 고백도 못해본 연두에게서, 붙잡지도 않는 연두에게서 도망치는 일이 왜 그리 중요했을까. 입대를 앞둔, 군대로 도망치는 그에게 그녀가 물은 말은 단 한마디 단어였다.

    왜? - 응.

    왜? - 공부가 안 되네.

    왜? - 그냥.

    왜?

 

    승욱이 도서관에서 맥없이 쓰러졌었던 일이 그 시작이었다. 전깃줄에 내려앉으려는 순간 풀썩 땅바닥으로 꽂혀 널브러진 새의 이미지와 더불어 끊겨버린 기억, 그리고 도서관 앞 풀밭에서 눈을 뜬 순간 바로 코앞에서 만났던 간지러운 머리카락. 연두, 처음 본 여자애, 과 새내기라던. 어쩌다가 그는 그 전깃줄에 닿았을까. 참새가 두 발로 한 줄에 서듯, 그도 두 손으로 한 줄에 매달리면 되었을 것을. 무심코 발생한 첫 순간의 감전은 그를 통째로 태워버렸다.

    캠퍼스를 도망쳐 들어간 군대, 상상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침묵 속의 폭력을 실감하며 숨을 죽였던 30개월은 전도체 그 머리카락에 대한 그리움을 두려움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제대 후에도 대학에 등록을 하지 못했으니까.

 

    더 멀리 도망쳐 간 독일에서, 베를린에서,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서구 68운동의 모토를 실감해 내자! 의지는 좋았다. 무비자로 입국한 승욱이 3개월 이상 체류하려면 우선 외국인등록이 문제였다. 외국인등록관청에 가서 예약 없이 새벽부터 줄을 서 있었는데, 어느 시간쯤에 저 앞에서 줄이 끊겨버렸다. 그대로 해산이었다. 하루 사무 할당량이 그것으로 끝이라 했다. 예약 번호 같은 것은 없었다. 원시적이었다. 사람을 원시적으로 대했다. 외국인등록을 원하는 외국인들에게 알맞은 수준이라는 듯이. 서울의 미국대사관인가 영사관 앞도 그렇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튿날은 꼭두새벽에 갔다. 기다리는 동안에 이런 저런 정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은 따로 등록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려니 하다가 일본도 그쪽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속이 좀 뒤틀렸다. 국격이구나, 분통이 났다. 은혜를 바라는 꼴에 근육들이 꼬일 것 같았다. 불가항력은 불가항력이다. 다음에는 경찰서에도 가야했다. 사무는 사무고 서류는 서류였다. 존재 증명이 확실해야만 했다. 만일 실종이 되더라도! 실종?

 

 

    한국인의 실종, 사실 외국인등록증 유무와 관계없이 한국 국적 체류자의 해외 실종은 늘 가능했었다. 실제로 일어났었다. 1967년, 그러니까 승욱이 태어나기도 전이었는데, 서독주재 기자가 무슨 세계선수권 대회 취재 차 체코인가 헝가리인가 동구권 국가에 들어갔다가 실종되었다. 그 일을 시작으로 동백림사건이라고 알려진 첩보영화 같았던 작전이 일어났다. 서독에 살던 교민들이며 유명 예술인들과 유학생들이 200명쯤이나 체포되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3, 4년 안에 대부분 석방되는 형식으로 종결되었다. 그래도 그 심각성은 대단했다. 파독 간호사가 유고라던가 동구권 남성과 결혼하여 이주했던 것도 문제 삼았다니, 참.

    그건 그렇고, 실종되었던 그 엘리트 기자는 어찌 되었을까. 느닷없이 궁금증이 일었다. 유능했던 유학생, 남 몰래 쇠네펠트 공항에서 동구로 향했던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을까. 살아있더라도 노인 다 되었겠다. 장벽은 무너지고 없는데 사람은 어디에도 흔적도 없다니. 승욱은 일없이 그를 걱정했다.

 

    그러니까 승욱이 맞닥뜨린 90년대 독일은 어쩌면 낙원이었다. 독일은 하나였고, 누구도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숨어들 필요가 없어졌다. 쇠네펠트 공항을 통해 모스크바를 관광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승욱도 어쩌면 철조망을 넘어 날아간다는 해방감으로 선뜻 모스크바부터 다녀왔는가 싶었다.

    가만, 그가 난생 처음 의식 소실을 경험했던 여름이었지. 분명 그 뉴스의 충격이었어. 하지만 소위 방북여대생의 평양방문, 그 여학생이 넘어갔다던 베를린 장벽은 – 그 베를린 장벽은 그때 벌써 내적으로는 무너지고 있었음을 그땐 까맣게 몰랐었다. 어쩌면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그 뉴스의 충격 정도로 의식이 소실된 못난이가 새내기 연두와 마주친 그날, 그날은 정말 아무 것도 몰랐었다.

     ‘우리는 떠나기를 원한다.’라고 적힌 깃발을 들었던 동베를린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기록들이 완벽히 보존되어 있었다. 겟세마네 교회 등은 성지였다. 장벽이 무너지기 전부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 열린 국경 경비울타리들을 통하는 방법으로 수만 명이 동독을 이탈했었다고. 부다페스트 등에서 마련된 특별열차에 타고 바로 서독으로 입국하는 동독인들에 대한 세계뉴스는 지배자 피지배자 모두에게 얼마나 큰 아픔을 안겨주었을까. 우린, 한국에서는 왜 잘 몰랐을까. 2학기에 벌써 학교에 잘 나가지 않던 승욱은 정말 몰랐다. 장벽은 그해 연말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분단을 극적으로 증언하는 기념물로 남은 찰리검문소는 그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역사적 장소였다. 역사적 현실은 변질되어 박물관처리가 되었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뭉클했다. 봉쇄 장벽을 왜 넘으려 했을까.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장벽을 넘으려다가 희생된 사람들에 관한 정보들 - 자국 군인들의 총격에 스러져간 국민들이 베를린에도, 그러니까 선진 유럽에도 있었구나. 동독에서 서독으로, 그렇담 자국은 아닌가. 승욱은 또 다시 광주를 생각했다. 도망쳐 나온 광주 캠퍼스를.

 

    통일 후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베를린 장벽의 그림들은 그때 장벽에서 좀 떨어진 아틀리에에서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생생하게 봤던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려 넣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바로 〈11월에 생긴 일〉의 작가 카니 알라비였다. 처음에는 여러 방면에서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합류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장난하듯이 담벼락을,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을 넘는 남자의 그림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장벽을 넘는 사람』 이라는 동명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라고 했다. 습관적으로 장벽을 넘나드는 일이라니, 소설이니까 그랬겠지만.

    그 그림이 유독 승욱의 머리를 깼다. 그것은 머릿속의 장벽 허물기가 더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였다. 우선 전철을 타고 가다가 동베를린 지역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거리를 만나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관리가 잘 안된 집들, 차이 나게 어두운 색으로 내려앉은 그쪽 지역들은 아직 변화 중에 있었다. 외관의 변화라면 글쎄, 뭔가 조직적으로 느껴지는 이 사회는 동서의 벽을 곧 허물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의 장벽은 모를 일이다.

    혹시 우리의 미래는 어떨까, 우리? 우리의? 연두라면, 연두의 오빠라면 베를린 장벽 파편들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가까이 간 적이 없으므로 알 수도 없는 연두, 그 이름이 느닷없이 왜 떠올랐던 것일까? 승욱은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대학 캠퍼스를 피해서 도망쳐온 그곳이 베를린이면 어떻고 로마이면 어떠랴. 변화가 정작 필요한 것은 승욱 자신임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난생 처음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여 방향감각의 상실이라고나 할까. 좌충우돌 이것저것 부딪고 다니면서 시간을 잊고 자신을 잊었다. 계획도 순서도 없이 베를린 이곳저곳을 가로지르는 일상이 무슨 의미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철없다는 말의 뜻을 알 것도 같았다. 철없는 그는 들어봄 직했던 장소들을 무턱대고 섭렵하고 다녔다.

    어떻게 독일 군주이면서 프랑스 문화에 매료되었나, 프리드리히 2세가 볼테르를 초빙해함께 했었다는 상수시 궁전도 볼거리였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했다니 프랑스 문화 존중이 대단했구나. 역시 문화적 후진국 독일이었나. 독일 왕이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를 흠모했었다니. 하긴 여러 방면에서 독특했다는 프리드리히 왕으로서는 똘레랑스 한 마디에 매료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종교의 광신 그리고 배타성을 초월하는 종교적 관용 - 어려운 말이었다. 더 나아가면 종교로부터의 해방인가. 순명을 인지하면서도 본성과 상치되는 어떤 가치들……. 그때 상수시 궁의 뜰을 거닐면서도, 자신이 볼테르를 찾아 헤매게 될 줄을 승욱은 알지 못했다. 사탄과 의절하라! 임종 전에 신부님이 간곡히 설득했다는데, 새로운 적을 만들 필요가 있겠냐고 응수했었다는, 흥, 그런 볼테르를.

 

 

    이면 승욱의 세계는 늘 되돌이표였다. 대륙 한복판을 누비면서도 계속 바다를 꿈꾸는 자신을 의아해했다.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칼레…… 기껏해야 그가 이름으로 알고 있던 바다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들떴다. 바닷물은 늘 푸르지만 어두웠다. 밝은 바다란 없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한국에 있을 때에, 아니 자라는 동안 내내, 그가 바닷가에 가 본 적이 없었다는 희한한 생각에 가슴이 덜덜 떨렸다. 내가 바다를 마주할 수 있을까. 바다, 바다를.

    첫 번째 기회는 함부르크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치 레스토랑의 아들과의 연결이었다. 일이 쉽게 풀린다는 생각에 함부르크로 내달은 그는 허허벌판에 온 느낌을 받았다. 함부르크는 바다가 아니라 대도시, 거대한 부두였다. 우리나라 부산특별시쯤 되나, 소득 수준으로는 베를린을 넉넉히 제친다고도 했다. 부의 근원인 수출업 때문에 외국 회사들과 외국인들이 ‘득실거리는’ 거대 도시였다. 승욱과 같은 객들을 제외하고도 거주 외국인이 60만이 넘는다니, 7명 중 한 사람은 외국인이라는 통계였다. 근년 들어 독일에 8년 이상, 함부르크에 3개월 이상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시의회 투표권도 있다나 없다나. 무조건 과밀집이라는 느낌에 바다로 향하던 숨이 막혔다.

 

    함부르크에서도 우선은 관광안내서를 펼쳐들었다. 발을 적셨으니 기본은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은 하자는 생각이 저열하다는 것은 어렸던(?) 그때는 잘 몰랐었다.

    유럽답게 우선 웅장한 교회가 있었다. 성 미카엘 교회는 외관에서 본 예상과 달리 루터의 개신교였다. 2,000명도 더 넘게 들어갈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면 어쩐지 개신교가 어울리기도 했다. 132미터 높이의 바로크 종탑을 오르는 갈래 길, 453개의 계단을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거나. 이런 선택의 유혹은 왜 있는 것일까.

    훨씬 나중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은 조금은 더 단순한 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건물 자체의 거대함에 압도당했다. 스무 명인가 독일황제들의 입상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황제들은 다 아름다운가. 시청보다는 왕궁의 모습이었다. 안뜰에는 여신의 분수가 있었는데, 신들이 좀 많아야 성스런 그 이름들을 기억하지. 시청 근처 보행자들을 이끄는 쇼핑 거리들은 거기 그냥 있으라 내버려 두었고, 문화 문화…… 예술 예술…… 쿤스트 쿤스트…… 미술관들이 모여 있는 거리, 커피 박물관도 있다니. 마음 다잡고 공부하는 심정으로, 월요일을 피해서 미술관 투어도 커피 박물관 투어도 모두 해냈다. 정말 공부를 이렇게 했음 좋았을 걸, 승욱은 혼자 웃었다. 인생에는 어느 순간에나 후회라는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나중의 후회를 미리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더더욱 관광을 놓쳐서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존 레논의 이름으로 유명한 리퍼반 밤 문화를 체험할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엘베강 관광크루즈 같은 것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 그땐 젊었다. - 에너지가 고갈되었다. 그는 그만 바다를 따라 내려가 암스테르담으로 칼레로 향하고팠다.

 

 

    암스테르담에서부터는 실제로 일정한 주거도 없이 다만 떠도는 여행자가 되었다. 독일에 도착해서 반년이 지났으면서도 여전히 영어로 돌아다니던 승욱은 암스테르담에서 이상하게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곧 다시 영어로 물러났다. 일 인실 하나를 주문하면서 ‘아인 아인첼침머’ 라는 말에서 자신이 더듬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태생의 언어에 없는 관사 때문임을 알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자신이 독일어로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것은 예감도 아니었다. 자명했다. 그는 그냥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역시 역에서 준비한 안내서에 즐비한 프로그램에는 페리에서 시작해서 왕궁이며 교회며 쇼핑거리 동물원 등 없는 것이 없었다. 무조건 덮어버렸다. 가슴 아프게 안네 하우스에 갈 생각도 없었다. 무작정 거리를 어슬렁거리던 승욱은 보물을 발견했다.

    내가 어쩌다가 고흐의 작품을 내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승욱은 좀 천박한 말을 쓰자면 횡재라고 소리칠 뻔 했다. 고흐 자신이 처음으로 ‘작품’이라고 말했다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 그것은 사람에게서 멈춤을 유발했다. 숨이 막혔다. 언젠가 미술책에서 보았던 기억과는 너무도 달랐다. 책상 넓이의 액자 안에서 칙칙하고 지저분한 채색으로 살고 있는 이 시커먼 사람들은 승욱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땅을 파던 투박한 손으로 진지하게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승욱에게로 들어와 버렸다. 숨을 가다듬고서야 다른 작품들도 눈에 담았다. 마지막 해에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 등을 그릴 때까지 겨우 6년뿐이었다니. 쉬라와 비슷한, 전혀 고흐 같지 않은 점묘파 화풍도 끼어 있어 놀랐다. 모르는 것 천지였다. 아름다운 〈꽃이 핀 아몬드 나무〉 앞에서도 한참을 서 있었지만, 머릿속은 시커먼 손이었다.

 

   인공 운하 길을 따라 걷던 승욱은 다시 온전한 바닷가, 그냥 바닷가를 찾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30분도 떨어져있지 않다는 잔트포르트. 누가 들어도 잔트는 샌드 비슷하니 모래를 뜻할 것이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바닷가, 그런 뜻일 것이었다. 그는 다시 암스테르담 역으로 내달아 잔트포르트에 일인실 하나를 예약해놓고 바닷가, 진정한 바닷가로 내달았다.

    바닷가는 바닷가였다. 계절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드물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홀함 속에 슬픔이 밀려왔다. 바닷물을 향해서 내달았다. 바닷물, 바다의 물, 물들. 두 손을 바닷물에 파묻었다.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야 바닷물을 맞닥뜨리다니. 이것이 바닷물이구나. 이 너무도 너른 바닷속 얼마나 멀리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있을 것인가. 잔트포르트의 바다는, 이 북해의 바다는 다른 목소리로 울고 있을까. 아버지이, 아버어지이…….

    해가 지고 밤이 오는지도 모르고 거기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실은 밤이 빨리 왔다. 북해에는 밤이 빨리 오는구나. 밤이. 적막이. 적막이 빠르구나.

    바닷가, 다시 바닷물을 찾아서, 두 손에 움켜쥐고. 그는 이튿날 넋이 빠진 얼굴로 아침 바닷가를 헤매다가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거기라야 더 아래로 다른 바닷가로 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이름을 들어 겨우 아는 대로 칼레를 찾기로 했다.

 

 

    칼레의 해변으로. 승욱은 암스테르담에서 칼레행 기차를 탔다. 5시간이면 가는 곳이니 서울에서 부산쯤으로 국경을 넘는 여행이었다. 기차 안에서 안내서를 읽었다. 맨발로 해변을 걷는 것은 매우 편안하며 바닷바람이 몸을 불고 기분이 좋습니다, 라는 내용의 도드라진 글씨. 그래, 나는 칼레의 바닷물을 만나러 가는 거야. 마음이 먼저 달렸다.

    칼레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에 탈환되었다고 소개되었다. 백년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영국령으로 존재했다는 말이었다. 200년이 넘는 그 동안, 그렇더라도 칼레 사람들은 프랑스 말을 하고 살았겠지? 언어의 자존심이 대단하다는 프랑스인들이니까!

    초등학교 때였지, 아마. 중학교였나.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은 무한 감동이었다. 영국-프랑스 전쟁은 아니었어도 그 비슷한, 그러니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했던 때의 이야기였다. 알자스-로렌 지방을 전리품으로 넘겨줘야 했고, 학교간판도 수업도 독일어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때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시간이라는 애틋한 설정은 우리를, 학생들을 프랑스 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생님도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 한글 수업을 금지당했던 서러운 감정을 잔뜩 실어서 가르쳤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프란츠, 완전 독일인 이름인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의문점은 알자스-로렌 지역이, 특히 알자스는 역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독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야 풀렸다. 하지만 1차대전 후 다시 프랑스가 합병해버린 지역이라니, 이것은 또 무엇인가. 승욱이 대학생이 되어서야 그런 사실들을 알았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감동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사실 알자스는 현재에도 프랑스로부터 분리주의 움직임이 커져가는 곳인데, 소용없다. 「마지막 수업」에서 독일은 적이다.

 

    칼레에서는 승욱이 찾는 바닷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보다 훨씬 먼저 유명한 이미지로 굳어진 것, 로댕의 조각품 〈칼레의 시민들〉이 있었다. 실제로는 조각품보다 20년쯤 나중에 만들어진 드라마 작품을 먼저 알게 되었다. 연두를 따라간 독문학 수업에서 동명의 드라마 작품을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왜 독일 작가가 프랑스 칼레의 시민들을? 그런 것은 지금은 의문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유럽은 유럽이다.

    독문과 수업이 떠올랐다. 교수님은 이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되 충분히 성찰되고 해석되었다고 했다. 백년전쟁의 와중에 영국왕이 칼레를 포위하고 도시의 전멸 대신 조건을 내건다. 대표 시민 6인이 맨발에 탈모로 수의를 입고 목에 밧줄을 걸고 투항하라! 그렇게 예상대로(?) 유럽의 전유물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펼쳐진다. 주전론자 대위에 맞선 평화주의자 으스타슈 – 그 발음은 정확하지 않지만 – 가 희생을 자원하자 곧 이어 6인의 지원자들이 나선다. 2막에서는 7인이 된 지원자들 중 1인을 제외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의 희생이 일시적 흥분상태의 결정이 아니라 참된 내적 결단이 되는 승화작용을 한다. 결론은 아침에 시청 앞 광장에 나오는 순서로 정한다는 것. 3막의 아침, 놀랍게도 첫 번째 지원자 으스타슈가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들 따라서 관객들도 술렁술렁 그를 의심하는 순간, 그는 절대적 희생을 자처하고 죽어서 관 속에 누운 채 운반되어 온다. 관객의 정화작용은 한껏 상승된다. 극적으로 영국왕은 왕자의 출생에 맞춰 6인의 희생을 면하는 해피엔딩(?).

 

    드라마를 현장에서 조각품으로 만나보는 감격은 남달랐다. 항복, 항복의 의식이란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 장면을 승화하고픈 어떤 이유는 질기도록 오래 가는 것인가 보다. 칼레 시가 로댕에게 조각품을 의뢰한 것은 항복의 시점에서 무려 500년도 더 흐른 뒤였다. 대단했다. 그런데 5년인가 10년인가 걸려서 만들었다는 로댕의 조각품은…… 의인 중의 의인, 희생정신에 투철한 영웅들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앗, 눈앞에 서있는 그것은 이상한 뒤틀림들이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이별과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수척한 모습들. 머리통을 움켜쥔 열 손가락, 되돌릴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볼까 망설이는 동생 피에르, 같은 마음이면서도 동생을 다독거리며 말리는 형의 슬픈 얼굴, 성문의 열쇠를 들고 나와서 넋이 빠져있는 모습의 자크 드 비상…….

