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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08 침묵 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3
  2. 2023.06.18 침묵 2 - 4월
  3. 2017.10.07 가을
  4. 2008.09.01 네 번째의 죽음 - <한국소설> 1
소설2024. 4. 8. 12:30

 

침묵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불으한 어리니 한태 한 노인이 성금을 보냈다는 뉴스에 그는 머리가 멍해졌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왠지 더 불안해진다. 연말이면 대단한 뉴스들이 많다. 연말이면 불우한 사람들이 많다. 성금이 필요한 사람들도, 성금을 보낼 법한 외관을 하고서 성금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겨울답게 - 무엇이 겨울다운가? - 모교에 또 전임 티오가 났었다. 그는 일차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다. 몇이 지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셋이 남았다고 하는데 보나마나 유학파 박사들일 것이다. 최근에 임용된 전임들은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이다 보니, 그는 서류에서 1969년생이란 숫자가 보이는 순간 탈락했을 지도 모른다. 논문 편수에는 그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소용없었을 것이다. 외국 저널에 게재된 논문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지금은 시간도 탈락한 신세이니까.

시간을 할 때가 그립다는 생각에 그는 흠칫 놀랐다. 정말 그립다니. 강의하던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정말 몰랐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들켰을 세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빈 방, 좁아터진 빈 방에 누가 있을까 만은.

 

빈 방에 손님이 들었다. 느닷없는 친구 녀석이다. 이른 나이에 동네 여자애, 그러니까 중딩 동창이랑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그런대로 잘 사는 녀석이다. 어쩐 일로 초저녁에 불러내더니, 어슬렁거리면서 길게 길게 밥 먹고 술 먹고도 자리를 뭉개고 있었다. 마침내는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을 주워 담고는 그를 따라 오피스텔로 올라왔다.

왜? 늦어도 되냐?

엉. 그러더니 친구는 깜짝 놀랄 말을 했다. 1박 자유부부, 그게 뭔 줄 아냐. 세상에, 생일선물 주라더니, 1박 자유부부 해달란다. 하룻밤 놀다 오겠다, 이러는 거야. 애들은 울 엄마한테 맡길 테니까 자기도 자유부부 해! 내 참 환장 하겄다.

무슨 말인가. 멀쩡한 부부가 1박 자유부부? 얼핏 보아서는 그리 부정한 단어는 아닌가 싶지만, 또 어찌 보면 매우 부정한 단어다. 자유가 이리 해괴망측하다니. 자유를 그리는 아내와의 일평생이라니. 이 친구 꽤 불우한 심정이겠다. 37㎡ 오피스텔 방에는 자유가 널려 있고, 대신 자유를 갈망하는 아내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날 저녁 불우하지는 않은가. 모르겠다. 그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소리를 중얼대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친구에게 침대를 내주었다. 다른 침구가 없었으니까. 누구랑 밤을 함께 지새본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잠을 청할 수 없었고, 책상에 앉아서 꼬박 밤을 샜다. 불우한 친구, 그의 아내의 자유는 무엇일까. 친구의 아내는 불우해서 1박 자유를 선물이라 여길까.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그의 오지랖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 자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실업 중의 불우한 싱글일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미래에 중독된 종이라고 하는데, 그는 미래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 모양인가 싶었다. 생각이 일렁인다. 생각은 늘 그 속에서 미리 무엇인가를 한다. 목표를 세우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그가 알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일은 이미 일어났던 어떤 것들뿐이다. 수많은 가르침들처럼 어떻게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가 말이다. 아직 모르는 것들에, 느낄 수조차 없는 것들에.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려서 판단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잘 해보려고 할 때, 행위는 현재에 그친다. 현재 행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기억이 미래에 무슨 일을 영향할 수 있다는 것인지.

왜 그는 과거지향적일까. 과거에 잡혀있을까. 먼 과거, 아주 가까운 과거에.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성금을…… 그 기사가 다시 떠올랐다. 한글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복지관에서 배웠다는, 평생 비문해자로 살았던 할머니, 많은 사람들의 눈에 불우하게 비쳤을 할머니가, 더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그러니까 여전히 어린이들도 불우한 세상이다. 실제로 그가 어렸던 시절에는 밥 먹고 못 먹고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렇게 행불행을 깊이 느끼지 않았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그의 마음을 일렁이던 단발머리 여자애는 그 나름 부잣집 아이였지만, 그것 때문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다. 그냥 단발머리가 마음을 흔들었고, 그것이 전부였었다. 예컨대 아버지가 술고래라서 – 동네에서 별명이 그랬다 – 가끔 동생 광순이를 데리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광식이도 그의 집이나 또 다른 집에 숨었다가 가곤 했어도 늘 명랑했었다. 근년 들어서는 어린이들도,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중학생들도 여러 이유로 불우하다. 심지어 불우함을 못 이겨서 세상을 떠난다. 어린아이의 자살 – 그런 단어는 입에 올리기도 무섭다.

 

몇 년 전이었을 게다. 중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충격적 기사를 본 뒤로는 자살 뉴스 따위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극단적 선택이 왜 자살의 대명사인가. 오히려 방화나 살인이 극단적 행동 아닐까. 매우 불우한 순간의 가장 비극적 선택을 극단적이라고 말하다니. 21세기 오늘엔 밥걱정 아닌 모멸감이나 폭력 등에 시달려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란다. 이 비극을 누가 강요하는가. 살기가 얼마나 끔찍하면 죽는 쪽을 택하는가.

가톨릭에서는, 틀림없이 개신교 교회에서도,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것을 함부로 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고 가르친다. 자살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중죄라고. 지금은 완화되었지만 자살자의 장례미사는 불가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스스로 삶을 버리는 중학생 또는 어른은 모두 기독교 신자가 아니려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몇 년 전 그 사건의 경우, 어머니가 중학교 교사인데도 중학생인 아들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유서를 쓰고 뛰어내렸다. 뛰어내리기 – 결정적인 선택이다. 약이 부족해서 또는 줄이 풀려서 미완성일 수도 없는, 단호하고 완벽한 비극적인 선택이다.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말이었을까. 아직도 그 비슷한 말이 그의 해마 어느 구석에 박혀있다. 어머니가 근무하시는 동안 그 점을 이용해서 집까지 쳐들어왔던 동급생들의 만행을 털고, 오해도 풀고 나서 죽겠다는 너무도 차분한 유서. A4 용지 4장에 쓴 유서에는 가족과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 마음도 들어있었다. 일전에 사망한 명사 스님의 유서 비슷한 메모들이 보도되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었다. 참담했다. 아이가 썼던 유서에 비하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차, 목숨은 떠나고 없는데 유서들을 비교해서 무엇 하랴. 하지만 그 아이의 유서는 정석이었다. 그런 반듯한 글을 쓰는 열 세 살짜리가 그 불우한 시간들을 잘 버티었더라면 지금쯤 20대 대학생 – 생각의 깊이와 글 솜씨로 보아 아무래도 인문계 - 또는 군 복무 중일 게다. 역시 반듯한 언어로 살면서. 안타깝다. 아깝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그의 생각은 자신의 군 시절로 돌아갔다. 성인의 불우함은 좌절에 앞서 일단 행복의 쟁취라는 방향성을 먼저 제시받는다. 시골의 단출한 가정에서 폭 좁게 자랐던 그가 88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맞닥뜨린 현실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숙제였다. 순진했던 희망 같은 것은 무지와 비겁함이요, 세계관의 충돌은 그를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로 내던졌다. 그가 살아갈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거물이자 괴물이요, 그는 속수무책, 연대라거나 소속감 없는 무기력한 개인으로서 자아상실감에 빠졌다. 나라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숨이 막혔다. 입을 열려고 해도 적당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과묵한 인상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지만 한계가 왔다. 말을 토해내고 싶은 욕구와 강요당한 – 스스로 강요한 - 침묵 사이에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비겁한 선택, 군대를 선택했다. 어차피 사회입장권이니까 일단 현실에서 후퇴하는 기분이었을까, 비겁함을 침묵의 미덕으로 위장한 채, 조용히 학교를 떠났었다. 그러니까 그는 2학년 2학기를 스스로 망쳐놓고 그렇게 이등병이 되었다. 월급 6,600원을 받는 이등병 노승욱은 더 이상 투틸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그 이름이 그렇게 그리울 줄 그는 몰랐었다.

 

1990년의 전방은 복학생 형들에게서 듣던 그대로였다. 그가 아무 짓도 안 한 것, 다시 말해 학생운동권이 아니었던 사실은 특별한 고통을 예비하지는 않았다. 다만 군대는 전혀 다른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치열했던 KBS 4월 사태도 수월한 여느 파업 정도로 넘어갔고, 파행이 한 달을 넘겨도 의견들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군인은 의견을 가지면 안 되는 사람, 사람 아닌 그냥 군인이다. 북예멘과 남예멘이 통일 되었단다. - 아, 우리도 남북통일을 이루어 냈음 바로 제대 아냐! 그 정도였다. 어디서 통일이 되건 걸프전쟁이 나건 외국은 멀기만 했다. 우리나라도 멀었으니까. 한강의 제방이 무너져 대홍수로 백 명이 넘는, 150이랬던가, 사망자가 나와도, 10만, 20만 이재민이 발생해도 군대에선 어쩔 수 없었다. 전방의 군인은 국방만이 우선이니까.

내무반에서는 다들 침묵하듯이 침묵이 미덕이었다. 이병에서 일병으로 대단한 진급에도 불구하고 짬밥 서열은 서열이었고, 졸은 졸이었다. 걸레 대신 빗자루를 든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랴. 진급을 해 봐야 상병이 있었고, 또 진급해도 병장이 있었다.

