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야기 하나 : 아웃사이더 『 검은 양들 』
한 사회의 "검은 양"에 관한 이야기
Heinrich Böll의 풍자적 단편 「검은 양들 Die schwarzen Schafe」은
가족 중에 실 인생에 실패한 삼촌과 일인칭 서술자 "나"의 이야기이다.
삼촌은 박식하고 즐거워 보이는 위인이지만 제대로 된 직업이 없이 빚만
늘려간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검은 양"이라 하는데, "나"는
그의 뒤를 잇는다.
"나"의 길은 삼촌과는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 잠깐동안 어느 가구공장
에서 일하기도 하는데, 그 곳에서는 화폐개혁 직후인 그 시기에 알맞은
전형적인 싸구려 감상적 물건들을 생산해 낸다. (실제로 쓸모있는 물건
들은 사장의 부재시에 노동자들이 필요에 의해 몰래 만드는 물건이다.)
"나"는 삼촌의 사고사로 인해 - 우연히 삼촌의 장례식 날 성년이 되어 -
그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원래 무산자였던 삼촌의 유일한 유산은
그가 복권에 당첨되어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겨우 몇 분간 소유
했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당장에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계획들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확실한 검은 양으로 간주하고, 그가 검은 양이기
이전에 대부가 되었었던 어린아이와의 접촉을 경원한다. 하지만 "나"는
가문다운 가문이기 위해서는 검은 양이 보존되어 가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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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양":
사전적으로는 "그의 사상, 성격, 또는 직업 등으로 인해서 다른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구성원"을 지칭한다.
사회적으로는 유능성Tüchtigkeit을 최고의 귀감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전통에 따르는 대다수의 독일인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을 지칭한다.
뵐은 평소 이단적인 것, 배척된 것을 문학의 주제로 해야 한다는 전제를 말함으로써,문학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척도를 제시했다.
통상적 척도에 의해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강하게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왜곡된 긍정성이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검은 양들 」의 표면상 주제는 적나라한 유용성에 대한 항의?
검은 양은 실제의 세계에서 우스꽝스러운 실패자를 가리키는 메타퍼인데,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이상형으로
그려져 있다.삼촌이 유용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이상형인 이유는 그의 자질에 있다. "나"가 보기에 "오토삼촌은
통달했다. 삼촌이 실로 능통하지 못한 분야가 없었다. 사회학, 문학,음악, 건축, 모든 것을." 그러나 가진 지식을 "환전
versilbern"할 수 없었고 대신 거의 15000마르크의 빚에 700명 이상의 채권자를 남기고 죽었다.작게는 차장에게
30페니히에서부터 많게는 "나"의 아버지에게 2000마르크까지 진 빚.
「 빚만 지고 죽은 삼촌이 어떻게 이상형인가? 」
여기에 소중한 의미는 바로 그 700명의 사람들에 있다. 평균 100마르크도 훨씬 못되는 돈은 재화로서의 자산이
아닌, 다만 구체적 삶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의 절대 빈곤기를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조금 슬쩍하기'를
경험했고 또 용인되었던 삼촌 세대에게는 '작은 돈' 빌리기는 다만 이웃 정과 인간애를 의미할 뿐이다. 삼촌은
700명으로부터 최소한의 사랑을 받았다는 시각이다.
"나"에게 이러한 시각을 부여하는 작가의 논리는 단순하다.
1) 누군가에게 빵이 없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빵을 주어야 하고,
2) 빵을 벌었으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것!
논리 1)
공평한 분배의 문제는 전후의 절대 빈곤기를 겨냥한다.
작가는 생각한다: "모든 새들보다 더 소중한"(마태 26: 6) 인간들은 마땅히 빵을
걱정하지 않을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작은 돈" 즉 빵은 나누어야 한다.
빵을 나눌 때 사람들은 인간이 된다. 괴테의 "눈물 젖은 빵"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인리히 뵐의 인간 역시 빵 냄새에 울 수 있는 인간이다.
논리 2)
억압된 노동에서의 해방 문제는 경제 재건기의 광적인 생산성을 겨냥한다.