    겨우 이런 낙담한 인물들이었다고? 완성된 조각상들을 본 칼레 시민들은 무척 실망했었다. 그와 함께 로댕의 변도 전해졌다.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더라면 사실성이 결여되었을 것이고, 드높은 받침대 위에 영웅성을 강조해서 만들었더라면 진실을 가렸을 것이라고! 영웅성이라는 환상을 찬양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도 힘도 아니라고 말했단다. 예술이란…….

    당연히 조각품 〈칼레의 시민들〉은 세계 여러 곳에 수출(?)되었다고 자랑이었다. 너무도 유명하다보니 어디선가 한 사람쯤은 도둑맞기도 했고. 그러니까 영국 북단 글래스고에 전시되었던 작품 중에서 장 데르의 상 하나가 통째로 분실되었다는 것, 1949년이었다니 영원히 행불인가?

    아, 로댕의 조각품을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누군가 훔쳐가지 않은 온전한 〈칼레의 시민들〉을! 승욱은 누가 볼세라 슬그머니 쓸어보았다. 사실 로댕의 〈지옥의 문〉 제목만으로도 떨렸던 옛날의 기억이 새로웠다. 멋모르고 미술책에 있는 〈생각하는 사람〉에 관해 떠들다가 그 모델이 바로 단테라고, 『신곡』을 쓴 단테의 모습이라는 미술 샘의 말에 놀랐던 일, 그로부터 시작된 「지옥」편 탐구(?)가 새롭게 다가왔다. 어려웠지만 읽어보려고 애썼던 지옥 이야기를 보면, 형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되돌려 받는 형식이었다. 콘트라파소 – ‘정반대의 고통’을 뜻하는 이 말은 인과응보와 통한다. 지상에서의 악행과 똑같이 대응하는 지옥의 형벌이라면…….

 

    승욱은 생각했다. 내가 지옥의 문을 열게 될 어느 날, 마음을 숨긴 죄는, 마음을 모른 채 한 죄는, 그랬다, 마음을 속인 죄는 어느 지옥에 속할까? 승욱 자신은 아무래도 마지막 ‘배신 지옥’에 가게 될 것만 같았다. 유다와 브루투스가 악마 루시퍼의 발아래 눌려있다는 그곳에. 기독교의 신을 모르는 연두도 천국에는 못 갈 것이다. 예수 탄생 이전의 선인들도 천국에는 가지 못했다. 잘 해야 지옥의 천국이라 할 림보에 머물까? 진짜 지옥은 아닌 림보에.

    걱정은 그때로 끝이 아니었다. 로댕, 대체 어떤 인간이냐, 당신은? 당신은 어느 지옥에 가셨나? 뒷날, 한국에 돌아온 뒤 빈둥거리던 어느 날 영화 〈카미유 클로델〉을 보고나서는 로댕에 대한 환상이 헷갈렸다. ‘나쁜 위대한’ 예술가! 승욱으로서는 자신의 간사한 마음도 미웠다. 사실 조각가로서의 로댕을 존경하는 데에는 〈지옥의 문〉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예술과 예술가의 삶은 또 다른 차원의 성찰을 필요로 하는, 아,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도 풀리지 않은 애매한 과제다. 그러니까 그때 〈칼레의 시민들〉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 안경도 필요 없던 젊은 날 직접 보았으니, 그것이면 되었다.

    하지만 조각품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떤, 조각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술작품이, 그림이건 조각이건, 또는 문학작품이건! 드라마의 대사가 다시 떠올랐다. 영웅적 아들의 시신 옆에서 눈 먼 아버지는 외친다. ‘나는 새로운 인간을 보았소. 이 밤에 그가 태어났소!’ - 그때 우리는, 나는 생각했다. 새로운 인간이 무엇일까. 새로운 인간. 새로운…….

 

 

    새로운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탄생한다. 삶의 루틴에서 깨어나는 순간 인간은 타락하기도 부활하기도 한다. 새로운 인간은 부활은 그러니까 죽어서 태어나는 인간을 말한다. 칼레가 아닌 어느 곳에서나 새로운 인간이 태어난다.

    승욱은 우리 역사의 지극히 치욕적인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 중 하나,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 세워져 있는 삼전도비, 삼전도 청태종공덕비 말이다. 청태종이 공덕을 쌓았다고! 말도 안 돼! 게다가 사적이라니!

    저무는 명과 떠오르는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과 인조의 서로 다른 외교정책을 어쩌랴. 흔히 ‘나쁜’ 광해가 외교적으로는 옳은 판단을 했을까. 인조반정파 대신들은 친명파였고, 성난 후금은 정묘호란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청으로 개명하며 승승장구하더니만 병자년에는 12만 대군을 파죽지세로 밀고 쳐들어왔다. 이듬해 곧 정축하성(丁丑下城)! - 우리 실록에는 성에서 내려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항복은 항복이다.

    신하의 예를 갖추라!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 – 이라거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 – 그 삼전도의 굴욕을 그들은 청태종공덕비를 세워 기리라고 강요했었으니, 미칠. 1639년의 그 공덕비(?)를 고종이 1895년에야 귀부부터 뽑아버리라 했다는, 그러니까 250년도 넘어서야 겨우 엎었다.

    그런데 일제는 왜 이를 미화해서 복구했는지, 왜 우리에게 주입해서 가르쳤는지. 뻔했다, 조선족은 항복에 걸맞은 민족이다, 라고. 진정한 굴욕의 광무 11년, 아,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정미7조약 후 일제의 만행을 떠올려 뭣하나. 아니, 어떻게 광복 후에도, 어쩌면 얼빠진 친일파들의 재집권으로 그랬을까, 삼전도비를 그대로 가르쳤다. 그대로 배웠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순간에도 새로운 인간은 있었다.

   새로운 인간, 척화삼학사(斥和三學士), 선양에 끌려가 처형된 삼학사, 그들을 새로운 인간이라고 배운 적이 없었다. 승욱이 사학과에 진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삼학사의 이름들을 알기나 했을까. 평양 서윤(庶尹) 홍익한, 홍문관 교리 윤집, 사헌부 부교리 오달제 - 승욱은 그날 밤 그들의 이름을 세 번씩 불렀다. 이역만리 어두운 천장에 대고 큰 소리로 불렀다. 하늘은 어느 때고 어디에서고 통할 것이었다.

 

    다시 날은 밝았다. 칼레, 명예회복을 위한 조각상을 세웠던 칼레 시, 그러는 가운데도 도시는 변화 또는 진화하고 있었다. 승욱이 〈칼레의 시민들〉을 감탄하고 있는 동안, 그 순간, 칼레는 숙적을 망각하고 있었다. 영국과 마주본 지정학적 조건은 현대사에 더더욱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칼레는 어느새 동반자로 변해있는 영국과의 해저터널의 개통을 앞둔 최첨단 항구도시였다. 말이 그렇지 해협 – 해협이라니 – 을 통과하는 50킬로미터의 해저터널이라는 꿈이 이듬해면 실현된다는 세상이 되어있었다. 칼레 역에서 영국 애시포드 역까지 기차는 겨우 35분 걸릴 것이라 했다.

    그러라지, 해변으로 가는 거야! 날씨가 좋으면 해협 맞은편 영국 해안을 볼 수 있다잖아. 프랑스에서 영국을! 바다 건너 아스라이 하얀 바위벽이 있는 땅끝을 두 눈으로 바라본다, 네 두 눈으로, 그것이면 되었다.

    막상 해변으로 향하자 뭔가 아슬아슬했다. 급했다. 바다 보다는 바닷가 주거지 쪽으로 삼각 바닷물로 들어와있는 칼레의 등대도 외관만 보면서 지나쳤다. 우선 55미터라는 높이도 대단하지만 모습도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등대지기라 하면 애처로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지나쳤다. 진정한 바닷가, 쁠라쥬 드 칼레로 내달았다.

    마른 바닷바람이 얼굴을 향해 불어왔다. 잔트포르트 이후 바다는 바닷물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바닷물과 닿아있는 느낌이었다. 바닷바람이 왜 물기를 머금지 않았을까? 그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바닷물을 볼에 느끼고 싶었는데. 날씨 때문일 수도 있었다. 파도는 넘실대고 있었다. 칼레 부두의 긴 다리는 주욱 뻗어있고 그 끝에는 또 작은 등대 하나. 정말 도버해협 건너의 하얀 절벽이 아스라이 보였다. 저 곳이 영국이라고? 영국?

 

    하기야 부산에서 대마도가 보인다고 했던 생각이 났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섬이겠지만, 우리는 대마도다. 세종 때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나 성종 때의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상도 계림에 속한다 했었고, 17세기의 『지봉유설』 에는 진도군 대마도였으니까. 을사의병의 노익장 최익현이 유배되었었다는 섬 대마도 – 그 섬이 부산에서 50킬로미터 정도로, 부산은 물론 울산 등지에서도 보인다 했다. 가보지는 못했다. 한반도도 모르면서, 한반도 바다들도 모르면서 이곳 북해의 바닷물을 품어 만지고 있다니. 승욱의 집에서는 사실 바다는 늘 금기였고, 그는 그때까지 바다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렇게 고향을 멀리 멀리 떠나와서 바다를 바다만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잠드신 바다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했다. 목포 남쪽 조도 앞바다에서 북해의 칼레 항구까지는 얼마나 먼 거리일까. 직선거리라 해도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관통하자면 1만 킬로미터는 될 것이다. 바닷길로 인도양으로 아프리카를 돌아서 북해에 이르려면 좋이 3만 킬로미터는 파도를 넘어야 할 것이다. 돌아가면, 어머니의 고향 집에 가면 이제는 바다를 찾으리라. 어쩌면 어머니와도 함께.

 

    칼레에 왔으니까, 바다도 보았으니까, 바닷물도 만져 보았으니까, 시청 건물도 시청 앞 광장도 느껴보는 것이 바른 생활(?) – 그때까지는 - 승욱이 할 일이었다. 잘 했다. 생각 보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세상은 볼 것, 만질 것, 경험할 것들로 넘쳤다. 그런데 프랑스는 다른 이름으로 ‘볼테르의 나라’라고 한단다. 참, 자유평등이라더니. 특이하게도 한 사람을 콕 찍어서 조국을 볼테르의 나라라고 한다고? 그래. 한국에 돌아가면 90권에 이른다는 그의 책들 중에서 우선 소설 『캉디드』를 읽으리라. 대표작이라니 번역은 되어있겠지만, 제목을 들어봤던 기억은 없었다. 소설을 여럿 썼다는 것은 아예 몰랐다. 독일이 그렇게 내세우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빙을 받았었다는 특이한 사실도 베를린 도착 후에야 알았으니까. 캉디드 – 그 이름 한번 이상하다.

 

 

    괴테 인스티투트를 어느새 망각하고 있었다, 아차. 바다를 보려고 유럽에 온 것은 아니었는데, 바다를 따라 돌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떻든 계획은 실행되어야 했다, 결과에 관계없이. 그런 생각에 지배되자 승욱은 괴테 인스티투트 초여름 학기 등록을 위해서 처음 예정대로 슈베비슈 할로 서둘렀다. 반년 이상의 체류기간에도 초급반에 배정을 받으면서는 풀이 죽었다. 본격적인 수업은 베를린의 사설 학원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해 보자, 하면서도 느꼈던 생각은 가을 학기에 대학 진학은 불가능하리라는 예감이었다.

 

    늦으면 어떠랴.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해서 알게 된 상황으로는 어머니나 두루 별다른 변화는 없으셨다. 정미소 일도 전부터 이름만이지 거의 당숙이 도맡으시고, 딱히 할 일이 많지 않으신 어머니는 늘 성당 일이 전부였다. 언제 어디서나 조심해, 투틸로. 성호경과 주님의 기도는 늘 함께 하고오~. - 예, 어머니.

    승욱은 소리까지 내본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악에서, 다만 악에서…….’

    악이 무엇일까. 유일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왜 선만 존재하지 않고 악까지 있을까.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그런데 왜 사과가 있었을까. 사과 때문에 원죄가 발생하였으니, 죄로 인하여 악이 저질러졌다. 죄라는 관념은 실체가 되었다. 교만, 인색, 시기며 질투, 분노…… 이런 소죄들을 경계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유산, 간음, 배신, 사기, 불공정 임금, 타인에게 죄 짓게 하는 것, 거룩한 것을 불경케 하는 것…… 이런 대죄들은 고해성사가 필수적이라 배웠다. 불공정 임금? 그것은 대죄다. 대죄가 흔했다. 세상사람 모두가 가톨릭 신자는 아니니까. 배신의 죄 – 앗, 투틸로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죄인이었다.

 

    악한 마음, 악을 가까이, 악에 물들기 – 악이 무엇일까. 여전히 오리무중인 개념이다. 독서에 몰두해봤지만 인식으로 저장되지는 않았다. 일찍이 오리게네스 때부터도 악은 실체가 아니었다. 실체라면 절대자 하느님이 창조하신 실체들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실체는 아니되, 실체로서의 선의 부분적인 결핍 정도가 악의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온전히 선하지 않음이 악이다. 선의 결핍이 악이라는 것이다.

     논증에 야무진 친구들이 4단논법 정도로 따질 때는 조금 흔들린다. 그러다가도 어느 틈에 되돌아온다. 어려운 말이지만 체득되었다고 해도 될까.

    너의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악을 막을 의지가 왜 없냐.

    너의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악을 막을 능력이 왜 없냐.

    너의 하느님이 악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있다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왔냐.

    너의 하느님이 악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너의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냐.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것 같았다. 슈베비슈 할에 웅장히 서있는 교회 이름도 성 미하엘 교회였다. 독일, 아니 유럽 어디에도 성 미카엘교회가 있나 싶었다. 1511년에 세워졌다는 그곳 성 미카엘교회는 그 자체로서 경이였다. 교회 앞으로 펼쳐진 광장 전체 넓이의 54개의 계단, 500년이 넘은 돌계단이라니! 게다가 그 계단 위에서는 전설적인 유명한 야외극이 공연되었다. 60년의 전통! 승욱은 그렇게 공연되는 연극들 중 한편을 보게 되었다. 보았다기보다 거기에 빨려들어갔다. 밤하늘에 검은 새 떼는 날고…….

  그때 어둑한 계단 위 넓은 무대에서는 〈한여름 밤의 꿈〉이 펼쳐졌다. 셰익스피어의 밤? 기대했던 작품은 당연히 독일 고전극 정도였지만, 이상하게 그 여름에는 공연목록에 없었다. 〈한여름 밤의 꿈〉이 펼쳐지는 숲속, 밤의 숲 무대는 주변의 어둠과 어울려 충분히 실감을 돋웠다. 하지만 티격태격 우여곡절 끝에 요정들의 도움으로 세 쌍의 결혼식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결말은 그 장소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들었다. 오히려 단골 메뉴였었다는 실러의 〈군도〉를, 그 숲속을 상상하게 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계단 무대 위에서라면 카를의 비극이, 한량 대학생에서 혈육의 배신으로 산적 두목이 된 그의 숲속 요새에 타오르는 불꽃이 적격이었으리라. 아버지 영주님의 비통, 그리고 절망 속에 계단을 오르내릴 아말리아의 풍성한 치마…….

    희극을 보면서 비극을 떠올리는, 없는 것을 탐하는 죄, 이것은 어떤 죄일까. 무심코 「환희의 송가」를 서툴게 읊조렸다. 한국말로. 실러 사후에 베토벤이 〈교향곡 9번〉에 쓴 그 부분을.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낙원의 딸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에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

        형제여, 별이 빛나는 하늘 저편에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계실 것이다! [……]

 

 

    계실까,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실까. 그렇게 가을이 오고 있었다. 괴테 인스티투트 코스와 코스 사이는 짧았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한국 신부님을 따라 잠시 로마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등록을 했다. 학생 숫자는 엄청 줄었다. 대부분 독일어인증 시험에 돼서 대학에 겨울학기 등록을 하기 때문이었다. 승욱은 일종의 재수생 느낌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12월에는 여름학기 원서를 내야 할 텐데, 사실 아직 대학을 학과를 정하지도 못했다. 그러는 동안 일상 독일어는 조금 편해지고 있었다.

 

    가끔은 집에 항공 엽서를 보내 안부를 전하기도 했는데, 한참을 게을렀다 싶어서 우체국에 가서 전화를 했다. 휴, 어머니는 웬일로 거의 훌쩍이셨다.

    아니, 어머니, 왜 그러세요? 투틸로 잠깐 들어갈까요?

    무슨, 아직 대학은 시작도 안 했담서. 그냥 가을이라. 가을 아니냐. 낙엽들 쓸다가, 낙엽을 쓸다 봉께, 먼지들 때문에야…….

   먼지들 때문에 눈물 콧물을 흘리신다는 어머니는, 승욱의 어머니는 또 바다에서 일어난 참사 소식 때문에 며칠을 그러고 있었음을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 잊힐 만하면 떠오르는 바다의 노여움은 조용하다 싶을 때면 잠시 숨을 고르는 때인가 보았다. 부안이면 전북인데, 부안 앞 바다에 위도라는 제법 큰 있는 섬이 있었다는데. 새의 섬 조도(鳥島)이면 어떻고 고슴도치의 섬 위도(蝟島)이면 어떤가. 섬과 뭍 사이를 오가는 바닷길이 늘 문제다. 이번에는 위도에서 나오던 300명쯤 사람들이 삶을 멈췄다는 뉴스였다. 수습일까, 실종이면 어쩌나. 배가 꽤 컸었나 보았다. 파장도 엄청 났다. 몇 백 톤급의 예인선이며 인양선들이 동원되었다고.

    조도로 향하던 사고 정도는 깡그리 잊혀졌다. 과거를 되새기며 다시 한 번 애도하는 목록에도 없었다. 바다 속으로 떠난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이다. 바닷물에 갇힌 사람들은 방법이 없다. 몸 전체가 바닷물에 잠식되면 5분을, 아니 2, 3분을 버티지 못한다. 인체가 그렇다. 고통이 짧아서 어쩌면 다행일까.

 

    아, 아버지이. 어머니를 보고 계셔요? 볼 수 있나요? 하느님은 어머니를 보고 계시겠지요? 무력한 승욱은 먼 먼 땅에서 따라 울었다. 나머지 가을을 또 다가올 겨울을, 겨울이면 돌아올 아버지의 기일을 어찌할거나. 빈 무덤에 혼자서 가시겠지. 어머니 혼자서. 왜 어머니는 계속 혼자이신가.

    승욱은 마른 눈물로 흐느꼈다. 너는 왜 또 이리 멀리 떠나와 있는 것이냐. 아무리 어색하더라도 연두의 곁에 머물며, 언젠가 틈을 보아서 맘을 전하고, 그러니까 고백을 하고……. 그렇게 그렇게 사람들이 모일 수는 없었던 것이냐. 거절당할까, 그것이 두려웠더냐. 차라리 연두랑 함께가 더 두려웠더냐. 어머니 혼자서 어른인, 외로운 집. 식구, 가족, 그런 단어들이 주는 이미지가 부실한, 부실해서 그 다음이 불안하기만 했던 너. 평생을 가도 시작이 어려운, 시작할 방법을 모르는 너. 너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연두에게로 다가갈 수 없었다. 너는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었다. 거기 그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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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PEN광주> 2024년 22호, 282~302쪽.

* 제목의 '침묵9'는  교정 실수로 '침묵6'으로 인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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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5. 3. 1. 12:05

 

 

 

침묵8 졸업식  

 

 

    졸업식을, 연두의 졸업식을 기다리지는 못했다. 원래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에 나타나는 일이 그때 복학을 미루고 빈둥대던 승욱이 고안해낸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가을은 유난히 빨리 지나는 법이고, 우물쭈물 예비역들과 섞여서 졸업식에 나타난다? 괜찮은 장면이었다. 아무렇지 못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채 연두를 맞닥뜨릴. 그런데 뜻하지 않게 또 한 번의 도피처가 나타났다. 다소 엉뚱하달까, 전혀 예견되지 않았던, 군대와는 비교할 수 없게 밝고 자유에 넘치는 피난처였다.

 

    승욱은 시제에 참석하고 나서도 그대로 고향집에 머물렀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대학가는 마음속에서도 멀어졌다. 종일 말없는 그를 어머니는 이런저런 말로 위로를 해주시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많이 고마웠다. 왜 저려, 벙어린가 벼, 동네에서 평소에는 그런 말을 듣는 어머니였는데.