다만 일요일은 대단했다. 아침 일찍 수송대의 차량을 타고 부대 가까이 있는 다른 부대의 본당에 나가서 미사를 드렸다. 세상에나, 그때 군대 내에 공소도 아니고 성당이라니, 그가 입대 전 1989년 가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2차 한국방문에 맞물려 우리나라에 군종교구가 설립되었다. 그 전까지는 군종 신부님은 지역 교구에 속하셨다. 아무튼 군대생활 중의 미사는 입당성가를 부르면서부터 빨리 끝나버릴까 떨렸다. 날 어여삐 여기소서, 참 생명을 주시는 주~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하면서 느리게 느리게 불렀다. 봉헌성가 때면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감사하는 맘으로~ 하면서 눈물도 났다. 2절은 더욱 좋았다.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 하소서. 어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매번 어머니 생각을 했다. 선한 일, 그것도 숙제였다.

 

그런 군대 생활 첫해 10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일 년이 된 동서독이 정식으로 하나의 독일이 되었다. 1/365 확률로 독일재통일의 날은 우리나라 개천절과 날짜가 같았다. 우리는 그저 통일이구나 했었는데, 신부님께서 독일에서는 재통일이라고 한다고, 19세기 때 독일제국의 통일과 구분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결과적으로는 흡수통일이지만, 양쪽에서 그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신부님들 중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이탈리아 아니면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많았다. 군종 신부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성경> 말씀보다 더 신선한 감동을 주셨다. 군대 내의 미사는 평상시와 달리 왠지 짧게만 느껴졌다.

 

그 무렵, 앞섰던가, 뒤섰던가, 나라를 통째로 뒤흔들어버린 사건이 터졌다. 물론 군대와 관련해서였다. 탈영 Y이병의 양심선언이라 불리는, 엄청난 군대 관련 폭로 사건이었다. 자대배치를 받은 지 불과 몇 달, 여차여차 우여곡절 끝에 – 동료를 팔았던 말았던 – 보안사에 근무하던 Y이병은 어느 날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가 혼비백산했다고 했다. 1,300장인가 그만한 엄청난 양의 기밀문서들이 그 캐비닛 안에 있었으니까. 캐비닛, 오늘날 그토록 민감한 키워드가 된 그 단어 말이다. 캐비닛 속 그 문서들은 탈영의 촉진제였다. 그것들을 들고 도망쳤으니,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때 승욱은 자문해 보았다. 자신이라면 그런 용기가 났을까. 고개를 저었다. 용감함이라는 유전자는 분명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문제의 1966년생 Y는 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이라 했다. 아, 또 외대생! 지난 해 방북 여학생도! 외대 캠퍼스에는 마약 같은 공기가 있어 폐부까지 세상을 뒤집어놓는 용감한 행동들을 감행케 하는가.

양심선언 과정은 Y의 학보사 활동이 끈이 되었다고 했다. Y는 우선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았다. 급히 양심선언문과 80일간의 국군보안사령부 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대학 학보사 선배 Y2를 찾아 만났더란다. 사실 이런 디테일은 승욱이 군에 있던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다. Y2는 지금도 막후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정치인이다. Y2는 다시 역시 대학 학보사 선배였던 〈한겨레〉 기자에게, 그 기자는 편집국장에게……. 그렇게 해서 보안사에서 운영했던 대학가의 위장카페 ‘모비딕’까지 들켜버렸단다. 그 이름은 20년쯤 지나서 동명의 영화가 나온 뒤에 널리 알려졌고, 그, 승욱도 그때서야 알고 더더욱 놀랐다. 세상은 모르는 것 천지였다.

 

암튼 그때 Y이병의 탈영에서 양심선언문 발표까지는 열흘이 걸렸다. 세상은 뒤집혔고 순간에 국방부장관과 또 무슨 장관의 목이 날아갔다. Y는 양심선언 이후 도피 생활에 들어갔고 곧 잊혔다. 1990년 우리나라 국군 졸병들은 스스로 움츠러든, 뇌가 없는 두더지처럼 살았다. 인생 어디인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밝기만 할까만, 군대는 어두운 일들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젊은 영혼들의 들끓음을 세상이라는 공간은 보듬어주지 못하는 곳인가 보았다.

그렇게 첫 군대스마스를 - 어머니의 말로는 크리스마스를 – 맞았다. 그쯤에 휴가도 나올 수 있었고, 위문편지도 기다려 보았다. 어라? 위문편지는 없었다. 그가 초등 중등시절 그렇게 열심히 썼던 ‘국군장병 아저씨에게’나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군인 아저씨에게’라는 위문편지가 없었다. 쳇, 그런 것들이 없어진 지 한 두해 되었다 했다. 곰신의 출현은 더욱 기대난망이었다. 고무신 거꾸로 신을 여친을 두고 온 일도 없었으니, 면회 올 여친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쓸쓸하게 그 한 해가 갔다.

 

 

    한 겨울, 그러니까 양력과 음력의 새해 사이는 꽤나 길었다. 2월 15일 금요일이 설이다 보니 일요일까지 나흘을 쉬게 되었다. 하지만 설 맞춰서 휴가 가는 행운이 있기 전에야 그저 쉬는 날에 불과했다. 그는 까치설날이 그리웠다. 투틸로, 이리 와 봐! 어머니가 새 조끼나 목도리를 떠서 입혀주던 섣달그믐날이었다. 그런데 까치설날은 옛 속에 묻혀버렸다.

오히려 밸런타인데이라는 말이 막 유행하던 때였다. 물론 갑론을박도 셌다. 일본 따라 하는 것이 무슨 의미냐? 웬 일본? 원래 서양에서 있던 것이라던데? 여자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니 생소했지만, 한편 수줍은 남자들에게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남자라고 해서 무슨 고백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니까. 군대에서라면 연인으로부터의 편지나 면회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사실인즉슨 할 일이 딱히 없어서 그랬던 것일 터.

그런데 너절한 기대들로 어정거리던 그 때, 그 싱거운 시간들을 찢는 뇌관이 터졌다. 2월 3일 일요일 저녁뉴스였다.

 

자살 - 이번에는 탈영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자대배치 첫날이었다는 N이병의 자살 소식이 터졌다. 불발탄을 잘 못 밟아서 죽었다는 사고 소식이었어도 오금이 저렸을 것을, 자살이라니. 논산인가 어디선가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는 퇴소해서 열흘 쯤 기다리다가 연대배치 그리고 자대배치를 받았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자대에 왔다. 그런데 그 첫날 자살을 했다니.

오리무중에, 알려진 원인이 없으니 수군대는 소리들만 난무했다. 입대하기 전 전대협 한라산 선봉대인가 어디서 활동했다고들, 그런 쪽으로 소식통 빠른 일병이 있었다. 소총부대로 갔더래, 그럼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것은 아닐 텐데. 아, 또 외국어대학이다! 외국어대학 영문과 89학번! 외국어대학이란 대체 어떤 곳일까.

그러고 보니 신년 초 외대생들이 높은 등록금 인상에 반발하며 학생처 사무실을 폐쇄하고 총장실을 점거해서 농성을 벌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외대생들, 주로 서양언어를 목표언어로 공부를 하다보면 서양의 사회구조나 서양의 민주주의에 관해서 정확한 눈을 뜨게 되어서일까? 그가 다녔던 지방대학에서도 숱한 학생운동을 봐왔지만, 그의 눈에는 외국어대학이라는 글자만 들어왔다.

 

나중에 알려진 것으로는, N이병은 새벽에 도착해서 곧바로 첫 번째 한 일이 교회에 다녀온 일이었단다. 이어 의무반에 가서 무릎의 상처를 치료받고, 감기약까지 타 갔더란다. 그러고서 누군가가 봤는데, 몇 사람 분의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갔다고 했다. 오전에 그랬던 사람이, 아니 군인이, 두세 시 경에 부대 밖에서 목을 맸다고? 매우 믿기 어려운 행적이었다. 무릎 상처는 훈련소에서? 곧 죽을 것이면 무릎 치료를 뭣 하러, 감기약을 뭣 하러, 빵을 뭣 하러?

더 한참 나중에 알려진 것으로는, 죽기 바로 열흘 전 전방입소 훈련을 떠나기 전에 내무반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는데, 그때부터 아주 어두운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아무 말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을 네가 유추 해석해야 한다.’ 라거나 그 비슷한 선문답 같은 문구였다니, 믿거나 말거나. 어떤 연유건 간에 그런 심리적 불안은 자신에게 닥쳐올 끔찍한 상황을 직감해서였을까. 물론 이 모두는 떠돌던 이야기였다. 누구는 그 신병이 08에서 소총부대로 주특기가 바뀌었는데, 08 적격심사에서 탈락한 것 아니겠냐고! 사실 08이라면 보안 및 정보요원 쪽인데, 그걸 받으려면 엄격한 성분조사가 필수적인데 통과 되었겠냐고! 그것들 또한 그냥 해보는 소리들이었다. 쉬쉬하면서도.

 

우울한 설이었다. 소고기떡국은 나중에 가야 고기가 많다고 늦게 간 것이 아니라,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랬다. 떡국, 어머니는 혼자서 식은 떡국을 드실 게다. 차례상을 물리고서야 다 식은 떡국을. 그런데 군대 내 사고 소식들을 어머니들은 어떻게 견디실까. 뉴스들을 알기나 하실까? 하기는 신부님은 어떻게든 소식을 아실 것이고, 동시에 모든 어머니들께 위로말씀도 충분히 해주실 것이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 크게 걱정할 일은.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무튼 그 설 주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너무도 황망한 사건이 또 터졌다. 음력으로는 정초였지만 벌써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우수가 들었는데, 그러니까 봄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가 군인 신분을 순간 망각하고 언 몸이 조금 녹아서였을지 괜히 좀 신이 나서, 신이 난다면서 왜 슬픈 노래였는지는 모르지만, 돌아선 그대 등에 흐르는 빗물은 빗물은~ 이 가슴 저리도록 흐르는 눈물 눈물~ 송골매의 <빗물>을 흥얼거리고 있다가……

듣게 된 뉴스는 또 자살이었다. 아니 곧 다시 더 이상한 안전사고라고 발표되었다. 나이도 지긋한 S일병, 그러니까 87학번, 아, 다시 또 서문학과, 서울대라지만 외국어문학과였다, 외국어학과의 수난? 웬 수난들이 그쪽 환경들에서 빈발하는가.