"검은 양"은 바로 이 경제도약 단계에서의 소외자들을 이상화한다.
「 Outsider! 」
" 원래 사회학적으로 내집단 밖의 외집단에 속하는 이 국외자들은 집단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객관적 거리를 특징으로 하는 특수한 관여를 한다."
[참조] Colin H. Wilson의 『아웃사이더』(1956)
아웃사이더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깔려있는 속물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윤리적 존재로 승화된다.
다른 정상적인 동시대인의 유형, 예컨대 「Es wird etwas geschehen」의 사장에게는 "잠이란 죄악이다!".
그는 오직 "행동"을 해야 한다.이런 능력만이 중시되는 이 세상에서, 다른 계획이 있어 학문을 "당장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곧 검은 양이다. 물론 이것은 강단의 학문이나 교양보다는 실인생을 높이 사는 작가의 입장이다.
[하인리히 뵐은 반 부르주아적 동시에 반 인텔리적 성향을 지닌다.]
학문을 버린 "나"는 재능도 없이 작곡가가 되기로 했다가, 관상학, 정원사, 기계공, 선원, 교사, 세관원 등에 차례로
매료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직업적인 교육의 이수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것 하나 외부적 강요에서
시도된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은 매번 즐거울 수가 있다. "진정한 능력들을 환전 또는 직업적으로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에게는 선악의 피안에 존재한다. 돈 버는 능력은 인간의 조건에 속하지도 않는다. 현대 산업
사회의 필요일 뿐이다. 따라서 이 산업사회에의 적응은 검은 양의 시각에서는 "투항"이다:
"[...] 나는 투항했다 - 나는 일자리를 청했다. [...]
나는 결코 희생해서는 아니될 것, 나의 자유를 희생했다!"
그러나 "나"의 공장 체험은 인간을 보는 인식을 확실하게 해준다. 많은 것에 정통하고 지적이지만 그 지식을 써먹을
줄 모르는 삼촌과, 실제로는 수다밖에 모르면서 "스스로를 진지하고 또 예술가라 간주하는, 전혀 지적이지 못한"
사장과의 대비이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장이 극도로 무의미한 실존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능력없는 삼촌의 삶은
의미있는 실존이란 논리가 성립된다.
이 유용성에 관한 논쟁은 실로 엉뚱하게도『老子』11장을 상기시킨다:
"진흙을 비져서 그릇을 맨든데 /
그릇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창을 내고 문을 뚜러서 집을 짓는데 /
집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므로 있는 것이 좋음 되는건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
사회는 바로 이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할 때 비로소 쓸 만한 사회, 하인리히 뵐의 용어로는 "살 만한
bewohnbar"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부적응의 주인공들은 인습에 의한 습관적 반응이 아닌 진정한 행동을 꾀한다,
비록 현실적 성공에서 더디거나 그것을 포기하더라도. 투항을 거부하거나 투항을 후회하는 부적응자들, 이들은 뵐의
후속 작품들에서 소위 검은 양의 토포스를 실현한다. 그들은 사회통념상 기인으로,공공연히 나태를 보이며 이 사회를
무시하고 내면의 자유로 만족하는 수준을 유지한다. 그들은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 예로서, 오토삼촌의 건강한
젖먹이 같은 잠은 더없이 행복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극단적 성격으로 비정상적, 병적, 노이로제적인 인상을 주며,
결국 절망적인 아웃사이더일 뿐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절망적이 아니라,상식적 인간의
눈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들 부적응자들에 의해서 이 사회는 시험되고 미리 불합격 처리된다.
그러므로 오히려 동시대인들의 행동은 그저 환경에의 수동적 반응, 즉 순응의 생을 살아간다. 인간의 적자생존을
장려하는 경제적 정글에서 정상궤도 진입자들은 이 정글의 법칙을 받아들인 것이며, 그러므로 결국은 투항자들이다.
[참조] 하인리히 뵐의 「검은 양들」과 47동인의 정신. 『독일문학』, 서울: 한국독어독문학회 1997, 제 64집(38-3호), 230-25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