    투틸로, 뭘 먹을끄나. 곰국도 질렸을 것이고이.

    투틸로, 밖에 좀 나와봐라이. 올해는 은행잎들 유난히 노랗네. 너 어려선 똑같은 두 잎사구 찾는다고 퍽도 좋아라 했제.

    투틸로, 쉴 때 쉬여, 평생을 살라믄. 평생 처자식들 먹여 살리기가 쉽가니.

    이런 말씀에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대로 갈기갈기 찢겼다. 아버지는 그러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나이 서른한 살 때 어디론가 사라지신 아버지에게는 평생 처자식을 먹여 살릴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을까. 그것이 늘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누굴까. 누구였을까. 승욱의 기억 속에 희미한 파편 두어 개로 남아있는 아버지. 얼굴이 맞닿았을 때의 까끌한 감촉, 품이 따뜻했지만 까끌해서 찡그리며 피했던 큰 얼굴. 또는 그의 눈에 눈꺼풀 속에 짙게 그려진 방문이 있었다. 자라면서 떠오른 흐릿한 영상에는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이상한 그릇 위에 올려진 이상한 것들, 지금 생각하면 산자며 곶감들 어쩌면 사과도…… 그런 풍경이 있었다. 방문은 오래도록 닫힌 채였고, 그는 할머니의 품 안에 붙들려서 문을 열어볼 수가 없었다.

    1973년 1월 25일 이래 아버지는 어딘가 차갑고 어두운 물속에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뭍에서 20km도 안 떨어진 바다 위에서 배가 침몰했다고 했다. 나중에 나중에 다 커서 자세한 내용들을 찾아보았을 때 그는 소스라쳤다. 애초에 정원 50명의 배에 그 두 배도 넘는 136명의 승객을 태웠었다니! 폭풍우가 해제도 되지 않은 아침에 출발을 감행한 그 무모함이라니. 중간 기착지에서 내렸던 27명의 아슬아슬함이여. 조도로 향하던 배에 거센 폭풍우가 바닷물을 몰아넣었고, 물은 엔진을 꺼버렸다. 그러니까 사고 전까지는 이러쿵저러쿵 멀쩡했던 어른 아이 109명이 물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무 죄 없이. 그 중 48명이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19명, 바다 속으로 사라진 실종자는 42명이랬다. 1/42라는 숫자로만 남은 아버지.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몇 백 명씩 사망했던 선박침몰 사고들이 간혹 있었던 때라서 크게 주목을 받지도 못했다. 바로 3년 전 발생했던 남영호 사고에서는 희생자가 300명도 넘었었다. 신문에 크게 보도된, 바다를 떠다니는 감귤상자들 사진들도 그대로 함께 눈 속에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때였겠다. 그때도 화물 적재 허용량을 4배 이상 초과했다는 무지는 설명이 안 되었다. 시신 인양마저 날씨 핑계로 속전속결로 쉬 중단되었고, 구조된 생명은 고작 12명이었다니, 지금 들어도 무서웠다.

    한성호 사고쯤은 남영호 때 300명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겠다. 겨우 한 달 전에도 부산에서 출발하여 남해를 다니던 흥안호 사고로 사망 십여 명. 그렇고 그런 선박사고들 중 하나로 기억되는 한성호 사고는 노 투틸로 승욱의 아버지를 어딘가로 데려가 버렸다. 어디로 가셨을까. 하느님의 뜻이셨을까.

 

    1943년 생 아버지, 승욱의 아버지는 그때 요즘 나이로는 서른도 못 되었다. 서른 살 아버지가 다섯 살 아들을 두고, 서른 살 남편이 스물다섯 살 아내를 두고 사라졌다. 먼 바다 밑으로, 어두운 세계 어딘가로 사라졌다. 어렸을 때 승욱은 느그 아부지는 일찌감치 하늘나라 가신겨! 라고 말하는 이웃들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말로는 바닷속으로 가셨는데, 왜 하늘나라일까. 바다나라와 하늘나라가 통하는 것일까. 어느 때 그림이나 사진들 속에서 하늘과 바다가 하나일 때도 있기는 했다.

   하늘나라도 바다나라도 모두 사람들의 뇌 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자란 뒤였다. 뇌 속이 아니라 마음속인가. ‘마인드’라고 하는 것이 뇌에 있는지 심장에 있는지, 그것을 그는 지금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한없이 무궁하게 넓은 나라들 말고, 코앞 방 안에 집안에 마당에 있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광식이가 가끔 동생 광순이를 데리고 도망쳐 나오는 그 집 마당에, 아님 그 집 방 안에 있을 그 집 아버지가 부러울 때가 많았다. 언제나 볼 수 있었던, 불그레한 멋쩍은 얼굴을 한, 수염도 좀 지저분한 광식이 아부지!

 

    울 아부지도 수염 있었어?

    아녀. 뜬금없이 웬 수염?

    어머니는 아버지가 수염이 없었다 했는데, 승욱은 좀 이상했다. 어렴풋이 아버지랑 얼굴을 비볐을 때의 느낌은 분명히 어딘가 까끌한 감촉이었는데. 하긴 쓸린 감촉은 남아있는데 손가락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느그 아부지는 선생님이셔 놔서.

    선생님은 수염 없어?

    글쎄. 느그 아부지는 단정한 신사이셨다.

    선생님은 신사, 단정해. 알았어, 엄마. 근데 단정이 뭐야?

    그래, 궁금하냐. 이제 학교 가보면 알게 되어야. 학교 선생님들은 단정하시단다.

 

    어머니의 말은 알쏭달쏭했다. 모르게 되면 침묵이 답이다. 승욱은 말수가 적은 아이가 되어갔다. 단정함도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 단정하다는 것은 비슷비슷한 것인가 싶었다. 비슷비슷한 옷을 입은 선생님들은 머리 모습도 비슷했고, 수염은 아무도 없었다. 흰머리라거나 안경이 아니라면 많이들 비슷했다. 살짝 올라간 듯한 오른쪽 어깨도 같았다. 아니, 여선생님들은 분명 다른 옷들을 입으셨다. 하지만 그 나름 단정함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도 여선생님들하고는 달라도 뭔가 모르게 단정하다는 느낌이었다. 단정함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몰랐으려나, 아무튼 그때는 그랬다. 특히나 성당에 같이 갈 때 어머니는 단정했다. 그의 손을 꼬옥 쥐고 오가셨다. 성당 입구에서부터는 머리에 흰 수건을 사알짝 덮어쓴 모습이라니! 미사포라는 이름은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는 일이 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야 알았다.

    엄마, 왜 엄마들만 하얀 수건을 써? 예쁘기는 하지만.

    응, 딱히 예쁘라고 쓰는 것은 아니야.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 보다 깨끗하고 순수할 수 있으라고 그런단다.

    엄마들만? 투틸로는 왜 안 해?

    으응, 그건 엄마도 잘 모르지. 신부님 말씀으로…….

    고운 미사포는 세례를 받은 여성들만 쓰는 것이었다. 왜 여성들 만일까, 그것은 더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나 차별은 예수님 시절에도 있었나 보았다. 특히 머리카락으로 표현되는 성적인 특징을 세속적이라 간주했으니, 그것을 가리는 것을 미덕으로 봤다는 말이었다.

    왜 하필 머리카락? 아랍의 여인들, 무슬림 여인들에게서는 아예 머리카락을 볼 수 없다. 얼굴만 빼놓고 몸 전체를 가리는 검은 차도르, 겨우 눈 부분만 내놓는 니캅, 더 심하면 몸 전체를 가리며 눈 부위만 망사로 댄 부르카까지를 입는다. 터키나 레바논 등 비교적 개방된 나라에서도 히잡을 둘러 얼굴만 내놓을 뿐, 머리카락을 내보이는 일은 없다. 코란에서도 성서에서처럼 여성은 순결을 지키고 정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머리카락은 순결이나 정숙함과는 다른 차원의 무엇일까.

 

    머리카락…… 머리카락은…… 아, 머리카락은 마법이었다.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혼란의 시작이었다. 의식의 소실, 소실점에 그 간지러움이 있었다. 연두, 그 애의 머리카락. 징글징글한 순간, 찰나에 고정되어버린 그 순간은 영원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이냐시오 신부님을 입에 달고 사셨다. 우리 본당을 떠나신 뒤로도 그랬다.

    로마에 유학 가셨다는 말을 들은 것이 언젠가 몰라. 신부님들도 계속 공부를 배우시나 봐야. 독일에 계신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는데. 공부 마치고 거서 사목도 하시고. 내가 맨날 우리 신부님께 여쭈어 보았거든.

    첫 번째 휴가를 나왔을 때도 말씀하셨다. 투틸로, 이냐시오 신부님이 돌아오셨단다. 한참 되셨다던데. 그런데 그해 가을엔 신부님 이야기가 없었다. 승욱이 먼저 물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은요? 진작 돌아오셨다며요?

    으응, 그게. 좀 아프셨나 봐.

    아프셔요?

    아니, 그게. 갑자기 선종하셨다네.

    예?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대신 자신도 모르는 엉뚱한 말을 하고 있었다.

    엄니, 저 유학을 갈까 봐요. 이냐시오 신부님이라면 그리 하라셨을 것 같아요.

    아니, 투틸로! 무슨 생각이래! 신학으로 공부를 바꿀겨?

    거기까진 아니고요. 일단 로마에 가서, 이냐시오 신부님 다녔던 학교며 성당들, 엄니, 이냐시오 성당도 거기 있어요. 꼭 보고 싶어요. 공부도 하고요.

    저 도망치고 싶어서요, 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속내는 발화되지 않는다.

    아니, 무슨? 로마를 가야 해? 얼마나 멀 겨.

    군대보다는 안 멀어요. 거긴 맘대로 왔다 갔다 하니까요.

    그러네, 그러네. 이냐시오 신부님이시라면…….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실 일이 있으면 늘 내뱉는 어구, 이냐시오 신부님이시라면…… 그것이 이번에는 한참 걸렸다. 며칠을 어머니는 몇 잎 쌓이지도 않은 낙엽을 쓸고 또 쓸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이라면…… 투틸로가 군대를 마쳤다고?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학을 미루고 있다고요? 왜? 하긴 쉼이 필요하지요.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어떤 결정의 시간에 앞서, 또는 그냥이라도 쉼이 필요합니다, 그러셨을 거다. 너 이렇게 쉬고 있잖여. 근디 로마인가 독일인가 가고 잡다면, 거까장도 미리 아셨을까? 암튼 투틸로 니가 그 길로 따라간다면 많이 좋아하실 건데. 근데 신부 공부는 말고야. 혹시라도 공부까지는 따라가더라도. 암케도. 니는, 투틸로 니는 느그 아부지 외아들이잖여.

 

    순간 승욱은 신부님을 보았다. 들었다.

    예, 신부님. 제대 후 조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길이 안 보입니다. 신부님처럼 로마에 가서…….

    로마, 로마. 그보다 독일어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신학도, 철학도, 참 사학과라 했지요. 복학을 망설인다면, 역사학 대신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말인가요? 아직 확실하지 않다면 이탈리아 가까운 남독일쯤에서 일단 독일어를 배우지요. 슈베비슈 할,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지요. 특히 여름에는. 그 사이 로마도 여행하고. 지금 교황님도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시잖아요. 폴란드인이지만 독일어 완전 잘 하시지요. 독일에서는 공부할 것이 엄청 많을 겝니다.

    왜 갑자기 로마에 가겠다는 말이 튀어나왔을까. 그 자신도 모르게 신부님의 그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충동일 수도 있었다. 대입 끝나고였을까. 어머니의 말을 듣다가, 언젠가 로마에 가면, 언젠가라도, 그레고리오 대학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당에는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기억이 순간 쏟아져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는 유학이라기보다는 그저 한번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는데.

 

      어쩌면 사투리 군의관의 경고가 계속 작용하고 있었을까. 얌마, 미주신경이 너무 억압받으면 스톱도 한다이. 뭣 땜시 자기를 억누르냐, 젊디젊은 넘이. 스톱이 뭔 말인가 알겄어? 알아 듣냐고!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스트레스를 조절하지 못하여 사회적 회피가 심해지면 미주신경이 스톱할 수 있다는 엄포이기도 했었다. 제대하면 어딘가 느긋한 환경으로 바꿔보라고, 어딘가 꽂히는 데에 적극적 관심을 가져보라는 훈수였다. 그래, 새로운 곳으로 가자! 여차하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다니셨다는 뮌스터 대학에도 가보고! 독일 누비겠네!

    어머니는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만 아니라면 눈물로 승욱과 다시 헤어지는 일을 지원하셨다. 순간 유학의 길은 그의 진지한 미래가 되었다. 이냐시오 신부님의 말씀을 실제로 들은 것처럼 로마에서 가까운 남독일 괴테 인스티투트에 가서 독일어를 배우겠다는 시작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복학은 자동적으로 미루어졌다. 연두의 졸업식을 어색하게 기다리는 일은 없었다. 늦가을 아니 초겨울에 그는 홀연히 공항을 통해서 한국 땅을 벗어났다.

 

 

    독일이 행선지로 낙착된 것은 간단한 이유였다. 나랏말 한 마디도 모르는 이탈리아 보다 덜 불안한 땅이라는 점이었다. 대학도시는 언감생심, 조용한 지방에서 독일어를 정식으로 배우고, 로마 여행도 쉽게 할 수 있는 남쪽 도시, 슈베비슈 할은 복잡한 이름만큼 접근도 쉽지는 않았다. 뮌헨으로나 정할 걸, 하는 후회를 담으면서 어렵게 찾아가야 했으니까. 비행기에서 내려서 기차를, 그것도 갈아타다니! 그렇게 도착한 슈베비슈 할은 첫눈에 생각보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코허 강을 끼고, 그러니까 소금을 생산하여 일찍이 부를 이루었던 도시라는데, 유럽이란 곳이 다 그럴까. 앙상한 겨울 풍경에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환경에 깨끗함은 거의 비현실적이었다. 목적했던 독일어학원 괴테 인스티투트는 하필 휴무 중이었고, 근처에 무작정 들어간 숙소는 2층을 숙박으로 내놓은 음식점이었다. 그때 좀 이상했다. 어떻게 식당이라는 곳이 썰렁하게 아무도 없는가 했었다.

    승욱은 조금 삐걱거리는 층계를 올라 도착한 방에서 짐도 풀지 않고 드러누웠다. 조용한 노크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주인이었다. 루어차이트 어쩌고 말을 그때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니까 브레이크타임이라고 말했다. 아, 식당도 일하는 사람들이 쉬어야 맞지. 점심도 앉아서 먹겠고. 작으나 문화적 충격이었다. 주인은 차를 대접하겠다고 그냥 천천히 영어로 말했다. 처음 만났던 순간 서툴게 내뱉었던 승욱의 독일어로 짐작해서 그것이 전부라는 것을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하필이면 주말이 시작되어버린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월요일에 방문한 괴테 인스티투트에는 막상 그에게 적당한 수업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곳은 본격적인 독일어강좌로 곧 이은 대학입학을 위한 철저한 강의들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기초적인 독일어수업을 하는 학원들이 널려있을 법한 대도시가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아, 그럴 바에야 시의적으로 아주 궁금한, 보고 싶은 것이 널려있는 그곳.

 

 

    베를린으로 가자, 그것이 선택지였다. 말로만 듣던, 영화에서도 봤던가,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으니 그 파편들은 어디에 있을까. 어떻게 남아있을까. 상반된 진영의 최전선으로 대척했던 동서가 합쳐져 있을 베를린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장벽 위에 인산인해로 올라있던 사진이 세계로 송출된 것은 1989년 늦가을로,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았다.

    독일 내에서의 이동수단은 대단했다. 거미줄 같은 조직으로 유럽을 다닐 수 있다니, 언젠가 로마여행도 미리 걱정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방인의 길은 어려웠다. 다시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기차를 타야한다. 경유 없이 가는 열차는 아침 8시경 출발이니 그 시간에 거기 댈 수가 없다. 10시경에 출발하는 도이췌 반이라는 기차는 오후 4시쯤이면 베를린 도착이었다.

    베를린 중앙역 – 일단 역 내 로커에 짐을 넣어놓고는 관광 안내서부터 샀다. 원래부터 베를린의 상징이었다는 그곳, 브란덴부르크 문이 도보 20분 거리에 있었다. 1.4km라면 대학캠퍼스 정문에서 북문까지나 비슷했다. 거의 책 수준인 영어판 안내서는 깨알 같은 글씨로 너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큰길을 따라 걷다보니 국회의사당이 보였지만 곧바로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했다. 사진에 본 그대로 그 위용이라니, 아, 고대 그리스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했다니까 그곳도 가 보아야 하나! 시공간의 일탈에 승욱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눈을 뜨자 꼭대기 사두마차가 성큼 다가왔다. 하필 개선장군으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유린한 나폴레옹이 저걸 빼앗아다가 파리 개선문 위에 앉혀놓았었다니, 독일인들 분통 터지기도 했었겠다. 곧 다시 프로이센군이 파리로 진격하자마자 되찾아왔다니, 역사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독일과 프랑스를 견원지간이라 한다는 말의 근원을 알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마차가 호위하고 있는 여신상의 정체 또한 어찌 보면 서글픈 사실의 확인이었다. 처음 건설 때 평화의 문이란 이름 따라 당연히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가 조각되었지만, 프랑스에서 되찾아 온 뒤에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로 대체했다니. 그래, 평화 보다는 전쟁이라!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란 말의 증거로구나.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한탄 같은 것이었다. 승욱은 갑자기 힘이 풀렸다. 바로 그런 힘들 뿐, 세상에는 지탱할 다른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때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의 허기를 승욱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배도 입도 마음도 고팠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고, 아예 입을 열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말도 고픈가. 시간이 흘렀는지 몇 발짝 걷는데도 갑자기 으슬으슬했다. 베를린은 확실히 북쪽이었다. 북위 52도 선을 넘는다던가, 런던보다도 위쪽이라니 생각보다 더 북쪽이었다. 졸리기도 했다. 춥고 배고프고 졸렸다. 그러면 눈곱만 끼면 제대로겠네! 불쑥 태목이 생각이 났다.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눈곱까지 끼면 인간 끝장이라고! 밥부터 먹자이! 태목이 말이 아니더라도 어서 밥을 먹고 싶었다. 명동에 해당한다는 쿠어퓌르스텐담으로 가는 U반을 찾아보았다. 거기 가면 한국 음식점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한국은 어디에나 있었다. 김치레스토랑 –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한국식당의 간판이 곧 눈에 띄었다.

    사거리에 가까운, 눈에도 잘 띄는 곳에 위치한 김치레스토랑은 한국인 노승욱에게는 그대로 행운이었다. 한국 떠나 며칠 안 된 시간이었지만, 김치라는 단어는 그를 위로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조금 어둑어둑한 너른 식당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베를린 사람들은 늦게 저녁을 먹나 싶었다.

    타크! 어서 오세요오! 아, 반가운 인사말.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컸고, 또 승욱의 귀에 익숙했다. 아무래도 고향 말투와도 비슷했다. 이름 그대로 맛있을 상상으로 김치찌개를 시키고서 멍하니 앉아있는데 아저씨 한 분이 들어왔다. 그런데 손님이 아니라 주인아저씨였다. 아, 가족들이 하는 식당이구나. 그가 그런 생각에 젖어 있을 때, 음식을 내온 아주머니가 이웃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고향에서 보는 편한 행동이었다. 학생은 관광객, 아님 유학생이요? 인자 왔지요?

    인자라니. 확실히 고향 사람들이다. 그가 피식 웃었더니, 오매 내 사투리 들켰는갑네, 그러셨다. 전라도에서 왔는갑소이. 내가 넘의 땅 와서 산 것이 30년 다 되가는디, 가만 1966년 첫 파견 팀잉께 거자 맞제라. 암튼 간에 여그 말로 겨우 삼시로 고향말은 그냥 사투리 그대로라. 알아묵는 사람 만나먼 넘 반갑제이.

    저, 그런데 베를린 오래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호텔 말고 숙소를 정하고는 싶은데요. 혹시…….