나이로 보아서 재수 삼수나 아니면 일반 휴학을 했었다가 군대에 들어왔을 S일병은 포병으로 동계훈련 중이었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어떻게 한 밤중에 좁은 박스카 안에서 목이 졸린 채 발견되었을까. 그것도 ‘사고로’ 목이 졸린 채! 박스카는 이동식 상황실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 좁은 박스카 안에 다른 몇은 깊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데, S일병이 목숨을 잃게 된 여러 상처들이 아무도 모르게 어떻게 순간의 사고로 발생했는가. 소지품도 손상당한 채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안전사고사였다. 이번에도 그가 학생회 활동을 했었다거니, 녹화사업 운운 하는 뜬구름 같은 풍문만 짙은 안개처럼 내렸다. 안개는 그대로 차갑게 굳어서 그들의 몸을 꽁꽁 얼려버렸다.

 

그들 이병들과 일병들은 군인이라고 쓰고 군바리라고 읽었다. 땡보직으로 꿀을 빠는 일은 별 따기, 땅개들은 그저 고달픈 인생이었다. 최악의 영창이나 육교의 ‘o’자는 꿈에서도 피할 단어였다. 영창만 다녀와도 진급은 물론 제대 날짜도 늦어질 것이며, 아, 육교라니, 그건 교도소니까 전역하고 나서도 전과가 따라다닐 터였다. 아니, 행여나 군기교육대에라도 안 가려면 여우가 돼서는 가스 뿌려대는 선임병들을 잘 피해서 마찰 장면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기불릭 모두를 섭렵하더라도 선임병들 입맛을 맞춰주고, 그들의 짬밥 숫자를 잘 외워 두어야 한다. 군번 따라서 아버지 또는 아들 손자까지 매기는 곳에서니까. 암튼 눈만 뜨면 군번줄 확인하고 관물대부터 신성히……

 

 

    의식을 잃고서 그가 실려 나간 것은 사실 4월과 5월로 이어진 무시무시한 죽음 사태를 견디지 못할 즈음이었다. 어떻게 시위학생을 잡아서 때려죽이는가! 때려죽였다! 대학생 K군의 죽음으로 흩뿌려진 붉은 피는 5월을 뒤덮고 말았다. 입이 있어도 침묵만이 살 길이었던 그때 그곳에서, 누구라도 눈 뜨고도 의식이 없어야 했던 그때,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니까 시초에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 학생이, 여학생이 먼저 불을 지폈다. 소신공양은 그럴 때 쓰는 말인데도 그냥 분신이라 불렸다. 이어서 이어서 이어서…… 무엇이 그들 분신과 그들 투신의 행렬을 만들어냈던가. 생각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봄을 견디면서 되뇌었던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나는 군인인가 대학생인가? 군인인야, 대학생이야……. 그 무렵이었다. 어디에서 어느 순간에 기억이 멈췄는지는 모른 채로, 그가 눈을 뜬 것은 의무대였다.

여단 의무대, 군의관이 말했던 것 같다. 스트레스가 심했더냐? 사내새끼가! 꼴싸를 봉께 먹물쟁이고만, 해도 운동권도 못했겄는디. 그에게 익숙한 말투는 고향 사투리였다. 그것도 지독한 사투리. 얌마, 침상에서 넘어진 거이 다행이였제. 거그 좀 둔눴거라! 잔말 말고 둔눠!

 

며칠 못 가서 또 다시 의식 소실로 두 번째 여단 의무대에서 눈을 떴다. 야가, 참말로 뭔 일이다냐. 불안장애여, 뭐여! 인자사 일병 달았고만, 이래 싸면 지대로 전역이나 하겄냐!

사단 의무대 대신 바로 군병원에 보내진 그는 의식이 돌아온 채로 이런저런 검사들을 받았고, 거기 군의관이 부사관에게 흘리는 말에서 제풀에 엄청 놀랐다. 왜 의사들은 영어를 좋아하는지, -싸이어티 라는 말도 싸이코로만 들렸고, 소셜- 어쩌고 하는 말에서는 얼핏 비슷한 쏘시오패스라는 단어만 떠올랐고, 그에게는 모든 단어들이 설마 하면서도 무서움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름도 모르는 크고 작은 알약들을 보따리로 처방받았을 따름인 그는 내무반에 쥐죽은 듯 기어 돌아왔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여단 의무대 군의관에게 다시 보내졌다. 약 보따리를 들고 가랬다. 잘 있는가 볼라고 불렀다. 약봉지 요리 조 봐! 사투리 군의관이 말했다. 되얐네! 자세히 알 것까장은 없고! 얌마, 일단 아찔하거나 그랄 꺼 같음 우선 앙거, 둔누등가. 다리 올릴 수 있음 올리고! 참, 김치 같은 거 더 많이 묵고, 넘 보담 짜게 묵으라 그 말이여! 극도의 긴장 말고 다른 원인은 없단 말잉께. 봐라, 사회불안장애 - 소셜 엔싸이어티 디스오더 - 그리 말했겄네. 사내새끼가, 더구나 군대에서 실신이 뭐여! 평생 사회생활 해묵을 수 있겄냐. 정신 똑바로 차려, 얌마! 그는 정신 똑바로 차리기로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다행으로, 내무반 최고참 병장이라고 모두 고약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살짝 그의 머리를 쥐어박는데, 그 손길이, 조심해라 임마! 그러는 것처럼 느꼈다. 성한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문 병장, 그는 원래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입을 열면 목소리는 테너처럼 우렁찼지만 그랬다. 군대에서 소통 할 수 있는 말들이 무엇이었을까.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10월 들어 놀란 것은 달력 때문이었다. 아니, 이미 1991년 달력이 나왔을 때부터 그들 모두를 화나게 했던 10월이 왔다. 그것은 1일 국군의 날이 시커먼 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그들의 날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 해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의식행사며 할 것은 다했는데도 뭔가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울 나라 역사에서 10월 1일이 어떤 날인지 아나. 그렇게 목청을 뽑은 김 병장의 말로는 – 그때 김 병장은 내무반 고참 순위 2번이었다. - 우리 육군 제3보병사단이 처음으로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했던 날이다 말이고. - 예, 알겠습니다. 즉각 그 아래 쫄들이 복창했다. 알겠나? 그런 말이 떨어진 뒤에야 복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상불가의 순간을 초래했으니까.

마, 잊지 말거래이. 머 한다꼬 국군의 날을 법정공휴일에서 뺀 긴가. 내 말한대이, 이그는 곧 원상복귀 될 끼다. -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10월에 일요일 빼고는 빨간 날이 3일 개천절 단 하루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공휴일 숫자를 줄이려 한다 해도 좀 심했다.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니!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면, 한글을 경축하지 않으면 무엇을 경축한단 말인가. 이번에는 국문과에 다니다가 입대했다는 변 상병이 열변을 토했다.

공휴일을 70일에서 67일로 줄였다는 것도 우리한테는 억수 손실이지만, 하필 한글날이라니! 쉬고 안 쉬고를 떠나서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라니! 어린이날, 현충일, 제헌절만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 한글 문자 없이 민족이 있냐, 나라가 있냐. 문화가 있냐.

말이 문화에 이르니까, 승욱은 첨엔 너무 나간다 싶어서 갸웃 했다가 이어 수긍이 갔다.

옳습니다! 박수!

아, 그것은 그의 섬뜩한 실수였었다. 감히 선임병장의 발언에 일병 주제가 응수를 하다니.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무릎을 세워 고개를 쑤셔 박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를 각오하고 머리통에 힘을 주었다. 이병들도 함께였기에 창피한 순간이 더 창피했다. 그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야, 미주! 이리 나왓!

선임들은 그가 실신했던 이래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긴 병명 대신에 미주라고 놀리듯 불렀다. 홍당무가 된 그는 구부정하게 앞으로 나갔다. 불호령이나 주먹 대신 그에게는 엉뚱한 숙제가 떨어졌다.

야, 한글날 노래 외우제? 함 불러 봐라.

노래를 아무래도…….

예 말고 무슨 토를 달아! 한글날 노래도 모르나.

아니, 원체 노래를 못하는 음치…….

그만들 두지!

그때 또 한 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최고참 문 병장이 등장했다. 전역을 겨우 일주일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노래 배우자, 됐나?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돋았네~

난데없이 그들은 목청을 가다듬어 음악 수업을 했다. 문 병장은 분명 테너인가 바리톤인가 싶었다.

 

이제 나도 뭔가 들어보자! 노 일병, 문자란, 한글이란 무엇인가 연설 한 번 해봐라. 구해줬음 갚아라! 문 병장님의 명령이었다.

아뿔싸. 그것은 더 어려운 숙제였다. 그럴 것이 수업 때 발표라도 걸리면 미리 준비해 간 발표문 읽는 것도 우물거렸던 그가 준비는커녕 갈피를 잡을 시간도 모자랐으니까. 그렇지만 군대 내무반에서 머뭇거림이란 존재하지 않는, 태어난 적이 없는 단어였다. 좌중을 애처롭게 둘러보아도 문 병장 같은 흑기사가 또 나올 리 없었다.

저, 문자라는 것은 소리를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한민족의 소리를 기록합니다.

엉? 제법이네! 계속하라우! 선임들은 그를 놀려댔다.

그러니까 언어란 말과 글이라고 할 때, 한글 창제 이전의 우리민족의 언어는 소리말뿐이었다가 한글로서 비로소 글이 되어 완전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어 말소리를 시공간의 제한 없이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시공간 제한 없이 전달? 편지도 쓰고, 써서 후세에도 남긴단 말이지. 야, 미주, 국문과야 뭐야? 골치 아픈 사학과라 안했나. 계속!