    오매 뭔 일이다요. 우리 말고 옆에 옆집에 이참에 친정아부지 칠순에 맞춰서 석 달 한국 들어간 동생네가 있는디, 나한테 맽겼는디. 잠시 잠깐 빌려주든가 그라라고.

    빈 집에요?

    아니, 다 그냥 두고 잠가 놔두고, 방 한나만 비와놓고라. 갸는 74년에 왔응께 꼭 20년 만에 간 거여.

    제가 운이 좋은 거네요. 근데 동네는요? 도심에서 멉니까?
    당연히 멀제라. 우덜이 어떻게 도심 살어라. 아아주 변두리 살제. 슈판다우라고, 모르겄제. 한국학생들은 포츠담은 다 알더만. 포츠담 다 가성께 거자 끝어리제. 그래도 차편이 좋응께. 부엌도 놔 놨응께 라면 같응거 끓여묵어도 되고. 오래 있을라믄 밥도 해묵을 수 있고. 김치나 반찬은 내가 좀 주제이.

    아아뇨. 그렇게 까지는. 오래 있을 것도 아닙니다.

    그람, 오늘은 시내서 쫌 더 놀다가 우리 퇴근 때 같이 갑시다이.

    뭘 그랴. 내가 먼저 들어가제. 학생, 성씨가 뭐요? 짐은 어디다가 뒀소?

    저는 노가 승욱이, 투틸로입니다.

    어, 세례명이네. 그람 천주교요? 여긴 교횐데. 여선 한국이름보담 쉬우니 투틸로라 그랍시다. 갑시다. 짐은 공항이요?

    아, 저 말씀 편하게 하시고요. 슈투트가르트에서 기차로 왔습니다. 짐은 역 로커에요.

    그람, 가세! 우리 애덜 또랜게 말 편하게 하제.

 

    식당 주인분들은 독일파견 광부와 간호사로 만나 한국인 가정을 이루었다 했다. 아들은 함부르크 법대로 진학해서 나갔고, 딸애는 김나지움 입시반이라 했다.

    근디 학생은 뭔 공부하는디?

    아, 그게요. 대학에 갈 때는 사학과였고요. 일단 독일 와서 역사를 그대로 할지 신학을 할지 못 정했습니다. 독일어도 잘 못하고요. 우선 저기 남쪽 슈베비슈 할인가 신부님이 추천해주신 괴테학원서 독일어를 제대로 배울라고 왔다가요.

    근데 왜 베를린에?

    뭣이 좀 안 맞아서요. 일단 베를린에 오면 독일을 잘 파악하려나 싶었네요. 또 여긴 영어로도 좀 된다고 해서요.

    신학대학에를, 신부 될라고 그랑갑네이.

    아니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부모님 계심 그라지 말고 하던 공부 계속해요. 아따, 원효대사도 아들을 낳았는디. 아들 낳고 파계승 되얐지만, 부자간에 대단한 학자가 나왔잖은가. 이두문자면 세종대왕 다음은 가제. 암튼 간에 남자는 아들을 낳아사제.

    처음 만난 젊은이에게도 훈수 놓는 것이 고향 어른들의 맛이었다. 이 댁 아들딸에게는 아버지가 계시구나. 아, 아부지, 아부지이 – 승욱은 침묵 속에서 흐느꼈다.

 

    주인아저씨가 데려다 준 집은 독일식 보급형 주택인가 싶었다. 텐트처럼 열을 맞춰 들어섰으나 반듯하게 독립된 집들이었다. 위치나 구조로 보아서 최소한의 주택인 듯, 그러나 먹고 자고 사는 일은 보장해주는 단정한 집이었다. 단정하다는 이미지가 초라함에 가까울 줄은 몰랐었다. 온수 냉수가 나오는 작은 욕실에서 씻고 나니 곧 잠에 빠질 수 있었다.

    바닷물 소리가 들렸다. 물결도 보였다. 승욱은 생각했다. 바닷물은 온 지구를 선회하겠지. 바닷물은 더 이상 흘러들어갈 곳도 흘러나갈 곳도 없겠다. 울 아부지도 그 속에 계시겠다. 일단 울타리가 없으니. 바다엔 울타리가 없구나. 독일 바닷가에는 함부르크며 브레멘 항구도 있겠다. 『브레멘 음악대』에서 버려진 동물들은 버려진 사람들을 빗댄 것이라고, 5학년 땐가, 어떤 선생님이 말해주셨는데. 바닷물이 더 돌아 내려오면 진짜 동화의 나라 암스테르담이 나오겠다. 이미 네덜란드다. 그 다음은 그 유명한 『칼레의 시민들』에……. 첫날 저녁 천장에 그려지던 바닷물은 칼레에서 멎었다.

 

    눈을 떴을 때는 생각보다 낮은 천장에 그는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침대가 높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 출근 시간에는 15분, 낮에는 30분 정도의 간격으로 버스가 있어, 슈판다우 역으로 가서 시내로 이동했다. 전철 50분을 타고 가서 동물원 역에서 환승해서 15분쯤을 더 가야 시내가 나온다. 우와, 첫날부터 지쳤다.

    그렇더라도 베를린을 탐구(?)하고 다녔다. 무너진 베를린장벽 중 1km도 넘게 남겨둔 장벽들에 그려진 그림들은 최고의 관심거리였다. 낙서 같기도 한 그림들 중 한 곳에 서넛이 몰려 있었다. 그도 멈추어 섰다. 브레즈네프와 호네커의 포옹장면을 그린 〈형제의 키스〉였다. 가만, 동독 건설 30주년에 소련 서기장의 동베를린 방문이었으니 사회주의의 결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왜 상징적으로 남겼을까,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아, 분단을 쐐기 박았던 상징이었구나. 그런 걸 왜 부수어버리지 않고 남겨두었을까. 이방인이 알 턱이 없었다. 말을 가지지 못한 채로는 소통은 아예 불가능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연출은 나중에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2,000년이던가 그쯤에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순안공항에서 연출된 김정일 위원장과의 포옹 장면 말이다. 똑같네, 똑같아! 아니, 우리의 포옹은 훨씬 의미심장한 것일까. 다음 순간, 두 정상이 조선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분열을 받는 영상을 보고 있다가 이상한 뒤틀림이 일었던 기억이 새롭다.

    뭐야, 6.25 전쟁 3년 동안 국군을 10만 명도 넘게, 민간인을 20만 명도 훨씬 넘게 죽였던 인민군의 총칼이 대한민국 대통령한테 최고의 예우를 한다?

    아니, 적이었던 인민군의 총칼도 대결 아닌 평화의 제스처를 다하는데, 광주를 유린했던 우리정부의 총칼은 세월이 흘러도 사죄는커녕 무장간첩 남파설을 단죄는커녕 그냥 둔다. 1980년 부처님 오신 날, 전날 밤 계엄군의 만행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사람들이 도청 앞으로 모여든 그날…….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금남로를 메운 시위군중들도 주섬주섬 기립자세를 취했다. 바로 그때, 시위대 맨 앞쪽 사람들            이  등 뒤쪽으로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그런 다음 귀를 찢는 총성들이 들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도청 앞 광장에 정렬해 있던 군인들은 맨 앞열이 무릎쏴, 다음 열이 서서쏴 자세로 총격을 가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았더라면 애국가가 집단 발포명령의 신호가 되는 참담한 비극을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            다. 또 총알이 총성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D일보 K기자: 나무위키)

 

 

    모스크바 여행은 그런 와중에서 정말 우연이었을까. 왠지 동베를린 중심이었다는 알렉산더 광장엘 가보고 싶었다. 30년도 더 지난 오늘은 평화의 소녀상 때문에 미테구로 더 알려진 곳, 미테는 중앙이란 뜻이다. 텔레비전 탑은 서베를린 지역이었지만, 그런 경계는 없었다. 여기저기를 걷다가 카페 모자이크에 들어가서 2마르크짜리 커피를 마시며, 가방 속에 들어있던 토마스 쿡 여행사 안내서들을 들여다보았다. 모스크바?

    세상에나. 소련이, 모스크바가, 크렘린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개념이었었나. 누가 감히 모스크바 여행 생각을 할 수나 있었는가. 모스크바 ‘모’자만 잘못 내뱉어도 간첩이었을 세월들. 토요일에 출발하는 5일간의 모스크바 여행을 결정하면서 승욱은 남극인지 북극인지에라도 가는 듯한 흥분감, 아니 폭발감을 느꼈다.

 

    최근에 일없이 모자이크 카페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다가 실망했던 생각이 난다. 폐업이라니! 그는 오히려 또렷하게 그때의 회상에 잠겼다. 12월 5일이었던가, 토요일, 슈판다우에서 8시에 출발하여 쇠네펠트 공항에 10경에 도착했다. 좌석은 14F 우측 창가였었지, 12시 훨씬 넘어서 출발했고 국경을 꽤나 넘었을 텐데 오후 4시 반쯤 착륙했지. 모스크바 시간은 1시간이 빨랐었다. 5시 거의 다 돼서 검사를 통과해서 나오는데, 여행사 인투리스트의 현지 안내인이 나와 있었다. 모스크바 대학 독문과를 졸업했다는 여성인데, 안내인에 대한 예상 치고 많이 고급스러운 차림이었다. 영어도 물론 가능했다. 유창했다. 코스모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는 곧바로 저녁이었다. 독일에서보다 성찬이었다.

    모스크바 첫날 아침, 관광객들의 관심은 단연 붉은 광장이었다. 식사하면서 안내인 설명이 ‘로테 플라츠’가 로트 아니라 쉔이랬다. 겨우 알아듣는 단어, 로트는 붉다는 말이니까, 붉은 광장이 붉지 않고 쉔, 그러니까 아름다운 광장이었다는 말이었다. 승욱은 조금 어지러웠다. 일행들은 독일어가 모국어였고, 안내인은 그를 위해 가끔 영어로 말해주었다. 공산주의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16세기에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 광장을 지었을 리가 없다고. 기온은 베를린보다 훨씬 낮은 무조건 30°F 이하니까 옷을 잘 챙기라는 말도 했다. 그러니까 섭씨로는 영하였다.

 

    크렘린 200km 20개의 탑 루비의 별들이 1.5톤이라니, 그때 승욱은 자신이 무엇인가 잘 못 알아 들었겠거니 했다. 호텔에서 샀던 영문판 모스크바 안내서에도 그런 자세한 것들은 설명이 없었다. 내려다보이는 볼가 강이 3,690km를 자랑하는 – 외우기도 쉬운 3,6,9라서 기억한다. - 유럽 최장의 강이라는 사실에 진짜 놀랐다. 아시아쪽 러시아에는 더 긴 강들도 있다고 했다. 대륙은 대륙이었다. 반도 출신, 그것도 남단에서 태어난 승욱으로서는 세상의 규모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양파형 돔 여럿으로 지어진 성 바실리 성당을 눈앞에 보고 있는 기분은 모든 설명을 초월했다. 이런 기분 때문에 악조건에도 여행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었다. 누군가랑 눈이라도 맞추며 소통을 하고 싶어서 전날 밤의 룸메이트를 찾아보았다. 룸메는 꽤 나이 들어 보이는, 독일인 치고 몸이 작은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일행 중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행을 벗어나면 큰일이었다. 안내인을 바짝 따라다니기로 했다. 유명한 스파스카야 탑을 나가면 크렘린 궁이 나올 것인데, 놀랍게도 무슨 무슨 성당들 건물이 계속 나왔다. 성모 성당, 대천사 성당, 열두제자 성당……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성당들이 종교를 마약이라던 공산국가의 붉은 광장에 즐비하다니. 유럽에서 성당, 그러니까 기독교의 의미는 절대적인 무엇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승욱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난 몇 년 뒤부터, 그러니까 지금은 이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당들에서 정교회 미사를 드린단다. 볼셰비키 혁명 때 성당들을 다 부수면서도 아까운 건물은 남겨서 박물관으로나 썼다더니,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 그러다가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그의 침묵은 자발적으로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강요당한 것, 말을 하려 해도 사용할 말이 없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방대함에 비해서 귀는 소음만을 들이고 있었다. 소리를 낼 입도 숨을 죽여야 했다. 강요된 침묵의 시공간 유럽이라니, 그는 침묵을 찾아서 떠나왔단 말인가. 소음 속의 적막감 – 어쩌면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를 느낄 수 없었던 적막감 그것과도 같았다.

 

    모스크바는 안내서에도 없는 전혀 엉뚱한 놀람들로 다가왔었다. 그의 룸메는 매년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반쯤 러시아인이었다. 예쉬케, 그 이름도 정통 독일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독소전쟁 중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루마니아인으로, 그곳에서 만났던 독일인 아내랑 종전 후 소련점령지의 소개령에 따라 쫒겨났다. 하지만 다른 친척들은 소련으로 가기도 했고, 그래서 관광이 아니라 친척을 방문하러 오는 것이라 했다. 독일에서 자신은 1/4을 받는 연금생활을 하고 있는데, 단체여행 조건이 좋단다. 호텔에서 잠자고 아침저녁 식사도 하고, 낮 동안만 친척을 만나러 가면 되니까. 러시아에서는 친척집을 방문 할 때는 심지어 배급표도 가지고 다녀야 할 정도로 상황이 나빠서, 손님이 먹고 잘 수 있는 공간은 아예 없다고 했다. 어려운 계층이라 그러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승욱은 놀랐을 밖에.

    그가 더욱 놀란 것은 저녁식사 후에 룸메에게 시내 구경을 부탁해서 지하철을 타고 나갔을 때였다. 경험하고 싶었던 모스크바 지하철, 그 화려함과 역사성 등은, 우와, 말 그대로였지만, 룸메가 맥도널드를 가겠냐고 제안할 때부터 좀 이상했었다. 맥도널드가 뭐라고! 그런데 모스크바의 맥도널드는 대단했다. 궁정만큼 높고 넓게 지어진 건물에 완전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엄중한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라니! 음식은 세계적 레시피라서 애플파이를 시켜놓고는 그는 그저 놀라고 있었다. 코가 매섭게 추운 날이었지만 안은 따스했고, 룸메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 정도가 무슨 데이트 코스라고!

    역사 속의 제정러시아, 철의 장막 속의 강대국 소련, 이어서 대 러시아 연방 – 그런 거대한 이미지들은 완전히 깨지고 있었다. 오히려 말이 없던, 말을 못했던 승욱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눈길들에서 자존감 대신 이방인 혐오감 같은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래,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녀석이냐! 있어야 했을 캠퍼스를 떠올리며,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승욱은 절로 고개를 떨구었다.

 

    날이 새자 놀라움은 연속 이어졌다. 이삼일 째 되는 날엔 조금 여유가 생겨서 호텔 로비며 공동 공간인 1층과 2층을 돌아다녀 보았다. 그런데 세상에나, 한편에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세워져있었다니. 그들에게 태극기가 무엇인가. 1950년 6월 그들이 지원한 최신형 T-34/85 중형전차들을 앞세운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했을 때, 대한민국이 내걸고 싸운 깃발이 아니던가. 러시아연방 국기와 X자로 세워져 있는 태극기 – 그 안쪽으로는 더 놀랍게도 진도모피라는 간판이 보였다. 모스크바 속의 한국, 거리에는 말할 수 없이 거대한 삼성 입간판, 대학민국의 삼성이 비록 영문자이지만 너무나도 또렷이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당연히 삼성뿐 아니라 현대나 뭐나 다들 들어왔겠지, 그는 생각했다.

 

    독일로 돌아올 때도 비슷한 줄의 창가, 좋은 자리였다. 앞자리에 아무나 앉았었는지 나중에 온 사람의 자리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냥 뒤로 가랬다. 가랬다고 갔다. 여행객들은 주로 남자들이었다. 시간에도 넉넉한 것이 한국이랑 달랐다. 불평도 없었다. 20분 연발 20분 연착 그런 것쯤은 보통인 모양이었다. 5시 10분 전이 아니고 5시 10분 도착이었다. 그만하면 준수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도 그러네, 승욱은 혼잣말로 그들에게 동조했다. 공항 밖은 불빛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초저녁이었다.

    1992년은 쉬이 끝나가고 있었다. 집주인이 한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베를린에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강요된 침묵이 너무 무거웠을까. 살아남기 위해서였을까. 한 시간 거리, 노이에 슐레 – 새 학교라는 뜻의 학원 초보반에 등록을 했다. 반 배치테스트는 있으나 마나였다. 4주간 수업에 500마르크, 10시에 시작해서 1시 15분까지였다. 주말과 특별한 휴일 이외에는 쉬는 날도 없었다.

 

 

    새 달력을 보면서 맨 먼저 아버지 기일을, 고향의 설날을 생각했다. 음력 달력을 보기 위해서 혹시나 하고 쿠담의 김치식당에 갔다. 1월 22일이 까치설날, 23일이 설날이었다. 혼자서 식은 떡국을 드실 어머니의 모습이 벽에도 천장에도 있었다. 아버지 기일엔 성당에 다녀와서 모인 친척들만 챙길 뿐, 식은 것도 안 드실 것이다. 늘 안 드셨다. 아들도 없는 이번에는…….

    성당의 모습도 있었다. 타국에 온 몇 달, 미사를 보는 성당을 구경도 못했다. 군 시절에도 드렸던 미사를 빼먹고 있었다. 한인공동체라도, 공소라도 없을까. 찾아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를린대성당, 아니 루터교회는 4개의 돔을 지닌 외관으로는 성당이지만 – 독일인들에게는 베를린 돔 - 보름스 의회에 당당히 선 루터의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 개신교 교회였다. 프로테스탄트 프로이센이 마치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 맞서려는 듯이 장엄하게. 그러고는 성당을 잠시 잊었던 터였다.

    그렇게 베를린의 겨울을 살고 있었다. 습관이 된 침묵은 도시에 일찍 찾아드는 어스름과 함께 무거운 안정을 주었다. 대신 학원에서만 열심히 말하기 - 기계적인 말 연습은 필요했다. 어느 도시에서건 괴테학원의 집중코스에 등록하려면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노이에 슐레에 다시 4주를 등록했고, 그러고는 친절한 식당 주인집으로 옮겼다.

 

    연두의 졸업식 날이었다. 2월 26일 금요일 아침, 여전히 베를린에서 가슴이 뭉클거렸다. 아니, 한국은 8시간쯤 빠르니까 벌써 끝났겠다 싶었다. 아무렇지 못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채 연두의 졸업식은 지나갔다. 아뿔싸. 나는 언제쯤 복학하여 졸업을 하려나. 복학을, 졸업을 하게 되려나. 애매한 의심 속에서 승욱은 이불을 다시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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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교수세계> 통권27호, 2024. 12. 130~150쪽

* 편집진의 희망으로 제목은 졸업식으로 단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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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4. 10. 29. 22:29
소설2024. 10. 29. 22:20
소설2024. 9. 22. 10:24

 

  침묵 7 – 울타리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 기형도, 「장미빛 인생」(1987)에서

 

 

     울타리가 높다. 높으면 담장이라던가. 담장들은 점점 높아간다. 일인가구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그가 슬픔에 민감하게 된 것은 이중으로 이유가 있다. 군대 내에서 사회불안장애 판정으로 고생했던 이래 한 세대가 지난 오늘까지도 사회생활 적응에 능숙하지는 못하다. 그 중 하나가 그 사회불안장애의 약자를 해마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고 느낀다. 사회불안장애를 의사들처럼 영어로 해보다가 약자로 읽으면 SAD - 이건 문자 그대로 슬프다는 뜻이다. 사회불안장애는 슬픔을 뜻한다.

     슬픔은 기쁨, 신뢰, 두려움, 공포, 놀람, 혐오, 분노, 호기심 또는 사랑, 미움, 노여움 같은 정서의 하나로 분류된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노여움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려다가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의 복받쳐 오는 감정, 느리게 또는 급하게……. 결국은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울타리 안으로 숨어들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그 단계에 이르면 슬픔이 극복되는 것이겠거니. 그래야 살아남을 것 같다. 심리학 서적은 열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는, 승욱은, 그 나름대로 슬픔에 대항하기 위해서 숨을 크게 쉬는 버릇을 키웠다. 비릿한 슬픔이 서서히 밀려올 때면 말이다.

     비릿함으로 버물려진 여러 감정들, 그 가운데는 우선 비굴함이 섞인다.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비굴해지는 하루하루는 군대 이후가 아니었다. 실은 군대로 도피하려던 시절부터의 버릇이었다. 군대로의 도피는 어떤 의미에서는 특권이었다. 군복을 입어보고 싶어도 군대 밥을 먹어보고 싶어도 입대 자격에 미달했던, 그러니까 학력미달로 병역면탈된 불우한 청년들도 함께 살았던 나라였으니까. 남북의 철조망이 아니더라도, 쉽게 넘을 수 있어 보이는, 그러나 쇠심줄 같이 넘지 못할 울타리들이 널브러진 세상이었다. 갈대 울타리로 보인다 해도 한 올 한 올 와이어로 감아서 결코 넘지 못하는 울타리들 말이다. 신의 아들들, 장군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 모두 영화나 소설작품들의 이름을 딴 은어인데, 이런 부류들이 각각 울타리로 나뉘어 살았음 직하다. 아무튼 그는, 승욱은 그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범주였나, 실존의 고뇌로 인하여 대학캠퍼스에서 군대로 피난을 갔었다.

 

 

      생활은 그러나 도피에 최적인 무릉도원일 리가 없었다. 지금도, 십 년 이십 년 해가 바뀌어도 그 시절 군부대 내의 의문사 이야기가 불려 나왔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라서 언제나 또 오래오래 가슴을 후벼 파는가. 시도 때도 없이, 최근에 부쩍, 군사정권 시절에 관한 관심들이 고조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영화 《서울의 봄》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두 사람 몫의 영화표를 샀다. 그런데 노쇼를 택했다. 함께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혼자서 보러 갈 것이었으니까. 그저 그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를 표한다는 심정으로 표를 샀고, 그러다가 실화를 굳이 영화로 보고 싶지 않아서 안 갔다. 그는 인지의 폭이 넓지 않아서 정우성으로 장태완을 보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것도 아닌 이태신이라는 제3의 이름으로 장태완을 봐야하는 것이 불편했다. 울타리 이쪽저쪽으로 편 가르기, 더럽고 치열한 싸움을 재차 체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돈이 남아돌아서 표 두 장을 산 것은 아니었다. 어떤 다른 영화 때는 다섯 장을 샀었고, 혼자서 갔다. 가끔은 책도 두세 권, 또는 딱 한 번이었는데 10권도 샀다. 실업 중인데! 실업 중이라도 살 것은 샀다.

 

     이야기가 삼천리로 빠졌다. 이야기란 늘 그런다. 설명하려던 가닥을 잃고 더러는 주제도 잃고 헤매게 되는 것이 이야기다. 다시 의문사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시청한 PD수첩에서 시작된다. 80년대 초 군대 내 비극들, 그가 입대하기 전에 생겼던 일들이다. 그 시절에는 어딘가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했다. PD수첩과 상관없이 또 다른 끌려간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무렵 국보위에서 사회정화를 위한답시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놓고는 할당량을 주니까, 술 과하게 먹고 전봇대 아래서 토하던 공무원도 끌려갔다 했다. 심지어는 말썽꾸러기들을 정신개조해서 보내준다는 선전을 믿고 어머니가 아들을 일부러 집어넣었다고도 했다.

군 입대도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부동시다 뭐다로 태어나서 또는 그렇게 만들어서 군대라는 단어를 모르는 특권층이 있었지만, 가끔 느닷없이 아무데서나 잡혀서 끌려간 대학생들도 있었다. 잡혀서 군대로 끌려갔다, 이것은 승욱의 표현이 아니라 팩트였다. 그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중에 입영통지를 받아들고 휴학계를 써야했고, 특수지원자로 분류되어 신체검사도 없이 바로 훈련소를 거쳐서 주로 전방 GOP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입대했다기 보다 입대 당했다. 강제입대, 강제입영. 요즘 요양원 강제입원과 맞추어보면 강제입대, 강제입영이라는 단어가 적정하다.

     강제로 끌려간 병들일랑 그냥 거기 처박아 두지. 거기서, 울타리에 갇혀 30개월쯤 썩다 보면 – 썩다, 아주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때 그들은 딱히 그런 기분이었다. - 대개는 꺾이어 나오는데, 그냥 놔두지.

문제는 꺾이다가 못해 더러는 자멸한다는 데에 있었다. 자멸시킨다, 죽게 한다, 죽인다가 더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날 티비 프로그램에서 다룬 L이병들 말이다. 40년도 더 넘은 옛 이야기이지만 너무도 시퍼렇게 가슴을 도려내는 살아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승욱이 아직 중학생일 때쯤의 일들이었다. 연두는 더 후배인데도 해직교사인 오빠에게서 들었다고 종알거리는 것들이 많았다. 뭘 모르는 자신과 비교 되어 늘 불편했었다.

 

     5.18을 죽어라 감추고 왜곡하려던 군사정권 최악의 시절, 광주 밖에서 5.18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가가 먼저였다. 군은 대학가를 차단의 첫 목표로 삼았고, 여차 하면 강제입영, 이어서 군대 내에서 소위 녹화사업을 벌였다. 푸른숲 가꾸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죽음을 가꾸었다. 그날 프로그램 도입부에 소개된 경우는 1962년 생 L, 2대 독자로, 그러니까 입영대상자도 아니었던 2학년 학생의 죽음이었다. 체포 3~4일 후 군대에 처박았다는데, 6개월 차 의가사제대 일주일을 남긴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이유야 무엇이었건 군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서, 소속 GOP도 아닌 2xx 보안부대에서, 하필 목을 매달기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테니스장 심판대에 매달린 채로.

 

     그 프로그램은 6명의 젊은이들을 다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서러운 것은 48장의 유서를 남겼다는 1961년 생 H군의 이야기였다. 눈물 없이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철도고를 마치고 서울대 장학생,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입대했을 때까지는 꿈을 실현해 나가는 탄탄한 인생이었단다. 그러던 것이 1년 만에 정기휴가를 나왔다가 귀대 후에 곧바로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었고, 5일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문제는 그 직후였다. 제출했던 진술서에는 주로 본인의 학생회 활동과 동료들을 위한 변명이 담겼다지만, 바로 그 진술서가 그로 하여금 죽음을 결행케 한 범인이었다.

     특별정훈교육 대상에겐 두 갈래 길 뿐이다. 프락치가 되느냐, 죽느냐! 승욱이 그런 생각에 미치자, 티비 시청 도중에 순간 엉뚱한 인물이 떠올랐다. 근년 들어 엄청나게 이슈화되었던, 초고속으로 벼락출세한 경찰간부 K였다. 그 네모난 얼굴의 소유자는 조사의 막바지에서 살 길을 택했던 사례였다고, 여론은 술렁거렸다. 삶을 택한 네모난 K도, 죽음을 택한 얼굴 없는 H도 다 같이 시대의 강요로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던 청춘들이었다.

프로그램 말미에서 누님이 읽어 내려간 H의 유서 한 대목이 귓속에 박혔다. 그간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주위의 모든 분들께 이 땅의 민주주의가 오기도 전에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합니다. 수 없이도 삶에 대한 미련이 많은지 몇장을 새로 써도 드릴 말씀이 적당치 않고 제가 부족하여 [……] 하느님과 제 이웃형제들의 사랑에 저희 가족을 맡깁니다.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와 경제 정의를 이루어 주십시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책임…… 티비 프로그램이 사람을 울렸다. 그를 울렸다. 승욱은 목 놓아 울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H를 찾아서 치열했던 그 삶을 돌아다보았다. 스물 두 살의 그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노동자 야학인 샘터교양교실에서 교사로 활동했었고, 울톨릭(서울대가톨릭학생회)에서의 활동도 적극적이었고, 3년 여 울톨릭 사무실에 남겼던 글들은 사후 자료집으로 나왔다고 했다. 다 찾아서 읽어보진 못했다. 소개에 의하면 그의 사상적 중심은 가톨릭신앙이었고, 수난자 예수의 삶을 따라 졸업 후 노동사목 신부를 꿈꾸고 있었다는데. 참으로 열심인 청년을 자살로 내몬 것은 ‘80cm 길이의 곤봉’으로 초죽음이 되어 ‘확인하면 다 나타날 부분’만 써낸 40장에 걸친 진술서와 반성문이었다. 그렇게 풀려나온 이튿날 새벽근무를 자청한 그는 실탄 15발을 지급받아 나갔고, 곧 죽음을 선택했다. 전 현실에 순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전 현실이 요구하는 비인간적이고 나태한 길을 거역한 사람입니다.

 

     안타깝다. 아깝다. 몇 년 전 승욱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속없는 동기들의 괴롭힘을 못 이겨 생을 마감했던 중학생의 유서가 다시 떠올랐다.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가 왜 이렇게 진지한가, 생각하다가 그는 자신의 천박함에 놀랐다. 얼마나 진지한 사람들이 자살을 준비했겠는가. 그 참담한 절명의 순간들에 공감을 못하면서 그들의 유서나 읊는 비인간적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살은 유서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사고보다도 무섭게 다가왔다. 티비 프로그램에서 거론되었던 다른 이름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의문사라고 하더라도 사고사이기를, 차라리 타살이기를 바라면서 옛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1960년생 K, 고려대학 경제학과 80학번, 현대철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4학년 봄 강제징집당한 그도 유서를 지니고 있었더란다. 그러니까 자살이었다. 아, 그 특별한 유서!

     기다림밖엔 /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 끝없는 끝들이여 / [……] /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 죽기 전엔 디뎌보마 / 죽기 전엔 / [……] / 끝없는 끝들이여 /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 죽기 전엔 기어이 /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

     유서는 곧 그가 쓴 글도 그의 필적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너무나도 유명했던 김지하의 시 「끝」을 친구가 적어 보내주었던 것이랬다. 그때까지는 대학생들의 우상 중 하나였던 시인 김지하!

 

     시를 다시 읊어보던 승욱의 마음은 좀 복잡해졌다. 당시 김지하는 매사에 어중간한 그도 들어서 알게 된 저항시 「오적」 의 시인이었다. 시인이 일찍이 무엇인가로 – 그때 그는 민청학련사건 같은 것을 이름도 잘 몰랐었지만 - 사형 언도를 받았던 일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국제PEN클럽 세계본부며 사르트르며 세계적 석학들이 구명 탄원서를 냈을 정도의 거목이라 했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노래로 불리어, 그것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아니, 간첩도 부러 따라 외웠을 것이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 내 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그런데 승욱이 아직 군에 있던 1991년, 대학가에서 P양의 분신으로 촉발된 분신행렬들 속에서 「오적」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걷워 치워라.’ 불이나면 누군가는 불을 꺼야하고 찬물도 끼얹어야 했겠다. 하지만 그때는 찬물의 효과는 보려하지 않았고, 찬물 끼얹는 사람에 대한 증오만 증폭되었다. 몇 해가 흘러도 무엇이건 격한 소용돌이 속이었다. 젊은 시절이었나. 그런 시절이었나.

 

     또 다른 죽음들도 출발은 시위 도중의 체포였다. 1982년 또는 1983년 어느 날 가두시위 중 체포당하여 두 세 명이서 45인승 버스에 실려 병무청 직원 5~6명, 경찰 2~3명 함께 새벽 1~2시경 전방에 도착했던 K 일행을 마중(?)나온 보안부대 중사의 손에는 급조된 병적기록카드들이 들려있었겠다. 이름과 생년월일, 학력이 적혀있고, 오른쪽 상단에 빨간색 고무인으로 특수지원(대학에서 시위하다 강제입영)이라고 찍혀있었겠다. 그리고 누군가는 3개월을 또는 얼마를 버티다가 자살로 타살로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겠다.

     자살자 상당수는 녹화사업에 다녀오면 죽었다. 녹화사업이란 것의 정체가 바로 살인의 시작이요 완성이었다. 가장 양심 있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양심 없는 변절을 강요했으니.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실토한 동지들의 이름, 동지들의 미래에 대한 죄책감, 그것을 넘지 못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더러는 이겨내고 살아남은 모두를 긍휼히 여길밖에. 누구라도 그 무서운 시험에 들게 되면 떨었을 것이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주십시오.’(마태오 26:39) 예수님을 따라 이렇게들 기도했을까. 신앙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무서웠을까. 다행히 K도 또 다른 학생들도 교회 대학생부에서 활동한 신자였다 하면 그것이라도 위안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예비해두신 천국이 있다면, 있을 것이다, 분명 거기에 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H도 K도 또 다른 K도 과거의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과거에 끝나버린 사람들이다. 끝났다고 그 과거를 외면할 수도 없다. 사는 것이 목적인 생명체, 그 생명체를 누가 짓밟았는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내몰린 죽음의 원한을 꼭 기억해야한다.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할 것 같다. 슬픔도 좌절감도 비릿함으로 녹아든다. 창문을 연다.

 

     한편으로, 같은 1960년 1961년 1962년에 태어난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의 주인이 되어있다. 떠들썩한 주인공들, 젊은 시절의 공으로, 또는 그저 운이, 타고난 수저가 좋아서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세상을 흔드는 그들 말이다. 심지어 아주 밉상도 있다. 많다. 세상의 정점들, 검찰이라는, 국회라는, 여러 이름의 어마어마한 권력 집단에도 득시글득시글하다. 그들이, 저들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어디로? 그들은 오늘도 공개적인 울타리를 쳐서 안과 밖을 가른다. 울타리는 견고하다. 철옹성이 고수된다.

     나머지, 승욱이 우리들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그들은 무엇인가가 불발인, 많은 것이 불발인 시간을 살아간다. 우리들 – 그렇게 말하자면 조금 비겁한 느낌도 든다. 그가 생각하는 우리들 1969년생도 어쩌면 세상을 이끌어가는 저들과 동년배다. 잘난 사람들은 벌써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무리에 속해있다. 낭패다. 세상을 한탄하기에는 위정자들 탓만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니! 그는 다시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이들의 책임, 아니 이미 젊지도 않는 우리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운다. 인간의 책임이라는 단어는 짐이자 모멸감으로 돌아온다. 그는 모멸감에 운다.

 

 

     지금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불우했던 군 생활도 끝나는 날이 왔었다. 1992년 여름이었다. 그때 브이 자를 그리면서, 웃자면 두부라도 먹으며 나서야했던 철문을 나서서 집으로 향할 때, 승욱의 발걸음은 보무가 당당하기는커녕 비실거렸다. 두발로 걸어 나왔으니 소위 꺾이고 망가졌다기 보다는, 아마 배추절임 정도였을까. 여름에 푹 절여져서 돌아온 그는 아팠다. 아프고 싶어서 아팠다. 등록 기간을 놓쳐가면서 아팠다. 가벼운 입퇴원을 반복했다. 군대에서의 병명이 핑계가 되어주었다. 어머니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일면서도, 입대 전에 그 나름 겪었던 악몽의 가을학기가 떠올라서 등록의 손이 머뭇거려졌다.

 

     복학을, 왜 2학기 등록을 망설였을까. 그는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도 그때의 자신을 모른다.

     그래, 집에서 푹 좀 쉬자이. 무탈하게 제대했응께 얼마나 이뻐! 기특한 겨!

     꾀병 같아서.

     꾀병이라니. 원래 재수들도 하고 뭐, 또 연수도 가고 그런담서. 대학공부가 이러저러 뽈강 4년만 걸린다냐. 몸이 몬자제이.

     예, 엄니.

     숨 좀 돌리고요, 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대한민국 젊은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군 생활을 마치고 온 것이 무에 대단해서 숨을 돌리겠다고 말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더라도 그렇게 시골집에서 9월을 넘겼다니. 복학 기간을 완전히 넘기고도 미적거리고 있었다. 군인도 학생도 아닌 젊은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군 입대를 정하고 비실댈 때보다 더 미묘한 일렁임으로 편치 않은 날들이었다. 일단은 대학가로 돌아와야 했다. 슬그머니 돌아왔다.

 

     가을 들어서는 느닷없는 방향에서 뉴스가 튀어나왔다. 이름도 특이한 M교수의 소설책 한 권이 질러댄 불꽃이었다. 서울 명문대에서 강의 중이던 교수가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혀가서 구속되었다. 출판인도 함께였다. 말을 섞는 사람이거나 말을 숨기는 사람들 모두가 속으로는 다 같이 불이 붙었다.

     엥? 필화사건인가? 필화라고 하면 「오적」 쯤이라야 되는 줄로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승욱의 눈으로는 실망스러운 주제였다. 이 판국에 외설이라니! 문제의 소설 제목은 『즐거운 oo』였다. 그래도 승욱의 느낌으로는 일단 표현의 자유 편을 들고 싶었다. 그러다가 잠시 곧 막혔다. 외설 그것은 아무래도 편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제목도 너무 진부하다고 느꼈다. 문학작품이라면, 문학작품에서 문제적 성생활을 쓰고 싶었다면, 제목이 이렇게 순진무구하다면 그건 아니다 싶었다. 통속 중에서도 통속소설들과 다를 게 뭐야. 최소한의 아이러니도, 그런 빌미도 없는 적나라한 그냥 이야기라면.

 

     문득 「장미빛 인생」 이란 시가 떠올랐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그렇게 끝났더라 싶어서 책을 찾아보았다. 군대에 유일하게 들고 들어갔던 시집이라서, 늘 가까이 있던 시집이라서 곧 찾았다.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 [……] /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 [……]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밋빛 인생을 증오할 수 있어야 시다, 라고 승욱은 생각했었다. 시인 기형도가 – 앗, 그때 문제된 M교수와 같은 대학이었다 - 첫 시집도 나오기 전에 서른 해도 못살고 요절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깝고 서러워도, 그 때문만이 아니라 시가 끌어당겼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놀라고 놀랐다. 2학년 2학기를 비실댈 때, 그도 인생을 증오했었다. 차마 증오까지는 못가는 에너지로, 비실비실 인생을 피했다. 장밋빛은커녕 우선 연두를 피했다. 강의실을 피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시집이었고, 이후 그 작은 시집은 늘 그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외설 논란이 들끓을 때, 어쩌다 들린 서점에서 또 다른 기형도를 발견했을 때 승욱은 너무 놀랐다. 놀랍고 반가웠다. 유고시집 『입 속에 검은 잎』 아닌 또 다른 유고가 발표되어 있었다니. 유고들이 쌓여있었구나, 참 다행이었다. 그때 발표된 것은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었다. 그 중 1984년 6월 「편지11」을 읽었다. ‘이상해. 요즈음은 매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제는 국문과 ooo교수와 장밋빛 인생인가 하는 데서 마셨다. oo형이 나에게 성격 파탄자라고 말했다.’ 아아, 그 둘은, 아홉 살 차이 그 둘은, 문학회 소속의 정외과 복학생과 신임 국문과 교수는 바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었구나. 누구는 장밋빛 인생이라 쓰고 인생을 증오했고, 누구는 장밋빛 인생을 외설의 빌미로…….

 

     단어가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단어는 그냥 거기에 있다. 단어를 삼키는 것은 인간이고, 그것을 소화해서 내뱉는 것도 인간이다. 그렇게 재창조되어 나온 단어를 확산시키는 것도, 파묻는 것도 인간이다. 칭송과 매장은 어느 지점에서 갈리는가, 누가 가르는가.

     평생 공부하려고 했던 역사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역사적 사실은 사건들의 파편으로 존재한다. 역사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파편들을 모으고 정리한다. 파편들은 우선순위로 배열되고 단어들에 의해서 채색된다. 우선순위는 누가 정하는가. 수채화 물감은 누가 고르는가. 아예 유화물감으로 덧씌우지는 않을까. 진실의 파편들도 두껍게 덧입혀 가릴 수 있다. 그러고도 명화가 탄생한다. 세계적으로 그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화들은 지속성이 탁월한 유화작품들이다.