저,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말을, 단어를, 창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가슴이란 문자가 있었고 아프다는 문자가 있었는데, 가슴이 아프다 가슴을 앓다 그러다가 가슴앓이 이렇게 단어를 만들고. 안 보이는 것도 보이게 만들고, 아름다움이라는 것, 보이지는 않지만 문자로는 남고. 그리고 가끔은 귀한 문자들이 되어, 감동적인 글이 되어 우리들에게 미적 향수를……

우와, 한글날, 봐라! 한글날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국경일이 아니다 그 말이다. 한글날을 엎다니, 멍청한 놈들! 인간이란 게 높은 데 올라가면 더 멍청해진다. 땅이 중요함을 모르게 되니까. 땅이 안 보이니까. 땅이. 문 병장이 모처럼 길게 말했다.

그는 우물쭈물했던 몇 마디 말로 문 병장님께 어쩐지 보답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잘 해! 너 잘 해 낼 거야. 병장님은 말없이 말했다. 이번에는 뒤통수가 아니라 어깨에 가만 손을 얹어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문 병장과의 마지막 교류였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지, 촌스럽게 신파조 넋두리를 되뇌었다. 소리 없이. 숨소리도 없이.

 

이별의 선물이 가능할까. 흔히 고참들이 나갈 때 군팔을 모아서 주기도 했었다. 군팔은 밖에서라면 600원이나 하는 담배 88라이트를 말한다. 군대에서 배급받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88디럭스도 한라산도 밖에서 700원 하던 때였다. 입대 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던 그도 조금씩 물들어 갔는데, 태생은 아닌 듯 했다. 냄새도 독했지만, 담배를 피우는 자세 그 자체가 어색하고 잘 안되었다. 담배를 피우는 남자, 가끔은 멋진 아버지들에 대한 기억이 있는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따라서 담배를 즐길까. 그는 생각해 보았다. 어떤 형식으로나 어른 남자 아버지라는 모범이 없는 그로서는 모범이 그리웠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어떠한 선물도 징표도 없이 문 병장님과 이별했다. 겨울이 오며 상병이 되었다. 그렇게 1991년 군 생활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고향, 할머니들과 어머니만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했다. 그때의 할머니들은 할머니들끼리였다. 왜 할아버지들은 없었을까. 동네에 드물게 할아버지들이 있었지만, 그, 승욱의 주변에는 할머니들 그리고 어머니만 있었다. 그 할머니들도 이제는 없다. 고향에는 어머니만 있다. 그가 그리는 것이 고향이고 어머니라면, 그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야 마땅했다.

고향으로 가서 살까, 그는 고민해 본다. 이 37㎡ 방은 1인 가구용이다. 아내의 1박 자유부부 선언에 경악을 했다가 풀이 죽은 친구가 찾아오는 용도는 너무 가끔이다. 이 넓이의 방은 결혼은커녕 연애도 할 수 없게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어쩌다 잠시 마음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은 이 좁은 방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 그녀들이 조신해서일지 그들에게 희망이 없어서일지는 모를 일이다. 그녀들 역시 고만고만한 방에 살거나 해도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없다.

강의도 끊어진 지금, 그렇다고 학원가도 쓸쓸한 지방도시에서 일타강사의 기회도 없을, 이 무용지물과도 같은 생활을 이렇게 이어갈 명분도 없다. 올해도 이른 김장을 해서 들고 오셨는데, 오피스텔 비번을 잊어서 어리둥절했다는 어머니는 어쩌면 불안하기까지 하다. 왜 전화라도 하시지, 라는 걱정 반 핀잔에는 전화 생각을 못 하셨다는 더 놀라운 대답이 왔다.

어머니는 온전하신가. 이 뉴스 속의 할머니, 불으한 어리니 한태 성금을 보내신 할머니보다는 분명 젊은 나이다. 그런데도 곰곰 비교해보니 어머니는 최근 어딘가 총명함에 금이 간 것 같다. 홀아비 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면…… 이라고, 그를 키우실 때 단호하고 강했던 어머니가 어딘가 무디어졌다. 이 뉴스 할머니는 짐작컨대 무한 고생을 해 오신 것이 틀림없는데, 정정하고 강단이 있다. 눈뜬 멩인이라 글노자복지관 한글공부로 배운 글이라 말이 안 대는 개 있서도 라고 썼지만, 참 잘 쓰셨다. 인생길 마주막에 조훈 일 한 번 하는개 원이라…… 빈 병을 모아 팔면 돈이댈 것 같타 …… 파란는개 십원도 안 쓰고 12월까지 모운 개 15만원 내 아이들 용돈 조금 주는거 았계 쓰고 15만원을 보터 30만원…… 동장님이 잘이 해 라고 써서 맡겼단다.

 

글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글 배워 처음으로 쓴 편지글을 떠올려 보면서, 글을 많이도 오래도 배운 그는 침묵한다. 부끄러움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잠은 내려오지 않고 천장에서 그를 노려본다. 먼 데, 아니 가까이에 어머니가 보인다. 혼자서 잠든 어머니는 자꾸 뒤척이신다. 말 좀 해 봐요! 왜 꼭 거까지 내려갈라고 했었냐고! 뭣이 당신을 불러 갔어! 왜! 거긴 남쪽이잖아! 바다잖아요, 시퍼런 바다!

이런 밤 어머니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 50년이 넘은 오늘도, 아버지가 떠나시고 50년이 넘은 오늘도. 어머니는 1973년 1월 25일 아침 일찍 목포에서 조도 가는 배를 타셨던 아버지의 기일을 음력으로 12월 20일로 치신다. 채 5년을 함께 살지 못했고, 50년을 넘어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침묵이 된다.

어머니는 성당에서가 아니라면 거의 목소리가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소리들을 다 멀리하고 살아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신 주~ 시작 없으시~며~ 마침도 없고~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말소리에 비해 노랫소리는 높고 맑다. 그만 아는 비밀이다.

 

어머니, 아버지이……. 그는 어두운 천장에 대고 불러본다.

얼굴 없이 존재하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성스러움은 무엇입니까. 배워도 쓰임이 없는 저의 삶은 무슨 의미입니까. 투틸로는 부끄럽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이. 공기 중에는 어떤 소리도 어떤 움직임도 없다. 회색의 침묵만 내린다.

................................
전남여고문학 10호, 5월 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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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3. 6. 18. 06:51

[짧은 소설] 침묵 2  -  4                                                                                             

 

4이다.

4월이다, 4월.

 

그는 4월에는 기지개를 펴야하지 않을까 벼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래도 4월인데, 봄이 한창인데. 애초에 추위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것은 아닌데도, 봄마다 유혹에 빠지곤 한다. 그래 입이라도 떼어 보자.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이 입에서 시작되었지 않은가, 어, 어엄, 엄마.

침묵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언제 적부터였을까. 말하고 싶지 않았을 때, 말을 할 수가 없었을 때, 말을 강요받았을 때, 억지로 입을 열어야 했을 때…… 어느 것이 먼저라고는 기억도 못한다. 전문가들은 선별적 함묵증이라고 덮어씌울까. 아이들도 아닌데. 전문가들을 만나는 일은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튼 아예 말을 잃은 느낌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오랜 병이 아니면 치유가 될 수는 있을 터. 침묵의 치유 – 오늘의 화두이다. 그는 컴을 연다. 글을 써야 한다. 시를.

 

침묵의 말……

이건 아니다. 말이 멈춘 자리 다시, 언어라고 차라리 학술적인 표현을 써 보자 – 침묵의 언어 / 언어가 멈춘 자리……

 

띵똥. 띵똥 소리가 난다. 이제 막 집중하렸는데, 참. 그는 일어서려다가 앉는다. 무슨 상관, 이만 일로 문을 열어 정적을 깰 수는 없다.

 

 

언어에 있어서 침묵은 말의 반대급부이니, 정반합 논리로 가자면 말로부터 시작하는 거다. 아니, 이것은 시에서는 멀어진 화두. 말로써 소통하는 인간들 사이. 말의 본질은 무엇일까. 말이 없다고 가정하면, 인간에게 문화 같은 무엇인가가 없었을까. 눈짓 손짓 발짓으로도 소통은 된다. 요 몇 년 사이 수화 잘하는 능력자들은 텔레비전에서도 한 몫을 한다. 고마운 존재이면서 방송도 탄다. 방송을 탄다고 하고 보니, 방송은 걷는 사람 옆에서 차를 타는 것처럼 대단한 일인가 싶다. 그는 웃는다. 수화도 언어다. 상대적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정착된다.

 

생각이 정착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들은 인간의 본질에 영향을 준다. 가만, 인간에게 본질이 존재할까. 인간이란……

아서라, 내가 무슨. 그는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의 요점은 침묵을 깨고 시를 쓸 것인가, 쓸 수 있을까 이다. 기존 언어의 질서에 적응하는 시에서 벗어나고픈 욕구, 그것에 매달리는 동안 스스로 침묵이 강요되었다. 이제 또 인간의 본질이니 실존 운운으로 생각이 미끄러지면 또 헤맬 것이다. 그런데 또 미끌려 들어간다.

인간의 실존 – 실존이란 말은 본질과 무관하다. ‘그냥 있다’는 말이다. 그 말 ‘실존하다’를 그냥 있는 정도를 넘어서 ‘바깥에 서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한 아무개의 책을 아무개가 번역했다. 프랑스어를 알면서……

 

띵똥. 아니 무슨 띵똥 소리야. 짜증이 그를 압도한다. 뭡니까? 라고 소리칠 기세로 일어서려다가 멈춘다. 이 시각 대낮에 무위도식자의 모습을 들키지 말자. 글값이 쌀값에 미치지 못함에 부끄럽다. 시인 축에 들기는커녕 강의 시간마저 달랑거린다.

 

 

프랑스어를 알면서 이런 책이 번역되어서야 듣게 되다니! 그러므로 너는 학자가 아니다. 학자도 아니다. 그러니 강의 차례가 오겠는가. 시를 쓰자. 시를 쓰는 데 자격증은 따로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시는 보다 고차원적…… 에라. 손에 들어온 책을 먼저 읽어야지. 책 강박증이다. 책들을 어찌 다 읽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다르다. 들은 듯 아니 들은 듯, 『탈합치』 그것 끌리는 책이다.1*

 

가만. 바깥에 서면, 안을 버리고?

다시 시처럼 시작해 보자. 바깥에 선다. 안을 버린다.

이게 무슨 시인가. 머리만 복잡하다.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적응의 과정을 성장이라고 배웠던 문화는 무엇인가. 안에 들어가 적응하며, 사다리 꼭대기로 올라라! 사람이 태어나서…… 아무렴! 그러다가 이제와 팔꿈치 문화를 폄하하면? 옳아, 경쟁에 적응하지 말라, 드디어 성선설이 득세하는가. 어, 것도 아니네.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자기세계의 바깥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47-48쪽) 이 말은 도끼다. 카프카가 말한 의미에서 도끼다.2*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이전 상태에서 단절 없이 탈-합치하는 것이다. 우리를 삶 속에 유지시켜 주는 것은 필연적이고 계속적인 탈-합치다.(42) 무슨 말인가.

나, 내가 나를 이루어가는 적응도 멈추라고? 자기 적응에 균열을 내라, 우선 나를 나로부터의 일치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관성대로 살지 말고 진짜 실존하는 삶을 살라.

 

 

관성 – 아담과 이브의 관성. 지상낙원의 아담과 이브는 합치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실존하지는 않았다? 비로소 사과를 먹음으로써, 그러니까 완벽한 기존의 질서에 균열의 생산력을 들임으로써 바깥에 서서(27) 실존을 시작했다고? 낙원에서 추방되고 규탄 당함으로써 곧 실존에 진입한 것이다?

관성을 존중하지 않고 어찌 사회에 적응하며 중심에 서냐고?

시는 다시 날아가 버린다. 에라, 공부다. 이것을 예술의 근원을 묻는 사유로서 보자.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순응과 안락함 대신 삐딱함을 택한 예술, 이를테면 피카소의 《시골사람들》은 인간이라면 기네스북의 수명을 다 하고도 넘었다. 모든 면에서 적합성을 불가능하게 하며 더 정확히는 적합성의 무효화를 드러내려는 시도(21), 그것이 어쨌다고! 그것의 융성도 이미 낡은 터. 예술에 관해서 말하는 자 누구냐. 오늘날 예술을 말하자고? 하필 4월에?

 

 

4월이다.

그는 운다, 울음을 터뜨린다. 내 시는 땅부터 말랐구나.

토마스는 성인 아퀴나스만 알았더니, 엘리엇이란 시인도 있었고,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이 정도면 잔인하지도 않다.

깨어나지 않는 영혼들, 영혼이 있는지 그건 알 수 없구나, 라고 그는 쓴다. 절망한다. 시가 아니다.

 

누군가는 4월에 죽음을 그래서 생명을 말하기도 한다. 머리와 팔 그리고 다리가 잘린 몸통만의 생명을. 「4월의 가로수」3*도 그 하나다.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 전기 줄에 닿지 않도록 /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 [……]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 이런 노래다. 아니다, 시를 노래라고 하는 것은 모독이다. 시를? 노래를? 둘 다 모독이다. 시와 노래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 시인은 훌륭하다. 하지만 나의 4월은 다시 침묵이다, 그는 침묵한다.

 

떠난 이들의 4월. 4월들.

세월이 가도 가도 잊힐 수 없는 그 참사의 대홍수, 방주도 없는 홍수에 묻혀 역사가 되어버린 영혼들. 멀리 타이타닉, 아니 제암리 교회, 제주는 또. 의령의 총 든 미치광이 세계기록 갱신자, 대구 가스 폭발, 다시 또 어두운 바닷물 속으로 끌려들어간 아리따운 영혼들. 뿐인가, 바로 가까이에서 떠난 이들, 만우절 아침에, 그냥 4월에, 또 4월에.

그는 생각한다. 시는 잊었다. 고아가 된 것도 4월이었지. 사람이 고아가 되는 것은 예고 없는 일순간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그 49재 안에 은사님도 가셨다. 몸도 맘도 완전히 고아가 되었었다.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도 ‘어, 그런가.’ 믿어주셨을 은사님. 너는 누군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믿을까. 어림없다. 그는 의심이 많다. 자신의 말에도 의심이 혹 덩어리처럼 엉겨 붙어서 내뱉지 못하는 존재다. 그것을 안다, 그도. 의심만 많은가. 좁아 터졌다. 좁아터지면 시야도 인생관도 좁다. 아는 것도 좁다. 박학다식해도 글을 쓰기 시작도 못할 터인데, 아는 것이 좁으니 시작도 할 수 없다. 더구나 시를. 많은 것의, 어쩌면 모든 것의 응축인 시 한 구절을 감히.

 

띵똥! 소리는 고집스럽다. 대문 께가 아니라 머릿속인가. 그가 반응이 없자 다른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인 더 애티튜드 오브 사일런스…… 침묵의 자세에서 영혼은 더욱 밝은 빛 속의 길을 찾으며……4*  어라, 침묵만이 답이다. 그는 침묵한다.

굳이 한 가지, 너는 너 자신의 본성을 표현해 본다. 우올 – 우와 올을 더해서 합친 것, 요즘 유행하는 축자다. 준말이라던가. 우물 안 개구리도 못된, 우물 안 올챙이. 올챙이로 살다가 갈 것 같다. 이것은 몇 안 되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올챙이의 시는 없다.

 

 

1. 프랑수아 줄리앙 저, 이근세 옮김, 탈합치, 교유서가 2021년. - 다음 ( ) 속 인용은 이 책에서다.
2.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라하, 1904년 1월 27일 수요일 (서용좌 역,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 , 솔출판사, 재출간 2017, 67쪽.)
3. 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문학과지성사 1983년.
4. M.K.Gandhi, TRUTH IS GOD, Chapter 18: Value of Silence.

 

--------------------
2023.5.   전남여고문학 9호, 301-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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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7. 10. 7. 01:08

2017. 9.2.

가을

........

 

가을이 시작되면서 유난히 생과 죽음이 겹친다. 당사자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많이 좋아했었던 이의, 전혀 관심 밖이었던 이의 설익은 죽음들이 마음을 스산하게 하는 사이로, 집안에서는 가까운 이의 피붙이의 생일들을 축하한다. 세상은 늘 겉보기에는 서로 무관한 일들로 포화 상태다.

 

다섯 개의 자잘한 국화분을 샀고, 황색은 피해서 하얀 색 둘, 연보라색 셋을 골랐다. 동네 꽃집에 주인이 없어서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고, 꽃값은 전화기 아래에 두라는데 찾지 못해서 메모지철 아래에 놓아두고 왔다. 바람에 쓰러진 다른 화분들 둘은 세워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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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08. 9. 1. 23:30

[한국소설 2008년 9월호]

번째의 죽음


                     

라우렌츠: 앉아서 써 봐. […]

여자는 질문을 받으면, 질문으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질문을 받으면, 즉시 대답해야 한다.

여자는 라우렌츠의 생각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는 심한 말로 라우렌츠의 문장을 끊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적당한 장소에서 말할 줄 알고 또 침묵할 수 있어야 하고 라우렌츠를 사랑하고 착하게 대해야 한다, 그가 비록 거칠더라도 말이다.

이걸 자주 읽는 거야, 알았지.

 


이 글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극중의 라우렌츠(남자)와 여자는 작가죠. 집에 들어앉은 여자는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결국 여자는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납니다. 글을 쓸 수 있었냐고요? 우여곡절 끝에 겨우 썼죠. 적어도 남자의 글보다는 훨씬 의미 있게 언급이 되는 작품들이었죠. 그러니 근 한 세기 전 서양의 이 작품이 여기에서 인용되겠죠. 


제 이야기를 할 차례군요. 나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얼핏 골빈 여자들에 속합니다. “적당한 장소에서 말할 줄 알고 또 침묵할 수 있어야 하는” 틀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죠. 더구나 순간의 감정에 잘 휩쓸려서 조급하다는 핀잔을 듣곤 하죠. 조급하다 - 그 말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그것을 하필 나와 가장 가까운 그가 모릅니다. 그는 나랑 생일이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남성들의 전유물인 이성과 합리성과 또 모든 명철함을 가졌기 때문에 늘 잘난 체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일찍 서로를 발견한 셈이지만, 마찰은 자라면서였죠. 중학교 때, 여전히 잘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거즈와 반창고를 대고 다니던 어느 날이었죠. 난생 처음으로 팔꿈치나 무릎이 아닌 속옷 깊은 곳에서도 피가 흐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란 어느 날, 그는 퍼렇게 날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소 비웃음을 머금은 채, 휑하니 돌아서 나가는 그는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빠져나가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여름날이었는데도 그가 떠난 자리로 창문을 통해 전해오는 공기는 얼음장 같았으니까요.


나: 이 첫 작품에 난 제목을 붙일 수가 없었어.

그: 제목이 없음 무슨 시. 제목이 없이 주제가 나오며, 주제가 없이 시를 쓸 수 있다고!

나: 처음이라서.

그: 넌 그냥 시를 쓴다는 폼을 사랑해서지! 생각부터 가다듬어야 했어. 생각이 있어야 글이 나오지. 글쓰기 과정은 단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문장구성과 단락 나누기 등에서…….


제목이 있을 자리에 “무제”가 뭐냐 라는 질책에서 시작하여 그는 정말로 내 첫 작품을 난도질했답니다. 그 버릇이 평생가게 된 거죠.


그: 자 시작해보자. 단어들을 준비해. 핵심단어들을.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을 것 아냐. 그것들을 문장으로 연결해 내는 거야. 문장의 유형을 결정해, 서사와 묘사를 구분해야지. 원인과 결과는 소설이라 해도 개연성을 위해 필수적이지.

나: 지금 시를…….

그: 담엔 소설도 쓰겠달 것 아냐! 개연성이라면 우연에서 필연을 볼 수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꼭 단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그러하리라고 생각되는 만큼의 가능성 말이야.