 

     언뜻 고등학교 미술시간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키 작은 여선생님이었다. 처음 반년은 연필화만 그리게 하셨다. 대상을 마음대로 크게 또는 작게 스케치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예요. 데생이 기본이라고 하시면서도, 머리통을 너무 크게 그려도, 너무 작게 그려도 괘념치 않으셨다. 칠판에 여섯 장 씩 늘어놓고 품평을 할 때, 그림을 그린 애들도 왼쪽 오른쪽으로 세 명씩 서 있었다. 자신의 데생이 이야기될 때면 어깨 넓은 녀석들도 대개는 고개를 숙였다. 보는 아이들도 가끔 키득거렸지만, 선생님은 다 괜찮다 하셨다. 그렇게 보여서 그렇게 그리는 것이라고, 보이는 대로 그려진다고. 자신감 있는 터치만 강조하셨다.

     다음 반년은 수채화만 그리게 하셨다. 이번에는 무슨 색을 칠해도 괘념치 않으셨다. 다만 덧칠했을 때 속에 비치는 색깔 때문에 나중에 칠한 색이 달라 보이는 것을 유념하라고 하셨다. 그랬다. 누가 덧칠한 초록과 다른 누가 덧칠한 초록이 사뭇 달랐다.

     앗, 초록, 초록들! 그러니까 녹화사업! 빨갱이 빨강 물을 빼내고 초록물을 들이는 사업! 그런데 대개는 단순 시위중 잡혀갔던 그들에게, 상당수 기독교인이었던 그들에게 빨강 물이 들어있었을까. 억지 빨강 위에 덧칠한 초록은 뭘까. 노리끼리, 노르스름, 누런, 연노랑, 샛노랑, 진노랑 등 하고 많은 노랑에, 하늘도 푸르고 숲도 푸르다는 우리 민족의 색감은 예민하면서도 너그러운 편이다. 다만 그것이 무슨 사업이 되면 혹독했다.

     선생님은 그때 인생은 늘 덧칠을 하는 것이라고, 처음 도화지 상태에서 색칠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젊어서 너무 섣불리 너무 확 칠해버리면 살 여유가 적어져요. 살 여유 – 그런 단어는 피 끓는 열혈 남자애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단어였다. 아예 귓등을 스쳐가버린 단어였었다. 그게 왜 장밋빛 인생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랐을까.

 

     그는 고개를 휘둘렀다. 보이는 것은 무색, 그러니까 회색 그리고 침묵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주제는 실은 역사학이었다. 그가 복학을 실행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도 역사학은 이미 복학한 다른 친구들의 형태로 그의 주변에 있었다. M교수 사건에 열을 올리고 교수를 성토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는 약간의 거부감에도 옹호하는 쪽 울타리에 들기로 했다. 예술의 자유에 비하면 반대 논리가 마땅치 않아서였다.

     이 쑥맥이가! 복학은 안 해놓고 뭔 딴 소리다냐!

     친구들은 그를 놀렸다.

     소설이 윤리도덕은 아니잖어. 작가가 이 소설은 인간의 자아확립이 주제라고 하잖아! M교수는 대학 수석졸업에 어디까지나 실험정신이 강한 교수로서……. 게다가 유럽에서는 성인이 성인물을 향유하는 것을 개인의 권리로 인정하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

뭐라? 문학평론이라도 하려는 거여? 사회학과로 전과할 텨? 게다가, 너, 노승욱 투틸로! 너네 교황님은 뭐라시는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황이 되시어 10여년 만에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셨으니 한국에서도 유명인사였다. 세계 평화와 반전사상을 설파하셨고, 개신교와도 경직되지 않고, 모든 면에서 너그러우신 특출한 분이셨다. 물론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좀 심하지만, 밥 딜런도 좋아하신다는 교황님은 연애소설에 대해서도 한없이 너그러우실 게다. 친구들에게 딱히 말로는 안했지만 그런 생각이었다.

     승욱은 그 당시 M교수의 편에 서는 것이 문학, 심리학 또는 윤리학 측면에서 옳다기보다는 그냥 소수자에 대한 동조라고 믿었었다. 그렇게 괜한 일에 열을 올리면서 실제의 문제인 복학과 대학생활에 대한 확신의 부족을 감추었다. M교수 사건도 그의 뇌리에서 곧 희석되었다. 다른 교수들도 다른 이유들로 해직, 복직, 재임용탈락, 복직의 험난한 교수생활을 맞닥뜨린 경우들도 드물지 않았으니까. 울타리 밖은 늘 그렇게 쉬이 잊히곤 했다.

 

 

     승욱이 다시 M교수를 떠올린 것은 얼마 전 70대 독거노인의 고독사 기사 때문이었다. 노인이 영어교사였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만, 언제더라, 결국 M교수도 외롭게 사망한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자살이라고 했었다. 짧은 유서가 있었다. 그리 되도록 세상은 이슈에만 민감했었다. 덩달아 가슴이 덜컥했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그렇게 마감하는구나. 그렇게 마감되는 것이구나.

     평범해도 잊히는 사람들 천지다. 평범했을 그 영어교사는 끔찍하게, 더는 끔찍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발견되어서야 신문에 났다. 어떻게 된 것이, 약을 먹은듯한 쥐들이 죽어있는, 밀폐된 쓰레기통 같은 방 안, 삶을 포기한 흔적이 가득한 곳, 한쪽에 그대로 쌓여 있는 택배박스, 그 안에서 나온 건강보조식품이라는 이질적 존재는 인생이란 불가해의 존재라고 믿기에 족했다. 더욱 그로테스크한 조합은 또 있었다. 유명한 역사인물의 자서전이나 『행복론』과 같은 책들, 마치 수험생의 교재처럼 여러 번 그어 짙어진 밑줄과 동그라미 표시들. 그 지독한 더러운 불행 속에서 인생행복론을 외우려고 했을까.

     『행복론』 - 기자는 굳이 저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세네카의 책이었겠지 싶었다. 평생 교사였던 노인은 재산과 명예 또는 쾌락은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고 설파한 대목을 믿고자 했을까, 믿었을까. 최악의 밑바닥에서 과연 정신의 건전성에 기댈 수 있었을까. 그런 책들일랑 조각조각 찢어버리는 것이 제 정신이 아니었을까. 최종적으로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잡힌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죽은 쥐, 건강보조식품, 책들? 곰팡이 슬은 벽 혹은 천장? 보이지 않은 울타리? 울타리.

     아무튼 엄동설한에 고장 난 보일러가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시신이 그나마 덜 흉측하게 보존되었다는 그 기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했다. 냉혹한 아니러니 그 자체였다. 기록만이 아니라 애초에 인생이 아니러니일 터다. 장밋빛 인생을 증오한다는.

 

 

     의 마감 – 저절로 마감된다. 스스로 마감된다. 차이는 차치하고, 마감은 말 그대로 죽음이다. 그는 긴 생에 관해서보다 짧은 죽음, 순간의 죽음에 대해서 왜 더욱 가슴이 아픈지 의아했다. 긴 삶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분명 합리적일 것인데 죽음이 늘 선두로 다가왔다. 그가 바라다보는 천장, 하늘대신 바라다 보이는 천장은 죽음의 파편들로 가득하다.

     사실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는 그것을 실감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발딱 일어나야 정상이다. 젊은 놈이. 물론 젊은 놈은 이미 아니다. 상대적으로는 행여 젊겠다. 아무튼. 눈 뜨고 할 일이 배를 채우는 일이라면, 그 다음 급한 일도 없이 그뿐이라면 서두를 필요가 없질 않은가. 그만한 일로 서두르기가 민망했다. 시간표가 필요해, 시간표가. 그에게는 시간표라고 하는 나사가 필요했다.

     시간표에 의해 요일에 따라 움직여 온 그의 삶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의 이니셔티브가 아니었다. 그가 살았다기 보다는 어떤 거대한 기구가 그에게 주는 과제 또는 계획에 따라 맞춰 돌아갔음이 분명해졌다. 풀이 자라면 풀을 매주고 병충해가 생길 조짐이면 병충해 약을 치는 농부와도 비슷했다. 결정은 농작물이 하고 농부가 서두르듯이, 강의라고 하는 일이 대단히 적극적이기는커녕 매우 수동적인 무엇이었다. 강의란 그 내용에서도 전혀 주관적일 수 없고, 최소한 표준화된 전문지식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간의 노력으로 점철된 세월들은 독창적인 학문의 고지에 이르는, 행여 이를 수 있을까 조바심 내는 과정이었다. 첩첩산중을 넘어 무지개 같은 것을 바라다가, 도중에 멈추어버렸다. 어쩌면 이대로 도태될 수도 있을 그의 상황은, 그의 상태는 회색 안개다. 3년마다 채용되는 전공 시간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글쓰기와 같은 교양과목으로라도 방향을 틀어보는 것이 현명할까, 비굴할까. 행여 다른 대학을 시도해볼까. 겹치기 하는, 잘 나가는 동료들도 있었다. 왜 그는 못할까.

 

     실패의 먼 원인은 대학생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제대 후에 곧 바로 복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전공에 대한 방만한 회의였었다. 역사학이란 이름으로 된 기록물들은 승리자의 시각에 의한 것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자 – 그것들이 무의미한 군대생활을 이겨내면서 깨달은 결론이었다. - 모래위에 짓는 집을 어찌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었다는 말이다.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집이라면 외면하자, 그것이 하나였다. 그런데 외면은 간단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 것은 맞다. 그럼 반석을 찾아……. 딱 거기까지였다.

     예컨대 『세계문화사』 , 15cm x 21cm 크기에 370쪽 안에 깨알같이 함축된 내용들은 어떻게 간추려졌을까. 또는 앙드레 모루아가 쓴 『영국사』도 『미국사』도 객관적일 것이라는 장점을 지닌 채 번역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일사』 그리고 당연히 『프랑스사』도 있었는데, 물론 사학과에서는 이 모든 것이 기본적인 추천도서들이었다. 한 인간이 이 나라들의 역사를 다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감탄도 하면서 의아하기도 했었다. 한꺼번에 다 빌려와서 넷을 포개어 놓는다면 목침 베개 높이도 넘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일까. 그땐 몰랐었지만, 만일 모루아가 유대인임을 감안하면 달리 읽혔을까. 유대인들은 역사란 목적이 있고 인간에게는 도달해야할 목표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니까.

 

 

     아니다. 어쩌면 이 모든 변명은 다 거짓이다. 사학과로 복학하는 일에 울타리를 친 것은 과가 아니라 그였다. 그 자신이었다. 지금에 와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때 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선뜻 그리고 당연하게 복학을 결정하지 못한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연두, 연두였다. 어떻게든 그 거리를 정돈하지 않고서는 연두를 다시 만날 첫 순간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연두는 교정에서라면 눈을 뜨면 바로 보이는 과 후배였다. 그때 입대를 결정하고 나서 연두에게는 무슨 의미 있는 말이라도 해야 했을까. 대신 아주 대수롭지 않게 휴학을, 군 입대를 말했었다.

     왜? - 응. 공부가 안 되네.

     왜? - 그냥. 학교생활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왜? - 왜는 왜! 안 되니까 안 되는 거지.

     덜컹거리는 맘을 접었다. 와락 껴안을까, 아냐. 흔들리는 각도를 접었다. 사랑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수평이 되어버리면, 수평이 되어버린 사랑은 순간에 멈춤을 깊이 느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하지 않았던 말, 그의 침묵은 30개월의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만 갔다. 숨구멍이 없었으므로 침묵으로 상상하는 단어들도 희미해갔다. 이제 와서 연두를 어떤 말로서 만날 것인가. 와락 껴안을까, 미친 듯. 연두가, 캠퍼스가 두려움이었다.

 

     어느 여름 한낮, 온 나라가 휴전선을 돌아 돌아 북쪽으로 날아간 여학생의 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 때, 승욱이 도서관에서 맥없이 쓰러졌었던 일이 그 시작이었다. 전깃줄에 내려앉으려는 순간 풀썩 땅바닥으로 꽂혀 널브러진 새의 이미지와 더불어 끊겨버린 기억, 그리고 도서관 앞 풀밭에서 눈을 뜬 순간 바로 코앞에서 만났던 간지러운 머리카락. 연두, 처음 본 여자애, 과 새내기라던.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이 황새는 참새와 달리…….

     연두는 나중에 그가 지껄였다던 이상한 말의 뜻을 묻곤 했었다. 그는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더란다. 그가 다시 눈을 감았을 때, 어쩌면 널브러진 큰 황새의 이미지를 찾고 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감전된 느낌을 받았었다. 그 애는 손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누르면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팔은 맨 팔이었다. ㄱ의 팔과 ㄴ의 손바닥은 전류가 통하는 물질이었을까. 눈을 감은 깜깜한 세상 속에서는 소리 없는 마른번개가 흘렀다. 감은 눈을 치켜뜰 힘도 없었고, 뜨고 싶지도 않았다. 살살 간질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시 한 번 전류의 습격이 왔다. 그는 그냥 꿈을 꾸기로 했다. 지면과 연결된 철탑이나 전봇대에 닿으면 참새든 사람이든 감전을 피할 수 없어요. 그 순간, 어린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귓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그 애가 뭐? 그러게나. 그 애가 뭔데? 그는 그러고 있었다. 군대생활 30개월 동안 그가 주소를 알리지 않았고 휴가도 어머니에게로 가 보냈으므로, 연두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연두와 연락이 닿지 않도록 주소도 보내지 않았고 휴가도 고향 어머니 집으로만 갔다는 표현이 정직할까. 그냥 있는 사물들처럼, 그냥 있는 친구들처럼 걸리고 켕기는 것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걸리고 켕겼다.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여자애가 꼭 ‘형’이라고 나를 부르며, 학과에서 추천된 역사책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는! 엉뚱한 독일현대소설 과목이나 수강하자 했던 연두. 어떤 소설의 부제가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낼 수 있는가’ 라고, 꼭 듣자고 졸랐었던.

     승욱은 최근에 알만한 교수의 책 『자유의 폭력』을 손에 들었을 때,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연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 세월 지나고서도 연두의 목소리가. 그런데 그 때는, 군대로 피신해서도, 복학을 앞둔 당시에도, 그 애의 목소리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무섭기까지 했다.

 

     울타리는 있거나 없거나 부담이었다. 캠퍼스를 떠나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실감하며 숨을 죽였던 30개월은 간질거리는 머리카락에 대한 그리움을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 그리움만으로 연두를 맞닥뜨리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무심한 듯 소화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낼 연두의 입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서 그림자처럼 떠오르는 연두의 오빠, 독문과 출신이라던 오빠도 여전히 무거운 존재였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무거운 부류, 전교조 해직교사는 연두가 박씨처럼 물어 나르는 이삭이 널린 밭이었다. 누군가는 또는 많은 사람들이 심어 가꾸어야 하는 씨앗들은 더러 자라고 있었을까. 연두는 그대로라면 4학년일 것이고, 그 가을 겨울을 지나면 졸업을 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 못할 두려움에 대한 비겁한 답은 침묵 그것이었다. 게다가 세상이란 기어코 도망치려는 사람에게는 옆길을 슬쩍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순간 울타리를 넘기만 하면 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PEN문학, 2024, vol.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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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4. 8. 23:09

 

 

2023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문학 분야

 

수상소감 ..............................

 

오늘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의 일환으로 용아문학상을 수상하게됨은 저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에 앞서 어느 지자체에서 이토록 문화융성에 중점을 두는지, 광주광역시의 관심에 감탄하게 됩니다.  물질문명이 전대미문의 최고조에 달한 21세기 지금, 인류의 미래는 이제 정신문화에 달렸음을 광주광역시는 알고있는 것입니다. 최근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했던 세계한글작가대회를 광주에서 유치하도록 적극 뒷받침해준 사실도 그것을 입증합니다.

 

한편 우리가 순수시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는 용아 박용철 선생은 비단 시인만이 아니셨습니다. 겨우 서른다섯 해도 살지 못하고 떠난 그의 유고시집만 보더라도 창작시는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유명한‘시적 변용’에 관한 평설 그리고는 괴테와 릴케의 시들, 셰익스피어와 입센 등 해외문학의 번역이었지요. 용아의 정신세계는 이미 세계문학에 깊이 경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에는 시공간의 경계가 없음이요, 문학이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작용하는 오묘한 무엇임이 확인되는 지점입니다.

이제와, 만일 그가 폐병의 저주를 극복 했더라면, 만일 서른다섯 해를 더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써 인사말씀을 갈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언론 소개 [대표] .........................................

 

한겨례

광주시문학상에 서용좌·이돈배·서연정 작가 선정

광주시 박용철·김현승·정소파 시인 문학정신 이어

https://www.hani.co.kr/

 

뉴시스

광주문학상에 서용좌·이돈배·서연정씨 선정

·소설 등 문학발전 공적

https://www.newsis.com/view/NISX20231101_0002504885

 

위키트리

광주시, ‘2023 광주 문화예술상시상식

2023-11-22 20:56add remove print link

허백련상-박문종, 오지호상-송필용, 임방울상-모보경

박용철상-서용좌, 김현승상-이돈배, 정소파상-서연정

https://www.wikitree.co.kr/articles/904135arti/area/honam/11145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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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1. 15. 19:26

 

 

    새가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아는 새다. 거기 산책로는 천변이고, 얕은 물에서 살아가는 큰 새들은 서너 마리에 불과했다. 이름이 훌륭한 백로도 처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천변의 버드나무들은 운치가 있었지만, 개량사업 탓에 뽑혀나가고 한 두 그루만 남았다. 백로가 올라가 앉곤 하던 큰 나무들도 많이 사라졌다. 나무들을 뽑아내고 무엇을 개량했는지. 새들은 이전만 훨씬 못해 보이는, 시멘트로 갈무리된 물에서 살아간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어려서 그가 알게 된 처음의 새는 참새였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의 이야기에서다. 책에서만 그렇게 쓰인 것이 아니라 참새들은 정말로 전깃줄에 앉아 있었다. 전깃줄은 참새들의 철봉이거니 생각했다. 난생 딱 한 번 보았던 줄 타는 아저씨에 비하면 전깃줄 위 참새들의 묘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니, 묘기 중의 묘기였다.

장맛비가 많이 내렸던 어느 날, 경식이 엄니는 읍내 길가에서 쓰러졌고 그렇게 경식이는 어머니를 잃었다. 감전사! 전기에 맞아 감전이 되어서 사망했다는 해괴망측한 소식이었다. 참새에 비할 수 없이 큰 몸집의 경식이 엄니는 전깃줄에 올라가기는커녕 전깃줄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수군대는 말들로는 전깃줄 하나가 끊어져 내려 우체국 앞 인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 그럼 전깃줄을 밟았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 얌전한 아짐이었단다. 남자들 그림자도 밟지 않는 사람이 전깃줄을 밟았다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라고 했다. 그때 픽 웃음이 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죽어다 깨어날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무슨 영문인지, 하필 우체국 앞 거긴 드물게 흙바닥이 아니고 듬성듬성 패인 시멘트 길이라서 물이 많이 고였단다. 물을 밟았을 뿐인데 전기가 저절로 물을 타고 건너왔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전깃줄을 피하자면 온 하늘을 다 피해야 했다. 땅이 웬수도 아닌데 쿡쿡 차고 부비고 다녀서 신발들은 더 더러워졌고 더 닳았다. 구멍도 났다.

 

 

    감전이란 몸에 전류가 흘러 전기적인 충격을 주는 현상입니다. 감전은 몸체의 두 부분 사이에 전위차가 생길 때 전류가 흐르게 되어 몸체에 전기적 충격이 가해질 때 발생합니다. 전류는 저항이 작은 쪽으로 흐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더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학교에서 나중에 감전이란 단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는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는 놀람에 앞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식이 엄니가 더 쉬운 길이었다니. 사람이 물건보다 더 쉽다니.

선생님, 전기라면 자기랑 짝꿍인 전깃줄 쪽으로 가야지 왜 사람 쪽으로 흘러요? 그럼 그 쪼만한 참새들은요? 사람이 참새보다도 못하냐고요? 그는 서투른 질문을 해댔다.

아, 그건, 참새는 병렬을 알아서예요. 두 다리로 전선 위에 올라 서기 때문에, 두 다리 사이의 전깃줄 부분과 새의 몸통이 서로 병렬로 연결된답니다.

…….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참새와 전선의 전위차는 ‘0’이라서 감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잖아요. 여러분,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봐요. 그대로 있지요. 물 높이가 같으니까요. 그런데 기울이면 금방 낮은 쪽으로 흐르잖아요. 물로 실험해 볼 수 있어요. 전기로는 절대 실험 금지입니다.