나: 참인 것 같은 거짓말?

그: 뭐 그 정도로 이해하든지. 논리학에서는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를 수량적으로 잴 수 있는 경우만을, 철학적으로는 확실성의 정도를 말하니까. 개연성은 어떤 논증의 전제와 결론 사이의 특별한 관계라…….


어렵사리 “개연성”의 고개를 넘었지만 아직 멀었죠. 그는 아는 것도 많았거든요. 문장들을 멋대로 자라게 내버려둬선 안 되지. 단락이라는 큰 그림을 구상해 둬. 섣불리 정의를 내는 것은 문학작품에선 금물…….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를 부렸죠. 그래도 난 그가 고시 쪽을 택할 것이라 믿었어요. 사법이건 행정이건 또는 외무이건. 어쩌자고 문과대학엘 진학했는지, 그건 지금도 모를 미궁이랍니다. 허영이었을까요? 뭐 정신적인 일에 탐닉한다는. 일직선의 성공을 얕잡아 보는 허영? 다음 몇 토막글은 우리의 숨 막히는 이야기랍니다.


*


독서


그: 독서로 우정을 깨긴 싫구나.

친구: 독서란 원래 우리 머리통을 깨부숴야 되는 거라며. 네 입으로 안 그랬어? 대단한 작가의 말이라고.

그: 건 지금 상관없고. 넌 그러니까 “반항적 인간”을 비난하는 거잖아.

친구: 그럼 넌 가차 없는 혁명제일주의를 단순무식하다고 내몰겠다?

그: 카뮈작품이 그런 말 아닌 것 너도 알잖아, 왜 억지야? 한 발 물렀다고 혁명 끝내자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 봐, 볼셰비키혁명의 정당성을 위해서도 그런 반항적 인간이 더욱 요청되는 것 아니었겠냐고.

친구: 언제부터 카뮈로 돌아섰나. 혁명 대신 반항? 부조리? 웃기시네. 극한상황에선 정당한 목적만이 정의로운 것.

그: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믿을 순 없어.


이건 『정의의 사람들』을 두고 벌어진 틈이었다. 이런 대화는 흔했다. 난 사실 대학시절만 해도 그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충분히 지적이고 게다가 사려 깊었다. 섣불리 연애한다고 마음을 내놓지도 않았고, 이슈에 따라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데모에도 동참하지 않을 만큼 줏대도 있었다. 그가 정과 혈기에 넘치는 친구들을 잃어가는 동안에도 난 걱정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친구란 원래 남이고, 남이란 다른 존재이고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이 없는 점에서는 우리는 무척 닮았다 싶었다.


독서목록에 스따브로긴이 등장했을 때 친구들과의 상황은 몹시 나빴다. 친구 하나가 그를 사실은 말 뿐인 퇴폐적 스따브로긴에 빗대어 비난했을 때, 독서회의 우정은 송두리째 위기에 처했다. 항상 굿이나 보던 나의 생각으로도 그 부분에선 친구들이 좀 심했다 싶었다. 그가 얼마나 금욕적인가를 친구들이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기름진 맛있는 음식을 죄스러워 하는 것, 그가 검소한 차림을 중시하는 것들을 다들 몰랐다. 스따브로긴은 그에겐 상처였다. 그는 한 동안 정체성 위기에 빠졌다. 그는 누구이어야 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오히려 무신론의 상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던 끼릴로프에 가까운 결벽증의 인물이었다. 자아의지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회복불능의 행위도 불사하리라 믿은 끼릴로프. 하긴 그것은 그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어떤 인간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악령』은 우리들의 터부가 되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소설들 모두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냐고? 천만의 말이다. 줄리앙 소렐의 터무니없는 성공집착이나 애정행각은 물론, 레날 부인의 진정한 사랑도 도저히 알지 못했다. 에마 보바리의 충동은 차라리 저열하다고, 별 증오심도 없이 남편에게 비소를 먹인 테레즈 데께루의 무감각은 어불성설이라 간주했다. 난 소설들을 그저 읽어치우기에만 급급했다. 사람이 쓴 글을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못 참는 것에 불과했나? 책도 중독이 된다.


독서 때문에 그와 티격태격하는 것은 늘 일상에 속했다. 『죽음의 방식들』 3부작을 놓고는 한참 심각했다. 여자들이 남자들로 “인해서” 죽는다는 내 생각에 그는 화까지 냈다.


그: 뇌진탕과 폐렴이라는 사망진단은 뭔데! 세 번째 죽음은 죽음도 아니야, 승복일 따름이지.

나: “그것은 살인이었다.” - 이 마지막 문장은 뭔데?

그: 여자가 스스로 사라진 장면에서 어떻게 그 자구만을 고집해? 그만 왈가왈부하고 네 것을 써보라니까. 평생 주어 읽은 모든 것들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 있을 걸.

나: 악담은.

그: 악담이면 어때서, 바른 말이면 바른 거지.

나: 바르고 바르지 않고, 그게 그리 쉽나?

그: 내 말이 아냐, 그건 정설이지.

나: 정설을 누가 만들었는데? 것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을 것 아냐?

그: 정설과 사설도 구별 못해? 사설, 사삿사람의 의견이나 중요시하는 버릇이 어쩌자고!

나: 나도 사삿사람이니 그렇겠지.

그: 글을 쓰겠노라 늘 꿈을 꾸는 건 뭔데? 마냥 읽어대기만 하고, 여차하면 이런 저런 글귀나 끄집어내고…….


그렇게 무작정 읽은 것은 사실이다.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하고서야 내 글을 시작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막연한 준비심에 불과했을까? 부수적인 효과도 짭짤했는데, 그땐 책 좀 읽는 애라면 괜찮은 프리미엄이 따라붙는 시대였었다.


글쓰기


정작 글다운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는 신들린 듯이 진력을 다했다. 하지만 학보사에서 거절당했고, 신춘문예도 두어 번 탈락했다. 그러더니 또 후다닥 글쓰기를 중단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카프카도 아니라면 누구도 더는 글을 써서는 아니 된다고. 이 무슨 황당한 궤변인가. 그래서 내가 슬며시 끼어들기 시작했다. 박경리, 박완서는 왜 아냐? 수지와 수인(오목)의 이야기만으로도? 라고 반문하면서. 나는 어쩌면 그의 탈락을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데올로기에 충실했을 그의 글은 이 시대의 문단에서 한편으론 요청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두들기는 문은 정반대의 색깔이었으니 말이다.


색깔? 그런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런 빛도 아닌 회색이었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흘렀다. 밥을 해결할 직업도 갖게 되고, 연애(?)랑 결혼도 하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오늘 하려는 이야기와 무관하다. 생략법은 특히 그가 좋아한 화두였으니, 그 또한 이런 생략에 찬성일 것이다. 진부함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보고를 생략한다는 것.


어쨌거나 생이 더 이상 진부해질 수 없을 만큼 아스팔트바닥 위를 맴돌고 있을 때, 내가 옛날의 종이들을 헤집어 내기 시작했다. 책상으로 썼던 낡은 교자상아래 밀려들어간 먼지투성이의 원고들은 가장자리가 열 번 백 번의 물걸레질에 밀려 짓이겨 졌지만, 용케도 누렇게 뜬 내용물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나 치기어린 글들인지 쑥스럽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것들. 누구라도 제 글을 읽는 것은 고문이다. 어쩌면 살인이다. 내 경우엔 심했다. 어떤 글에 비해 보아도 내겐 독창성이라곤 없었다. 너무 많이 읽은 탓에(?) 못 쓰는 나. 그가 옳은 것 같다.


처음엔 내가 빛바랜 원고지들을 넘겨보다 지쳐서 일이 그만 시작도 없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세상 따라서 완전히 생경한 원고지, 줄도 없고 마음대로 변하는 백지화면에 글을 “삽입/수정”하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우선 원고지에 대고 훈수 놓던 일을 못하게 되었다. 내가 <내 글>을 암호로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신나는 세상.


그가 또 모르는 일로서 이 이야기를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 고백할 것이 있답니다. 나는 누군가 내게 보낸 보배 같은 글귀들을 싸구려 감상적 픽션에 섞어 짜 넣고 있었죠. 곧 사라져버릴 듯이 연필로 쓰인 것, 또박또박 예쁜 팝글씨로 쓰인 것, 편지지도 아닌 화면으로 도착한 것, 더 작은 지우개만한 화면에 떠오른 것들까지, 순간 되살아나는 타인의 글들. 타인의 글을 내 글에 섞어 쓰는 짓거리. 그 짓에 대한 가능한 변명은 오직 하나,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그 몇 짧은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내가 죽은 다음에까지도 세상에 흔적으로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악마다. 그 조각글들의 주인에게는 악마다. 나는 소설을 시작한다면서 마음 한 구석으론 기껏 일기를 쓰는 수준에 머물었나 보다. 픽션 또는 팩션에 관련한 괴로움은 여전하다. 나는 물론 내 주인공을 창조하여 실존인물과 섞어 놓는다든지 해서 실존인물을 모욕하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실존인물의 한 작은 조각을 잘라내어 창작된 인물의 어느 부분에 끼워 넣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실존인물은 그렇게 됨으로써 생명 한 조각을 도난당하고, 창작된 인물을 독창성을 잃는다. 윈-윈 게임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 세상에서, 둘 다 망하자는 싸움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싸움


너 죽고 나 죽자! -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도 그건 그냥 하는 말이다. 마음속으론 ‘너 죽고 나 살자!’라고 싸운다. 그와 나는 죽자 사자 싸우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그가 좀 잘난 체를 하는 편이라서, 내 우정이나 사랑의 장면에까지도 끼어들곤 한다. 그의 충고가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의문이다. 이렇다 할 우정도 사랑도 쌓아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남편을 또는 아내를 버려두면서 까지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달려갈 인사가 있는가? 세상 친구들의 우정을 다 버리고라도 아내 또는 남편의 사랑에 매달릴 것인가? 어느 쪽도 경우의 수에 해당하지 않으니 모순이다.