 

무서운 전기와 별 무서울 것 없는 물을 함께 말하다니. 선생님은 죄가 없었다. 경식이 엄니가 장맛비 오는 날 감전된 것을 모르시니까. 다만 물과 전기라는 이 두 가지 상극이 같은 성질이라는 것에서 두 배로 세 배로 화가 날 뿐이었다. 어쨌거나 여전히 어린 마음으로 그 둘을 따로 보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흔히 보게 되는 것은 물이었다. 물은 눈에 보였으니까. 숟가락 위의 물은 손을 떨기만 해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곧 수평이 되었다. 수평이 보기에 좋았다.

아들, 밥 묵다가 뭣 허고 있어어! 어서 묵어, 투틸로, 다 식는다아! 엄니는 딴 생각에 빠진 아들도 이쁘기만 했나 보다. 엄니는 아들의 이름이 승욱이라는 것을 평생 잊고 사신다.

 

옳지, 그것이구나. 수평을 이루고 나면 흐르지 않는 것, 그것은 물과 전기만이 아니었다.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훨씬 나이를 먹고 나서였다. 사랑이라는 것도 똑같은 이치임을.

ㄱ이 ㄴ을 마음에 두고 애가 단다. ㄴ도 조금 그런가. 알 길이 없다. 이런 전위차에는 무한정으로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전류다. 헌신적인 짝사랑이 그렇다. 그 반대도 똑같다. ㄴ이 ㄱ을 마음에 두고 애가 단다. ㄱ도 조금 그런가. 알 길이 없다. 이런 전위차에는 무한정으로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전류다. 헌신적인 짝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그때에 한한다. 흐를 때가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그것은 어설픈 희비극이 된다. 앞에 가는 종종걸음을 내가 스쳐 지나가면 종종걸음은 나를 눈여겨보리라. 눈길을 느끼면 돌아서서 마주 보아야지. 놀란 눈일까, 따뜻한 눈일까. 아니, 눈을 뜨고 나를 보기나 할까. 웬걸, 가슴이 뛰어서 뒤돌아보기는커녕 마구 달리다시피 교문을 들어선다. 나를 보았을까. 내가 분명 옆을 지나서 앞섰으니 내 모습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아니다, 종종걸음이 나를 본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이 그저 보이기만 했을 수도 있다. 아차, 지나치는 순간에 팔을 잘못 뻗은 시늉으로 가방이라도 건드려 볼 걸.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눈으로는 눈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을. 그는 애가 달았다.

종종걸음의 눈은 무슨 색일까. 설마 푸른 눈일까. 그 어린 시절에 푸른 눈에 대한 오묘한 동경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쨌거나 그는 주변에서 푸른 눈을 본 적은 없었다. 서양사람이 아닌 바에야 누구의 눈도 푸를 수는 없겠지만, 종종걸음의 눈은 신선하고 푸른 기운을 내뿜을 거다. 그것은 상상에서 확신이 되어갔다. 종종걸음의 눈빛은 푸르고 눈동자는 새까만 포도알 같을 것이다. 까만 눈동자란 것도 이미지였을 뿐일까. 실제로 또래들의 눈동자는 다 같이 누런 흙빛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놀라운 상상이 피어올랐다. 종종걸음은 어쩜 내 앞에서만 종종걸음이 되는 거야. 하필 내가 교문 께에 이르는 바로 그 시간에. 종종걸음은 누군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더욱 종종걸음이 되는 것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저만치 종종걸음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눈에 넣고 따라가다 보면, 왼쪽 다리가 살짝 짧은가 싶기도 했다. 짧았다. 균형이 100퍼센트가 아니었다. 똑똑똑똑 걷는 것이 아니라, 또독또독 걷는 느낌이었다. 아무도 몰라, 그만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만 주는 리듬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배운 노래들 중에서 어떤 리듬인가를 찾아 맞추어보려고도 했다. 뭔가 발견한 것 같은 날에는 꾸물대다가 옆을 스쳐 지나는 일은 잊곤 했다. 종종걸음이 교문에 들어가 버리면 그때는 가방을 흔들어대면서 완전 갈지자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교실에서는 ‘내 사랑 종종이’를 볼 수 없었다.

 

칠판에 선생님이 써놓은 글자들을 배경으로 떠있는 그림, 그게 예쁜 절름발이다. 절름발이도 편차가 있다. 사알짝 두 발을 다르게 딛고 걸어가던 아이, 종종이의 걸음은 2/4 박자 강약강약. 그것이 강약중강약으로 살짝 변형되기도 했다. 수평으로 잘랐을 단발머리가 살짝살짝 수평을 깼다. 물론 다시 수평이 되었다. 그렇게 방학이 되었고, 아쉽게도 그 다음 방학은 졸업이었다. 면단위 중학교, 그 이상 인문고는 없었다. 성적이 좋아도 형편까지 좋아야 읍내로 또는 도시로 진학할 수 있었다. 졸업과 함께 종종이도 속사랑 같은 것도 사라졌다. 밋밋한 고등학교는 오직 대입준비로 지나갔다.

 

 

    88년도 대입학력고사, 12월 그날은 날씨까지 얼어붙어 기껏 13~14도에 종일 두 손을 떨었다. 답안을 작성하는 오른손 말고 왼손도 함께 떨었고, 마음은 더욱 떨었다. 논술은 없어졌지만 선지원 후시험이라니, 밤중에 고르지 않은 숲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예상경쟁률은 3.5대 1이라고 더 높아졌다 했고, 정원은 18만 6,340명이라 했지만, 전년보다 1만 명 이상이 줄었다 했다. 응시생 26.9%가 입학 가능하다고 했으니, 열 중에 셋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무서운 전망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날개 없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창공을 가르는 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거기에 전깃줄은 없었다.

 

노승욱에서 이번에는 새내기라고 - 새는 아니고 - 독특한 공동이름을 부여받은 1학년 생활은 일단은 희망과 부채감의 뒤범벅이었다. 경식이들은 고향에 남았고 고향을 떠나온 몇 안 되는 우리들은 처참한 날들에 내맡겨졌다. 어머니의 밥이 없는 나날들, 공부가 뭔지, 이 삭막함으로 무엇을 얻어낼 지 막막했다.

수강신청을 하면서 시작되는 대학생활에서 우선 교양과목이란 단어가 생경했다. 교양이란 ‘가르쳐서 기름’을 뜻하니까, 전체가 교육이거늘 새삼 교육과 비슷한 단어를 쓰는 것이 이상했다. 자세히 알아봤더니, 기껏 사전적 정의였지만,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교양이라 했다. 아직 사회생활다운 사회생활에 다가가지 못한 대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이란 학문, 지식, 품위, 문화 그런 단어들의 조합인 교양을 심어주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진 필수 교양과목들은 ‘국’자 중심이었다. 국민윤리, 국어, 국사……. 역시 나라가 주인공이었다. 선택과목들은 도무지 무슨 과목을 선택하여야 할 지, 서로 다른 열매들을 달고 손짓을 하는 나무들 앞에 선 느낌이었다.

법학개론 – 사시를 꿈도 꾸어보지 않았던 그가 굳이 법학 과목을 선택한 것은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자면 법은 어느 정도 알아야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중에 습득한 대로 이해하자면 그의 희망은 타자의 희망들, 헛것들이었지만, 물론 당시에는 새로운 것은 늘 대단한 가치로 보였다. 우와, 법학개론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를 혼돈에 빠뜨린 문장들이 오히려 그를 사색의 바다로 안내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 교수님이 이 한 문장만큼은 외워야 하리라고 강조했을 때, 법은 막연히 정의라고 생각했던 그는 상식이 무식이었음을 느꼈다. ‘권리 추구자의 권리주장은 그 자신의 인격주장이다.’ 권리가 인격이라니! 이러한 문장들을 알려고, 그래서 대학생이 되려는 것이구나 싶었다. ‘자기 존재의 주장은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법칙이다.’ 처음으로 그는 ‘나, 나의 인격’이라는 단어를 직시했고, 그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탐구하고자 했다.

마침 함께 선택한 철학개론은 샘 깊은 물이 되었다. 그때 만난 책은 동서양철학이 함께 쓰인 책이었다. 하지만 개론이라는 말의 인상처럼 홀가분한 개론서가 아니라 4차원 혹은 5차원의 방정식 같았다.

서론에 쓰인 예지의 활동이라거나, 정신의 탄력성을 길러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바른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문장들, 아, 어려움 그러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인간다움의 조건으로서의 철학 공부, 근원적 진리 탐구, 나아가서 이런 책을 집필할 수 있는 인간, 그를 철학인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 역시 기꺼이 철학인이 되고 싶었다. 사학과 학생이니 역사학, 그 중에서도 역사철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사색의 대양에서 나침판도 없이 허둥대면서 동서남북 방향을 잃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해 여름 온 나라를 집어삼킨 열정의 도가니 올림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빈국 대한민국의 쾌거라느니,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될 거라느니, 그러려무나. 아돈케어! 오직 철학이 그의 날개가 될 터였다. 그는 좌고우면 없이 진정으로 학문에 진력했다. 가끔 최루탄 가스가 강의실까지 뚫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 그리고 상당수의 학생들은 공부만 했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다. 공부만 하려는 귀에도 세상의 어수선함은 도를 넘었다. 노동절 즈음 느닷없이 부산이 전쟁터로 바뀌었다.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잡혀가자 반대로 전경 납치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결과는 처참했다. 화마에 휩쓸리거나 불길을 피하려다가, 사고 당일 현장에서 경찰관이 6명이나 사망했다. 중상자는 부지기수였다. 90여명이 잡혀갔다. 신성한 학문의 전당은 어디에도 없었다. 광주에서는 수배 중이던 대학생이 수원지에서 수상쩍은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없는 살벌한 봄이었다. 도서관에 골방에 틀어박힌 젊음은 젊음도 아니렷다 싶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폭탄이 아니라 미사일급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날개 달린 새도 아닌 한 여학생이 비행기를 타고 또 타고 공포의 철조망을 넘어갔다. 누군가가 북한을 가려면 베이징을 통해서 갔을 것을, 그 여학생은 일본 관광 핑계로 나갔더란다. 그리고는 도쿄에서 베를린으로, 거기서 모스크바로 갔다는 것이다. 아, 모스크바! 상상에도 없는 도시! 한국인 여권으로 그런 것도 가능한 것인지. 한국인 생각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한지. 그는 정말로 의아했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듣고 또 듣고 보고 또 보고 외운 그들 아닌가. 반공이 곧 민주이거늘, 그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13차라던가,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것이랬다. 7월의 1주일 남짓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했다는, 이전의 모스크바 대회만큼은 아닐 지나 대성황을 이루어 서울의 88올림픽과 비교될 평양축전임을 자랑했더란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대학가의 진통은 당연히 올림픽 때를 능가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있던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아직 학생이면서 어떻게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한 달 여 행사를 마치고 나서, 세상에나, 이번에는 날개를 접고 휴전선을 두 발로 걸어서 남으로 넘어왔다. 한반도 군사분계선이 가로막힌 이후 첫 공개적 일이라 했다. 물론 그 순간 바로 안기부에 구속되었고.

 

휴전선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는 도서관에 있었다. 그때 그는 이상한 전기를 느꼈다. 볼펜이 들려 있던 오른손 엄지검지 사이에서 시작되어 순간적으로 온몸을 찌르는 전기였다. 딱딱한 나무 의자와 연결된 엉덩이가 불에 덴 것 같았다. 이건 전위차인가? 어디선가 번개 같은 전류가 흘렀다.

참새 같은 작은 새는 두 다리로 전선 위에 올라 서기 때문에 병렬로 연결된답니다. 그러면 전위차가 ‘0’이라서 감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귓속에서 소용돌이침과 동시에 그는 귀를 싸매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그를 일으켰다. 낯모르는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벤치에 뉘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하늘이 아닌 땅의 모습이 보인다. 듬성듬성한 풀밭에 흑백으로 널브러진 날개, 커다란 새. 180도를 회전해서 다시 하늘이 보인다. 전신주 꼭대기,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다른 한 마리가 유유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더니 주위를 도는가 싶다. 다음 순간, 어쩌면 전깃줄에 내려앉는 순간인가 싶다. 풀썩, 그대로 땅바닥으로 꽂힌다. 멋진 깃털 날개가 파르르 떨더니 이불처럼 몸뚱이를 덮는다. 바람에 여진이 인다. 감전사 – 왜 이 큰 새가 떨어지는가. 작은 참새들도 잘들 알고 피하는 것을.

참새류와 달리 한쪽 날개 길이가 1미터 가량 될 정도로 몸집이 큰 황새는 다른 새에 비해 전깃줄 감전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습…….

언제 적이었더라. 낭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는다. 뭐야, 그러니까 큰 새들이 더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경식이 엄니도, 어쩌면 나도……. 그는 의식을 잃는다.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이 황새는 참새와 달리…….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형, 쉿, 조용히! 조용히 있어 봐요! 여기 황새가 어디 있다고!

형? 여자애가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남자 선배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애들은 다 그쪽 애들이다. 교정 풀밭에서 1:1 교육을 받는다는 애들 말이다. 네가 나를 찍었더냐, 나를 설마? 그는 눈을 감았다. 어디서 봤던 애더라? 그는 무엇인가에 감전된 것인가. 여자애는 손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누르면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ㄱ의 손바닥과 ㄴ의 팔은 전류가 통하는 것일까 아닐까. 생각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고, 깜깜한 세상 속에서는 가늘지만 번쩍번쩍하는 전류만 보였다. 소리 없는 마른 번개였다. 감은 눈을 치켜뜰 힘도 없었고, 뜰 수 있었다 해도 뜨고 싶지 않았다. 살살 간질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시 한 번 전류의 습격이 왔다. 그는 팔을 떨어뜨렸다. 지면과 연결된 철탑이나 전봇대에 닿으면 참새든, 사람이든 감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이 귀를 때렸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 몇이 몰려들었다. 인문대 벤치 쪽에서 몰려왔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건넨 찬물을 먹여준 그 여자애는 성연이, 과 후배라 했다. 그날 이후 가끔씩 만난 연이는 새내기 주제에 아는 것이 꽤나 많았다. 무슨 애가 이리 유식한가. 기분이 나빴다. 입학하자마자 소위 운동권에 포섭된 걸까. 알고 보니 큰오빠가 독일어 선생님인데, 전교조 소속 해직교사라 했다. 큰오빠에게서 이런 저런 것을 듣는 모양이었다.

전교조? 그런 단어도 모르고 있던 그는 사회 속의 인간이, 더불어 사는 인간이 아님을 느꼈다. 4.19 혁명과 함께 조직되었던 교원노조가 5.16 쿠데타로 바로 해체되어 버렸다가 정신만큼은 살아남아서 20년 30년 세월이 흐른 그해 초 교직원노동조합으로 결성되었다 했다. 봄 학기 시작하자마자 전교조 활성화 움직임이 일었고, 2만 명도 넘는 교사들이 합류했단다. 그런 활동에 따른 탄압의 소용돌이는 불 보듯 뻔했고, 1,500명도 넘는 교사들이 파면되거나 해임되었다고 했다.

교사가 노동자? 노동계급으로서의 교사? 노동자의 시각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역사 선생님이 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뭔가 참담했다.

 

철조망을 넘나든 새에 관해서는, 정확히는 여학생의 방북 활동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는 찬반 견해들로 정신이 사나웠다. 연이를 통해서 그 가정의 사연을 - 사연이라는 말이 왠지 미안하지만 – 그 사연을 들었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끔찍한 사연들로 점철되는 것일까. 누구라도 고2 때, 6년 터울의 오빠가 죽었다면. 하필 전방 부대에서 죽었다면. 다음 날 가족 면회가 예정되었던 오빠가 죽었다면. 그것도 자살했다고 한다면. 여고생에게 그 충격은 평생 갈 것이었다. 그 방북 여학생은 그들 또래 아님 바로 위 누나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태 전 그들이 고3 때 학교 정문 앞 시위에서 최루탄에 사망한 대학생도 그들의 바로 위 형 또래였다. 연이는 그 사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형은 운동권이면서 공부에도 엄청 열심이었고, 운영하던 만화동아리도 위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끌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또 2학기가 시작되었다. 연이는 그를 느닷없는 독일현대소설이라는 과목으로 이끌었다. 큰오빠가 추천해준 과목이라 했다. 유럽의 현대사회를, 학생운동을 곧바로 알 수 있는 과목이랬다.

나 학생운동 별 관심 없는 줄 알면서.

학생운동 빼놓고 어떻게 유럽의 현대사를 알아? 우리 역사전공 아냐!

우리 과 학생들이 읽을 필독서는 따로 있잖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못 들었어? 유럽의 역사라면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영국사』 그거면 되는 것 아냐. 또 가볍고 폭 넓게 『이야기세계사』 두 권도 있잖아. 고대 오리엔트부터 중세까지, 르네상스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젊은 사학자들이 써서 재미있어. 이건 과 선배로서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공부 좀 제대로 합시다, 성연이 학생!

형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나 해! 독일현대소설 수강하면 틀림없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소설도 공부하게 될 거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 모르지? 나도 몰라. 암튼 70년대 중반에 발표 되자마자 곧 영화화 되었고. 소설에 부제가 붙어 있는데,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낼 수 있는가’ 라네.

기껏 폭력 이야기구만.

아니 그보다도 더한 살인 이야기. 너무도 평범한 독신 여자가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랑 마음이 맞아 자기 집에 갔어. 이튿날 아침 무시무시한 가택수색을 당한 거야. 은행강도를 은신시켰다는 죄목이었대. 강도란 물론 누명이었고. 그럼에도 순간에 매장당하는 거지. 당연히 신문들의 보도태도가 한 평범한 여자의 명예를 짓밟아버린 것이야. 여자는 가치관의 혼란 끝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기자를 살해하게 된다는.

뭐야, 멀쩡한 기자를? 다만 명예를 실추시킨 왜곡 보도 때문에? 당했으니 원수 갚고…… 그렇고 그런 평범 그 자체구만.

형! 울 큰오빠, 전교조 해직교사 이전에 독문과 졸업생이라니까, 과대도 했고! 독문과 졸업생이 독문과 강의를 추천할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어?

독일현대소설 – 이 과목 첫시간은 다른 놀람의 순간이었다. 언젠가 깨진 강의동 유리창 사이로 스며드는 최루가스에 코를 막고 달리다가 층계참에서 맞닥뜨렸던 여자, 아무에게나 치약을 나누어주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순간 멍했다. 독일현대소설은 다만 소설이 아니라 사회적 배경에 집중되는 강의였다. 연이의 말을 듣기를, 연이오빠 독일어 선생님을 믿기를 잘했다.

 

어쩜 좋아, 10월의 어느 날엔가 연이가 울상이 되었다. 흙빛 얼굴이었다.

형, 세상은 너무도 잔인해. 이번 사고가 하필 y대 그 만화동아리에서 터진 거야. 이oo열사가 그렇게 떠난 뒤에도 계속 동아리는 유지되고 있었다 거든. 어떻게 그런 일이. 하필 거기에서.

무슨 사고? 연이 넌 입만 열면 사고 소식을 물고 오더라.

듣고 보니 끔찍했다. 참혹했다. 비참했다. 예상을 상상을 모든 것을 넘었다. 그 만화동아리에 드나들던, 만화에만 진심이던, 정말 애먼 전문대생이 소위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4년제 대학생이 아니니까, y대생도 k대생도 아니니까 틀림없이 프락치라는 오해로 인해서…….

그 이름은, 그 일은 글로는커녕 말로도 옮길 수 없다. 그런 뉴스는 듣지 않은 것으로, 내 머리에 입력되기 전에 귓가만 스쳤을 때 회수해 갔으면 했다. 세상에는 입술을 달싹거려서도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인간에, 인간 세상에 관해서는 어쩌면 침묵이 답이다.