쪽지의 글자들이 춤을 추듯이 살아난다. 퍼즐조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풍선처럼 바람을 먹은듯하다. 그것들이 다시 한꺼번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검은 바늘들이 되어 내 가슴으로 향한다. 그렇게 무수히 쏘아져 내게 꽂혀버린 바늘 끝에는 독이 묻었을까? 헤집어 뒤집어 보아도 보이지는 않으나 녹아버린 내 가슴 한 자락.


그가 읽을 수 있었다면 당장에 태클을 걸 것이다. 네 이야기를 쓰라는 게 아니잖아. 네가 창안한 이야기라야 한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암호 때문에 읽지 못한다.


헤어지기 30초 전, 어두운 밤길. 차에 타려는 동작으로 몸을 구부리려는 찰나, 그 손이 내 팔을 잡는다. 가볍게도 아니고 너무 무겁게도 아니게. 알맞은 무게로 알맞은 온기로 팔을 잡는 손. 5초, 10초…… 나는 그대로 좌석으로 몸을 내린다. 아 아까운 10초. 또는, 그 오른 손 바닥 2/3쯤이 내 왼쪽 손등에 머문 3초, 언젠가의 3분을 30분을 불러내는 마술……


걱정할 일은 아닌 것이 손의 주인과 팔의 주인, 또는 오른손의 주인과 왼손의 주인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15%쯤 실존인물이고 누가 30%쯤 창작인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그는 내 글을 보지 않고서도 내가 뭘 쓰고 있었는지 아는 게 참 희한하다.


그: 그 순간의 그 마음의 활자화를 당사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잊지 마. 넌 차라리 화석화될지라도 기념물을 원했으나, 마음이란 것이 살아서는 화석이 되는 게 아니지.

나: 알고 있어, 주어 담을 수 없는 물인 줄.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채로 누군가가 누군가의 산소가 된다면, 그게 그리 나쁜 일이겠어?

그: 아니지,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겐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중독.

나: 연탄가스 중독?

그: 그래, 일산화탄소.


일산화탄소중독.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두통에서 시작하여 현기증과 이명.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누군가를 생각하면 두통이 일고 현기증이 인다. 희미한 한 두 마디가 귓속에서 웅얼거림이 되어 이명 현상이 생긴다. 무슨 말인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 그 사람의 면전에서 홍조가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할 뿐. 일산화탄소중독 증세 중엔 홍조에 이어 발적도 따른다고 했다. 마음처럼 축축한 날, 이 두드러기가 발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호흡은 가늘고 불규칙해진다.


누군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부정맥이신가요?

(속으로만) 부정맥이라고요? 그래요, 가슴이 제 템포에 맞춰 뛸 수 있을 리 없죠.


코를 골게 되는 증상을 제외하곤 영락없는 일산화탄소중독 그대로다. 저체온도 그렇다. 누군가 앞에서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피어난 홍조도 아무 소용없다. 누군가의 냉기는 상상을 절한다. 몇 미터 밖까지도 유효하다. 평소의 체온을 유지할 수도 없을 만큼 그 냉기는 사람을 얼리고 만다. 그러다가 호흡곤란이 오는 줄도 모르는 사이 호흡이 멈춘다. 일산화탄소중독에서처럼, 정지된 감정은 호흡곤란을 일으키다가…….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 평소에 의사는 연령에 비해 많이 촘촘한 젖이 오히려 약간 불안한 형국이라 그랬다. 의례적인 정기검진에서 젖이 아닌 갑상선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1㎝에 못 미친다지만 기분 나쁜 이상한 물체임엔 틀림없다.


의사: 조직검사 소견은 괜찮습니다. 콜로이드갑상샘종이라고.

나: 괜찮다면, 수술 그런 것…….

의사: 아 그 염려는 안하셔도 되겠습니다.


이듬해 봄엔 간헐적이지만 참을 수 없는 두통이 계속되었다. 고개를 숙여 밥상을 내려다볼 수도 없었다. 검사는 아프고 길어만 갔다. 접형골이상정체낭종. 두통은 간헐적이지만 멈추지 않는다. 또 한 해가 가도 통증은 여전하다. 서울로 검사를 옮겼다. 똑 같다. 곧 죽는 건 아니란다.


다시 이태만의 초봄, 무서운 꿈에 놀라 종합검진을 받기로 했다. 갑상선기능저하. 위가 가진 대여섯 가지 병적 증상. 담낭의 용종 두세 개. 간의 물혹. 왠지 불안했던 췌장은 아니었지만, 우와! PET 검사를 했다. 죽고 싶지 않구나. 두 해 봄이 지났지만 그 상태를 유지한다. 매번 검사 갈 때마다 알 수 없는 냉대를 받는다. 예약용지를 가져가지 않았거나 무턱대고 이름을 대려다가 그런다. 종합병원에선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다. 병원의 나는 여섯 자리인가 일곱 자리의 숫자다. 숫자가 인격적인 감정을 가지면 곧 불쾌한 일을 당한다.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가고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한다.


가장 금기는 왜? 라는 질문이다. 그 답은 미리 나 있다. 아프니까. 아픈 죄인이니까.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린 죄인. 무엇보다 자신의 주인공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하는 죄인. 그는 병이란 건강을 해치는 생활습관 탓이라고 나를 나무라는 눈빛을 한다.


죽음


병의 다음 단계는 죽음이다. 물론 병과 관련 없는 죽음도 더러 있다. 대량죽음들이 그렇다. 예기치 못하기로는 교통사고가 가장 흔한 죽음이고, 아니 자연재해도 있다. 쓰나미와 지진들. 그건 내가 감히 기술할 범위를 넘는다. 그 의미와 무의미를, 그 우연성과 필연성을 기술할 위인들은 따로 있다. 글을 쓴다고 다 같지는 않은 법이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그렇게 말한 위대한 작가가 있었다. 벌써 200년도 전에, 그것도 스물 몇 살에 쓴 작품 속에서 그런 말을 했다. 그러니 위대함의 크기는 글쟁이들 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렇게 말한 주인공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실연과 자살이라는 세기적인 유행의 틀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정말 200년쯤 지나서도 지치지 않고 죽음의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우리가 정말 심하게 싸운 건 앞에 말한 『죽음의 방식들』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 여자는 뇌의 부상으로, 다음 여자는 폐렴으로 죽는다. 처음 여자는 정신과의사인 남편과의 불화와 증오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웃음, 부드러움, 기쁨의 능력들을 박탈당한 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을 받았다고 느낀다. 여자는 이전의 다른 여자들이 왜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을지 놀라워하면서, 자신이 세 번째 아내로서 자신을 수정해가는 일에 더욱 놀란다. 결혼은 양성간의 투쟁이다. 아랍 어딘가를 거치는 힘든 여행 중에 여자는 뇌를 심하게 다쳐서 죽는다.


나: 그건 단순한 뇌진탕이 아니야. 죽음으로 “밀려간” 것이지.

그: 그러니까 일부러 넘어져서 뇌를 다쳤다고?

나: 생각해봐, 이건 패러디야. 같이 살다 헤어진 유명작가의 유명작품에서도 아리따운 여자애가 그리스여행 중에 뇌를 다쳐서 죽지 아마? 여자는 어린애 같고 그러니 열등하고, 그리고 죽는 거야. 너흰 실제로도 작품에서도 여자를 죽인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그: 그럼 두 번째 여잔 어때? 폐병을 남편인가 애인이 옮겼어?

나: 그건 아니지만. 애인이란 작자가 여자를 발가벗겨 작품을 썼으니 그게 간접살인 아냐? 그것도 “영원히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성”이길 바라는 남자들의 헛칭찬에 노심초사하는 미숙한 여자를. 여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는데 남자들은 여자를 문자화한다면, 대상화된 여자는 연인에 의해 “도살된” 것처럼 느낄 밖에. 자기 고유의 역사를 박탈당한 채 한낱 소재가 되어 대중 앞에서 진열되고 있는 것처럼. 그 기분에 공감이 안 돼?

그: 그럼 처음 여잔 정신분석가인 남편이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 그것에 가장 상처를 입었단 말이야 참? 작품 이야기 말고 한번 가정해 봐, 여자들은 만일 피부과의사인 남편이 실험적으로 젊어지는 시술을 해줘도 그렇다 할 건가?

나: 난데없이 피부과는? 픽션과 사실을 혼동한다고 나를 나무랄 땐 언제고!

그: 그 부분 취소할게. 이제 넘어 가자.

나: (어라, 양보할 때도 있네!) 좋아, 세 번째 죽음을 “살인”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또 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세 번째 여자는 M이라는 이름을 가진 확실한 제 자신 속으로 스며들었잖아. 이름도 없이 “나”라던 여자는 M에서 빠져나왔던, 비정상적으로 감수성이 많은 여성성이었을 뿐이야.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작가. 그런 여자가 이제 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제 자신, 이성적인 M으로 되돌아갔을 뿐인 것. 여기서 살인이라? 게다가 네 진짜 문제는 뭔 줄 알아? 이 작가의 죽음마저 세 번째 소설의 죽음 넘어 네 번째 죽음이라 떠드는 것이지. 꼴페 나부랑이들!

나: 꼴페? 꼴통페미니스트는커녕 그냥 페미니스트도 못된다!


다만 내게서 창작이란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이다. 나는 그 네 번째 죽음을 흉내 내기로 했다. 세 죽음의 작가가 그 세 번째 죽음을 실 인생에서 실연했듯이. 그가 끼어든다. 아니지, 그 여잔 골초였어.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다 불을 낸 것이라니까!


나는 흉내보다는 패러디를 준비한다. 그렇담 그가 사라져야 한다.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는 나를 무시하면서 군림해 왔고, 나는 그에게 종속되어 그에게 결정권을 유보한 채 공존해왔다. 그를 사라지게 하는 일에 내가 실패한다면 남은 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다.


다른 이야기 하나. 교도소에 선행(?)을 하러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교도소에는 일반인의 예상대로 남자수인들이 훨씬 더 많단다. 그 친구가 이야기하기 전에도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 살인 등 중죄인 비율은 예상을 뒤엎는단다. 남자죄수들이 살인자일 비율을 그냥 대충 10%도 안 된다고 한다면, 여자죄수들이 살인자인 경우는 그 몇 배란다. 살인자 수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상과는 너무 다르다.


친구: 걸 여태 몰라? 여자들은 가정에서 대개는 억압을 당하는 관계에 놓여 있잖아. 부당한 일들, 억울한 일들을 참도록 길러졌으니까. 헌데 쥐가 완전한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지 않았어? 극한상황에 내몰리면, 억수 밀리던 여자가 상대를 죽이고 만다는 것이지. 평생 기세등등했던 강한 종족을, 자신의 남편을, 애인을, 아무튼 가까이서 그녀들을 억압해온 강한 남자를. 


나도 여자다. 내가 연출할 죽음의 패러디를 분류하자면 자살보다는 살인의 가능성이 높다. 그는 언제나 옳았고, 언제나 강했다. 멋모르고 피아노연주의 추상적 음체계에 빠져들려는 순간에는 타인의 체계를 답습하는 무의미성을 강조하여 제동을 걸었다. 지하의 미술실에서 바다그림을 연습하면서도 행복했던 순간에는 구경하지도 않은 바다를 모사한답시고 그것도 덕지덕지 물감을 발라서 바닷물을 더럽히는 맹목을 조롱하여 붓을 놓게 만들었다. 소설책을 읽고 또 읽어 외우다시피 하는 밤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긴 긴 남의 나라 이름들을 외우는 바보천치 같은 짓을 책망했다. 이름이 대수냐고. 실존한 적도 없고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태어났을 뿐인 인물들의 이름이 대체 뭐냐고.


그래도 나는 때때로 소설의 인물이 실제 사람들 보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 오래 살아? 오래 산다고 착각하는 너 때문이지. 그건 오래 산다기보다는 그냥 환영이야. 살아본 적이 없는 환영.

나: 환영은 무의미한 거야? 왜 내겐 그 환영이 실제로 살았을 많은 사람들보다 더 실제 같을까? 내가 쓰려는 이야기도 실제 같을까, 환영 같을까? 실제 같을 때 오래 사는 걸까, 환영 같을 때 오래 사는 걸까? 내 말은 이야기가…….

그: 넌 아니야. 넌 안 되겠어. 내가 할게. 네 이야기를 내가 쓸게. 약속해, 꼭 쓰겠다고. 아무리 글을 쓸 시간이 없어도. 글을 쓸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네 이야기를 쓸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네, 내가 쓰겠어.

나: 왜 그렇게 선선히 봐주려는데?

그: 봐주고 싶어서가 아냐. 넌 안 된다니까. 이거 보아. 여기 네가 써 놓은 글들은 기껏 세 죽음의 양상이 무슨 학습과정처럼 기술되어 있을 뿐이야. 여전히 독후감 수준이네, 안 그래?

나: 정리해 본 거야. 그 다음에 이어서 내가 쓰려고, 네 번째 죽음 이야기를.

그: 아니 수십 년을 두고 싸워도 우린 아직 여기야? 남의 글 읽는 건 그만 하라니까. 네 뜻 가는 대로 글 나오는 대로 네 이야기만 창작하는 거야. 그게 안 되면 그만 두든지. 아이, 애초에 너랑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 넌 그냥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넌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이 암호였다. 우린 상대에게 그 암호를 말하는 순간 사라지게 될 운명이었다. 암호를 내뱉은 건 내가 아니었다. 여성성은 늘 도태된다. 네 번째 죽음의 패러디도 픽션에서와 같은 패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살인이었다.”


*


남편은 평상시처럼 늦은 저녁을 마치고 귀가한다. 아내가 저녁시간에 집에 없기는 드문 일이라서 의아했지만, 전혀 없는 일도 아니어서 그냥 씻고 쉬고 그러다가 시계를 본다. 메모도 연락도 없이? 한 밤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희한한 일이로군. 별 일이야.


이튿날은 처형에게 전화를 한다. 꺼져있다. 둘이서 어딜 갔을까? 점심이 기운다. 서둘러 아내의 흔적을 뒤진다. 허나 아내의 뒷방문은 닫힌 채다. 쓰다 둔 메모지들, 원고지들 때문이라며, 아내는 외출하려면 늘 방문을 닫아건다. 연락이 된 처형이 흠칫 놀란다. 처형은 풀냄새와 흙냄새를 풍기며 들이 닥친다. 썬 캡에는 낮에 묻은 햇살이 아직 박혀 있다. 경쾌한 바지에 시원한 셔츠 차림이지만 귓불은 도톰한 풀빛 보석으로 묵직하다. 처형은 생각보다 덜 염려하는 표정이다. 얘가 또 병이 도진 거예요? 제부, 애초에 저런 작업을 말렸어야…….


다 저녁이 되어 방문이 안에서 열린다. 아내가 나타난 것이다. 한 5분 전에 방안에 들어갔다는 듯 당당한 표정이다. 왜들 그렇게 봐? 라고 묻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욕실로 간다. 외출해서 돌아왔을 때처럼 욕실로 직행한다. 그 버릇은 예외가 없다. 나설 땐 오히려 준비 시간이 짧지만, 귀가해선 화장실을 오래 쓴다. 한참 만에 말끔해진 얼굴로 소파를 기웃거리고는 곧 부엌으로 향할 태세다.


아내: 여보, 미안해요. 얼마나 잤는지. 언니, 공치다가 왔구나. 배고픈데 뭘 빨리 만들지?

처형: 나 일어서야 해, 이리 좀 와 앉아. 어쩌자고 제부 걱정하게 만들어?

남편: 어디 걱정 정도인가요? 어떻게 꼬박 하루를 게 박혀있어? 뭘 좀 먹기는?

아내: 그냥. 일은 진척이 안 되고, 주말이 되었나 싶고, 실컷 잠 좀 자려던 게. 사실 비몽사몽으로, 그래도 한결 개운해요.

처형: 그래도 그렇지, 방에 틀어박혀 있더라도 알리긴 해야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말없이 사라진 줄 알았지 모두.


*


내가 가끔 완전히 변덕인 것을 동기간의 정으로 언니가 제일 못 참아 한다. 혼란된 나와 그의 싸움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건 사실 언니뿐이다. 언니는 부엌으로 향하는 내 꽁무니를 따르며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언니: 그런데 너 누구야? 어느 쪽으로 갔느냐구, 그 장난 때문에 내가 다 아슬아슬해 죽겠다. 네 남편 좀 그만 괴롭혀라.

그(나): 남편을 괴롭혀요? 직장 다니고 깔끔하게 의식주 마련하고, 틈틈이 내 일하는 것이 누굴 괴롭히는 건 아니죠.

언니: 아 또 논리 시작이구나. 그럼 그쪽으로 가버린 게야? 너 그럼 제발 그대로 살아. 더는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나도 그쪽이 훨씬 편타. 반듯하고 질서 있고…….

그(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염려마세요.

언니: 왜 염려가 안 돼? 너 보면 뻔해, 네가 어질러 놓은 것. 사람이 방구석에 들어서 그리 지내다니. 종이쪽지들에 벗어던진 옷가지에 슬리퍼는 또 왜 이리 짝으로 굴러. 아무리 너 혼자 쓰는 방이라지만.

그(나): 됐거든요. 그냥 택배 방쯤으로 해 둬. 택배 받은 것, 택배 보낼 것……. 아직 완전히 내 것이 되기 전의 물건들이 쌓여 있는 창고.

언니: 게서 네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노라고 눈물 글썽일 땐 언제고! 택배는 또 무슨 암호야?

그(나): 그게, 물질이란 게 나의 소유라는 것이 좀 애매하죠. 내게 온 선물도 상자를 열어서 내가 나와 관련시킬 때만 내 것이 되죠. 기차가 서울 부산을 아무리 오가도 서울 것도 부산 것도 아니듯이 말이야. 내 밖에 있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택배처럼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것이죠.

언니: 뭐야, 그 궤변들 보니 정말 본업에만 충실하기로 작정한 것이구나. 잘 되었네.

그(나): 아니 뭐. 남아있는 저 작업들은 잘 마무리할 거요. 다음 일은 모르겠어, 저 창고를 저리 놔둘 일이 있을지. 회사일로도 벅찬 시간에, 저기 태반은 불필요한 일들이었고.

언니: 회사라고? (아니, 본업을 회사라고 에둘러 말하는 저 말투. 이 애가 이젠 그 애가 되었구나. 내가 걱정할 필요 없는 오달진 애.) 그래, 사람이 온갖 일을 다 할 순 없지. 너 좀 정신이 개운해진 듯하니, 하루 이틀 잠에 빠져도 좋은 구석이 있네.


뒷방 서랍 속에 갇혀버린 원래의 나는 사람들이 있는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언니는 염려와 다르게 당찬 내 현재의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안심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집을 나서는 언니는 나의 네 번째의 죽음을 서러워해주지도 않습니다. 나이고 싶은 나는 다만 네 번이 아니라 열네 번을 스물네 번을 죽었지만, 언니는 물론 아무도 더는 알지 못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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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창작노트)


글을 읽고 또 읽다가 겨우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은 부지중에 대선배 작가들의 글을 훔칩니다. 동서고금 위대한 작가들의 모범은 남성들이 태반입니다. 새내기가 만일 여자라면 더욱더 모범들에서 탈피하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형편없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것이고 싶어서죠. 그러나 오랜 관습의 눈에 비추어지는 자신이 초라해져서, 번번이 대부분의 남성작가들의 현란한 모범에 휘둘리고 맙니다. 언어의 구조조차도 합리적이거나 분석적인 가치로 해부된 세상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려는 일은 늘 좌절에 부딪습니다. 작가로 살자면 자칫 여성성을 포기해야할 위기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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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