침묵은 당연한 결과였다. 말은 입술 안에 갇혔고, 글자들은 책 속에서 먼지 조각들이 되어 증발해버렸다. 강의실에서 펼쳐진 책들은 뿌연 공간으로 흐늘거릴 뿐이었다. 교수님들의 강의 목소리며 동기들의 말소리들이 귓바퀴에서 바람처럼 쓸려 나갔다. 소리들을 따라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올라가던 그는 어떤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는 여기 이곳을 피해서 날고 싶었다. 날개가 없었다. 그는 새가 아니었다.

 

    10월 초, 그러니까 그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바로 일주일 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왔었다. 두 번째 한국방문이었다. 그에게, 어머니에게 교황이 누구인가. 그가 열 살 때였을까, 어머니가 하도나 숨 가쁘게 교황님 교황님을 불러댔다.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로 교황의 이름이 바뀌던 그해, 어머니의 불안한 슬픔과 기쁨의 교차는 당시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에게 교황은 하느님 바로 다음이라고 각인된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국인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식이 있던 1984년의 한국 방문은 어머니에게는 천국이 이 땅에 열린 날이었다. 교황이 한국에 와서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이 전라남도 광주시, 그때는 아직 광주시였다. 미사집전을 위해서는 광주공항에서 무등경기장으로 바로 가면 되었을 것을 5.18 민주화운동 눈물의 현장 전라남도 도청을 돌아서 갔다. 그런 결정은 바티칸에서부터 했기 때문에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강조하곤 했다.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1980년 5월 이후 처음이었다고 했다. 사실 어머니는 교황의 광주 방문 전날부터 광주로 나갔고, 차가 끊겼다던가 무슨 핑계로 이모 집에서 주무셨다. 다음날 아침 미사에 늦지 않기 위함인 걸 누군들 몰랐으랴.

또 뭐냐! 투틸로! 교황님이 글쎄 그 먼 데 소록도 나환자촌엘 가시겠다고 작정하셨대. 솔직히 우리들 모두 그 무서운 사람들과는 배라도 같이 탈라고 했더라냐! 선착장도 따로따론데, 그런 데를!

아무튼 어머니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겸한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대회까지 못 가신 것을 너무도 애석해하셨다. 시상에나, 미사도 한국말로 보신다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며 ‘순교자의 땅’이라고 하셨대. 한국말이라고? 어머니가 잘 못 아신 줄 알았다. 실제로 교황님은 10개 국어를 하신다는 걸 듣고는 2개 국어도 잘 하지 못하는 그는 그때 아직 중3이었음에도 몹시 부끄러웠다. 평생 3개 국어라도 하게 될까? 하긴, 그는 뭐 사제가 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지금은 그가 대학생이니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 교황이 한국에 다시 왔으니, 시성식 때만은 못했어도 대단한 뉴스였다.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라나. 65만 명이 몰린 여의도광장 행사에서 남북한 화해를 기원하는 평화메시지를 낭독했더란다. 이번에는 또 어떤 한국인을 몰래 만나서는 ‘쉿, 혼나’라고 위트를 남발했다는. 그래서 고향의 어머니가 또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하며 무심코 흠뻑 웃었더니만.

그런데 그런 기억조차 하얗게 세어버렸다. 세상에 종교가 있는 것일까.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어떻게 대학생들이 대학생을. 살아있는 사람을. 어머니의 교황님은 무엇이라 하실 것인가. 교황님이 다녀가신 서울에 그를 통한 은총 같은 것은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1주일의 효력도 없는 은총이라니, 은총은 빈총이었다.

 

 

    형,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연이는 정말 호박씨를 물어 오는 제비처럼 소식을 물어 날랐다. 그 애는 전깃줄에서 지직~ 하고 떨어질 바보 같은 새는 아니길 빌어야 했다. 사실 그는 소식보다 찰랑거리는 단발이 좋았다. 달까말까 스치는 머리카락이 은근히 그리웠다.

저기 베를린에서, 그러니까 동베를린 군중들이 베를린장벽을 밤사이 망치로 무너뜨렸다는 뉴스요! 들었죠? 동독의 국경이 전쟁 그런 것 없이 완전히 개방되었다고요.

사실 그는 뉴스를 잘 듣는 편은 아니었다. 고향에 살 때부터 뉴스는 어머니가 성당에서 듣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 바깥일에 관심이 적었다고나 할까. 집에 라디오도 없었고, 도서관에서도 신문을 챙겨 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동구의 상황은 좀 알고 있었다. 철의 장막이 붕괴되는 소리는 여름부터 들려왔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가 사실상 개방되었다. 그 가을 라이프치히에선가 7만 명 시위대가 ‘우리는 민족이다.’를 외쳤다고 해서 ‘민족’이 무슨 뜻일까 살짝 고민도 했었다. 정관사를 썼을까, 부정관사를 썼을까. 그 문장 때문에 여름에 철조망을 높이 넘어 날아간 새가 북에서 읊었다던 표어 ‘조국은 하나다’를 다시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렇더라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고? 사람들 수천이 몰려드니까 밤사이에 수비대가 장벽을 열었고, 사람들은 장벽을 깼고,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서 포옹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니. 만우절도 아닌데 사실이겠지.

형! 듣고 있어요? 사람들은 왜 왕창 서베를린 쪽으로 몰렸을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아는 것도 없고. 다만 동서 할 것 없이 유명한 텔레비전 탑들로 양 방향 방송이 터진 건 오랜 일이고, 한 해 500만 600만씩 단기 방문여행이 가능했다는 기사도 보았었다. 한쪽의 풍요로운 경제지표도 다 알려진 사실이었고. 뭔가 자유로운 분위기, 강요된 안정 보다는 선택하는 무엇, 하다못해 나태 같은 것. 그러니까 실업급여 같은 것, 왠지 잠시 덜 먹고 놀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유…… 그 비슷한 것을 상상했다. 상상만 했다. 기적과도 같은 분단국 독일의 소식에도 그는 무감각했다. 세상에 대고 언급할 단어들이 사라져 버렸다.

 

 

    침묵 속은 희뿌연 공간이었다. 어딘가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나름 온전한 길이라고 믿었던, 면학을 통해서 성과를 내고 어엿한 직장인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정석은 깨어지고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를 어떻게 살까. 어디로 도망갈까. 돌부리를 차고 걸었다. 연이는 그를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슬픈 무서운 진실들을 날갯짓에 날라 오는 일에 스스로 소스라쳐 하는 것 같았다.

 

강의실 대신 책방을 기웃거렸다. 혼을 빼놓을 책을 읽자. 시집에서 안정감을, 언감생심 낭만을 찾게 되려나. 그렇더라도 한편으로 당시 인기 절정의 『홀로 서기』 같은 것, 그건 아니었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홀로 서 있는 인간이 웬 홀로 서기 주장인가 싶어서였다. 이렇게 날이 넘어서야 무슨 시를 읽나. 좋아, 우리들의 자화상을 읽자. 그는 ‘우리’를 골랐다.

『슬픈 우리 젊은 날』 -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로맨스 영화에 대한 반발로 이름 붙였다는 시집이었다. 대학가의 서클룸, 화장실 벽, 술집, 카페의 메모장에 적은 낙서까지 수집해 놓은 글들이라면 그들 대학생들 모두가 필자일 터였다. 어라, 그때의 살짝 놀람이 지금도 생각난다. ‘너무 맑아 서러운 날’이라는 1부의 맑은 서러움을 넘기면, 2부는 역시 ‘혼자 서는 연습’이었다. 홀로, 혼자가 역시 젊은이들의 화두였다.

제비 - 나는 겨울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겨울에 이땅을 찾아옵니다. 나는 날개가 있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지 않느냐고요? 왜냐하면 따뜻한 곳으로 가면 희망이 사라질까봐 그래요. y대 자유교양이라는 써클의 누군가가 쓴 낙서의 일부였다.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얼어붙은 땅에 온다고? 눈이 내리면 얼어서 죽고 – 역시 제목이다. 정말 낙서인지 시인지 공감 가는 글들이 많았다. 게서 구한 것은 위로도 낭만도 아니고 아픔이었다. 그는 아파서는 안 되고 건강하게 학업을 마치고 건전한 직업인이 되어야할 숙제를 살고 있었는데도, 고개를 들어보니 도처에 아픔뿐이었다. 슬픔까지는 그 나름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어휘였지만, 아픔은 달랐다. 아픔은 아픔이었다.

 

멍든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청춘들, 애초에 하늘은 시퍼런 멍이 들었는지 모른다는 상상에 공감하면서, 그 가을 겨울에는 철학에도 지진이 일었다. 서적은 뒤죽박죽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68운동을 들여다보았다. 지금까지와 달리 어둠에서 구한 금지된 책들을 읽었다.

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서구의 68운동의 모토는 그냥 너무 멋있는 문구였다. 1945년 종전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영광은 기울고 있었고, 50년대 탄생한 독일 라인강의 기적도 영원치는 않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독재스타일 대통령의 결단으로 경제가 살아나고 있었던 그때, 전쟁에 팔려(?) 가서도 달러에 환호하던 그때,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시작되었다더니, 68년 베트남 구정 대공세를 기점으로 유럽의 대학생들은 폭발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성장도 사회주의 국가들의 복지제도도 모든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인간들의 평등한 세상은 어느 곳에도 없다는 인식에 폭발했다.

그는 그들이 꿈도 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읽는 『희망의 원리』라는 책에서는 그런 꿈을 낮꿈이라고 했다. 낮꿈이라고? 그는 눈을 크게 떠보았다. 아무리 크게 떠도 물고기 눈이었지만.

밤꿈이 리비도의 충동에 기인한다면, 낮꿈에는 자아의 고유 의지가 보전되어 있다. 밤꿈은 정신분열적, 낮꿈은 편집광적이다. 낮꿈은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결핍과 장애가 낮꿈을 꾸게 하므로, ‘만일 구운 비둘기가 식탁에 널려 있다면’ 사람들은 낮꿈을 꾸는 것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 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한편 세상에 만연한 관료주의가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지친 그들은 ‘굶어 죽더라도 지루한 건 못 참겠다.’라고 외쳐댔다. 벌써 20년 전에. 그때 그리고 20년이 지난 그날도 한국 국민들은 얌전히 반공 민주정신으로 살고 있었는데. 살아야 했는데.

 

 

   침묵 속에서, 낮꿈이 무엇인지, 구체적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아는 것도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닫아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침묵 속에서 결정한 첫 번째 행동이 입대였다. 불안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전방에 배치될까. 그는 운동권이 아님은 물론 단순 시위 전력도 없었다. 그래도 대학생이니 전방으로 가게 되려나. 가게 되면 갈 일이었다. 우연히 죽게 되면 죽나? 막연한 공포로 미칠 것 같았지만, 험할지라도, 무서울지라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과에는 친구가 없었다. 법학개론에 훅 갔다가 철학서에 빠져서는 단 한 치도 옆을 돌아보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를 빼먹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학기 중간에 넋이 나가버렸으니 학기를 망쳤다. 학기를 망치다니! 그런 단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일은 그리 닥쳤다. 2년의 대학생활에서 세 학기만 건져 놓은 채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차곡차곡 블록쌓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벌써부터 절름발이 블록이 되었다.

 

연이, 입대를 결정하고 나서 연이를 보아야 했을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을까. 모르겠다. 이제 침묵은 회색 숲을 넘어 블랙홀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덜컹거리는 맘을 접었다. 흔들리는 각도를 접는다. 사랑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수평이 되어버리면, 수평이 되어버린 사랑은 순간에 멈춘다. 안다.

사람은 어떠냐고요? 사람도 이론적으로는 참새와 마찬가지입니다. 두 손으로 전선에 매달려도 감전되지 않습니다. 제발 몸으로 시험하지 말아요. 아득히 선생님의 말이 들려온다.

전깃줄의 참새는 둥지에 넣을 사철쑥을 입에 물고 가다가 쉬는 것일까. 참새가 두 발로 한 줄에 서듯, 그도 두 손으로 한 줄에 매달리면 된다. 그는 무얼 하다가 전깃줄에 닿았을까. 그는 어쩌면 감전되었었다. 감전되기를 바랐었다. 아니, 새들은 유리창에 부딪쳐서도 죽는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왜소한 몸뚱이가 눈앞에 일렁였다. 숨은 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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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 『국제PEN광주 , 국제PEN광주위원회, 400~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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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4. 1. 15. 18:59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 교황 바오로 3세, 1541년 시스티나 성당

 

 

 

                                                                                   * * * 

 

투틸로 –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이름, 너는 오늘 너에게 빠진다.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가 한국의 김 스테파노 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바로 그날 세상에 나온 그는 바로 그것으로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유아세례 때 어머니는 그에게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게 하고 싶어 했더란다. 아니면 이그나시오, 주임신부님을 따라서 이그나시오라고. 하지만 신부님은 생일의 성인을 따라 투틸로라 이름지어주셨다.

성 투틸로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은 자라면서야 풀렸는데,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단다. 지혜와 웅변술로 수도원 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한 시인이며, 회화, 조각, 공예를 두루 섭렵한 미술가이자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졌다는 만능 예술가였단다. 베네딕토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베네딕도라고 쓴다. 대구수녀원이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소속이다. 바른 표기라면 툿칭일까, 아무튼 뮌헨 근교의 지역이름이니까 의미는 없다. 어쩌다 베네딕도수녀원의 긴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일가 수녀님 때문이다. 평생을 미국 중부 어디 오마하의 수녀원에 있는 그 수녀님은 일가이니까 한국인인데, 법적으로는 미국인이겠지만, 한국에 피정을 오면 매번 대구를 방문한다. 같은 베네딕도수녀회라서 그런다 했다. 수녀님은 그곳을 다녀오면 꼭 들려주는 말이 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한1서 어쩌고 한다. 그의 특기는 ‘예’도 아닌 침묵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영원히, 어디에 남아, 뭣 하러?

 

다른 이야기로 갈 것은 없고, 그 투틸로 수도승 같은 만능 예술인의 이름을 받은 기분은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유전이 아닌 만큼 불행하게도 그가 예술적 감각과 관련해서 유전자를 갖지 못한 것이 분명해졌다. 웅변, 글쓰기, 음악, 미술 어느 것에서도 소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겁이 많은 사내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머나 먼 성 투틸로 대신에 그는 그에게 투틸로라는 이름을 주신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로는 큰 도시의 성당으로 나가셨다고 했다. 자라면서 괜스레 궁금해진 그는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찾아보았고, 로마 유학을 떠나셨고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셨다는 것까지, 그리고 돌아오셔서 곧 세상을 떠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모른 체 했다. 침묵은 말보다 편한 도구였다. 다만 마음속에 만일 로마를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레고리오 대학과 성 이그나시오 디 로욜라 성당에는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170㎡가 넘는다는 성당의 천장화 <성 이그나시오의 영광>을 꼭 보고 싶었다. 그 성당을 완공할 즈음 재정난으로 돔을 만들 수 없었을 때 – 돔이 없는 성당이라니! - 포초라는 화가가 실제로는 평평한 천장에 돔을 그려넣었다는 것 아닌가. 착시현상을 이용해서 돔과 하늘을 드높고 드높게, 그러니까 다만 시각적으로 공간을 무한 확장했단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릴 것 같은 사람들의 형상들도 함께 그려넣었다니. 두 눈으로 보면서 눈속임에 빠져보고 싶다. 물론 로마에 갈 수 있다면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놓칠 수야 없겠지.

천장화 – 그런 것들을 새들이 그린다면 또 몰라, 어떻게 사람이 그릴 수 있었을까. 4년을 천장화에 매달린 미켈란젤로, 이런 것만으로도 옛날 사람들은 그에게서 경이를 자아낸다. <최후의 심판>은 어떻고. 167.14㎡의 벽면에 391명의 온갖 모습을 7,8년의 세월에 걸쳐 그렸다니. 당시 교황님의 김탄사가 의아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하긴 모든 예술이 그렇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석고형으로 구체화하는 데에 꼬박 37년을 보냈다잖은가. 서울에 있는 No7/8 청동작품 제작만도 2년 반이나 걸렸다는데, 대중이 관람할 수가 없다니 애석하다. 작품을 전시하던 로댕갤러리는 폐업을 했고, 해서 지금은 다른 미술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니, 혼도 따라서 수장고로 들어가 잠을 자고 있을까. 그의 내면은 멀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채워졌다.

 

왜 현대에는 지독한 완벽한 일꾼이 없을까. 우리는 현대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그는 단정했다. 어느 부분 발전을 말하지만 능력 면에서 퇴보가 더 드러난다. 혹시나 기록되지 않은 태고의 역사 속에서는 인간에게 날개도 있었을까. 그 감각으로 천장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창세기의 인물들처럼 몇 백 년을 살 수 있었을까. 최초의 인간 아담이 930세를 살았다지만, 그 기록을 노아가 950세로 므두셀라가 969세로 깬다. 현대인에게 평생의 작업이 무슨 의미일까.

몸은 그렇다 치고 머릿속은 어떻게 그렇게 심오했을까.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의 이름을 그는 수학 시간에 알게 되었다. ‘두 직선이 만나면 마주보는 두 각은 같은 각을 이룬다.’ 라거나 ‘임의의 원은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이런 간단해 보이지만 완벽한 정리를 할 수 있었다니, 공책에 그것들을 눌러 쓰면서 그는 어지러움을 느낄만큼 감탄했다. 현대의 심오한 지식이라는 것들은 파편적일 뿐, 전체적으로는 위축된 인간들. 그는 자랄수록 배울수록 과거라는 시공간이 무한 매력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역사를 공부하자, 그랬다.

 

 

투틸로, 학교 이름으로는 노승욱, 그가 택한 사학자의 길은 수월한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전 대학강사에게 미래는커녕 현재도 없었다, 없다. 남사스럽다, 라고 부끄러워할밖에. 어머니의 속뜻대로 그는 신학대학으로 진학을 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종신서원까지도. 극단적으로는 카르투시오회의 모토처럼 오직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도 있었겠다. 천 년 전에 주교직도 마다하고 엄격한 은수 수도생활을 시작한 성 브루노의 후예들, 봉쇄수도원은 영화 〈위대한 침묵〉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들 봉쇄수사의 삶은 기본적으로 은둔 지향, 그렇다고 현대에 와서는 완전한 은수 개념은 불가능하고 반쯤 숨어서 생활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세상에는 스물도 넘지만 우리나라에는 두 곳, 20년 전쯤 세워진 상주시에 있는 남자 수도원에는 한국인 봉쇄수사 두 분과 외국인 몇 분이 계신다. 평수 사님들은 몇 분 더 계시고. 아, 그곳에 관한 한국영화도 있다. 그리고 수녀회는 보은에 있다던가. 믿거나 말거나 거친 빵과 밥 중 선택해서 먹는 것이 전부라니, 그로서는 그런 절제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인간의 기본 욕구, 그러니까 생리적 욕구인 의식주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안전에 대한, 소속감에 대한, 설마 존중에 대한, 자아실현에 대한 고차원적 욕구들이 채워진들 진정일까. 영화를 본 다른 누구는 봉쇄수사들이 자발적으로 시간과 미래를 버렸으므로 이미 천국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선뜻 동의는 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속세가 맞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천국인 그곳에서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초월할 것이다. 봉쇄수도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종교에서는 죽음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는 사례가, 그래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는 사례가 있다. 〈위대한 침묵〉에서의 드문 인터뷰도 생각났다. 한 장님수사가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자신을 장님으로 만드신 것에 감사한다고, 그것이 영혼에 더 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랬다. 이 무한 신앙도 한 인간의 것이다. 다른 인간은 그런 상태를 도취라고, 마취라고, 마약이라고 할 게다. 묵상과 기도와 독서와 노동이 전부인 삶을, 그 자발적 선택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20년에 걸쳐 인내하면서 영화를 찍은 감독 또한 수사 못지않다. 옛날만은 못하지만 세상은 대단한 사람들 천지다.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존재들 또한 현실이건만. 그러니까 살아서 벌써 천국과 지옥이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속을 끓이면서 그는 답을 몰랐다. 아스팔트에 둘러싸인 방, 열린 또는 닫힌 창문 하나, 이 침묵은 봉쇄수도원의 그것과 비슷하려나. 그의 그것은 헌신도 외경도 없이, 부끄러움만 더한, 그래서 더욱 소외된 침묵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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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  『작가교수세계』, 한국작가교수회, 474~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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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