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이 된 인간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를 보다가
나도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
변기통의 물을 내리고
씩씩하게 지퍼를 올리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으로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화장실 벽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제일 싼 血 팝니다,
자본주의 만세!
화장실이 아니라 미안하게도 쾌적한 책상에 앉아서 시를 읽었다. 1970년생 시인의 절규였다. 그들은 젊은 날 왜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지 않는가, 쓸 수 없는가, 가슴 아파하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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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278년 여름 - 서기 1945년이겠지만 그때는 아직 단기였다 - 세상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세계사에서도 현대의 시작을 제2차세계대전의 종말로 보기도 하니 말이다. 엄청난 심적 물적 혼란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날 하늘에서 해방이 떨어지고, 배달민족은 자유로운 대한민국(임정)의 국민이 되었다.
정말 새 세상이 열렸다. 원수의 왜놈 쪽발이가 가더니 기독교 천사 날개에 실려 서양 문물이 밀려왔다. 아, 그리웠던 자유. 신체의, 사상의, 표현의, 언론의, 양심의, 결사의,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 자유연애, 자유부인, 자유당, 자유주의……. ‘자유’자가 붙으면 무엇이든지 최선의 가치였다. 그렇게 자유를 마시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젊은이들에게 자유를 제대로 넘겨주었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우리는 미국에서 배웠다. 케케묵은 삼강오륜이 낙하하는 속도에 신바람이 났다. 소위 아메리카정신은 청교도정신과 실용주의 그리고 개척정신을 말한다.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신교 신앙과 신의 소명이라는 직업에 따라 성실과 엄격함으로 임하는 경제관은 자본주의를 지원한다. 실용주의는 현실주의, 합리주의, 능력중심을 토대로 해서, 대중적인 것, 편한 것, 실속 있는 것으로 문화코드화 되어 현대 대중사회에 실용적인 ‘글로벌’ 문화로서 전 세계로 확산일로에 있다. 그 둘을 합한 화합물이 개척정신이다. 종교적 열정의 현실체인 미국중심 사고는 영광의 미국과 신의 소명을 받은 미국인으로서의 투지로 연결되어 서부를 개척하고 인디언을 몰아냈으며, 그 후로도 세계 도처로 무한정 진출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 온 세상 저열한 국가들은 미국을 배워나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실용주의 철학, 특히 실용주의 교육이 우리나라 ‘새 교육’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울대 총장 장이욱,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교육계 원로 오천석 등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사상을 들여왔고,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교육의 가치는 작용의 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 나타나는 유효성으로 매김 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결과로서 판단된다고, 오늘날 결과중심주의의 비극이 잉태된 순간이었다. 도덕 교과서에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은 ‘모로 가도 서울(대)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왔다. 사람들은 서울에 서울대에 최소한 그 비슷한 무게의 대학에 가서 성공했다, 돈과 권력의 합작 세상에서. 신화적으로 성공한 모두를 보라, 게으름부리지 않고 노력하면 다 그렇게 성공한다, 라고 믿고 살라고 가르치고 배웠다.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다. 끝나지 않은, 않을, 가난과 엄청난 자살률은 누구의 말대로 ‘민족적 게으름’ 때문만도, 열악한 환경 때문만도 아니라는 것을. 최고의 대학 카이스트에서 줄 이은 학생들과 교수의 자살이라는 비극은 시스템의 죄였다고. 인간을 자원으로만 간주한 결과중심주의의 경쟁시스템이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라는 단어를 ‘팔꿈치사회’라고 쓴다. 팔꿈치로 양 옆 사람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인 사회에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수많은 ‘루저’들이 제 못나서(?) 누리지 못한 몫이 이동된 것들이다.
최근의 통계들은 믿을 수 없는 수치를 믿으라고 한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고 있다.(크레디트스위스) 우리나라도 상위 1%인 50만 명이 전체 토지의 55.2%를 소유하고 있다.(국토교통부) 세계 최상위 부자 85명이 소유한 부가 소득 하위 절반에 달하는 35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다. 세계 부자 상위 1%의 재산은 전 세계 최빈층 절반의 재산을 더한 것보다 무려 65배나 많은 규모다.(옥스팸)
이 수치들은 우리를 슬프다 못해 절망케 한다. 절망타 못해 돌게 만든다. 이 탐욕이라는 이름의 바윗돌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윗돌은 무거운 채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머피의 법칙은 절대적이다. 멈출 수 있는 도를 넘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탐욕의 결과는 행복이 아닌 그 정반대의 참사임을. 진도 앞바다의 비극은 무대극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어느 대학교 교수들은 이번 참사의 근본 원인을 ‘물질적 탐욕에 젖은 나머지 생명의 가치를 내팽개친 황금만능주의, 편법과 탈법의 관행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온 결과중심주의에 있음’이라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를 ‘삶과 생명에 대한 철학 및 성찰이 빈곤한 반인간적 사회’라고 규정했다. 왜? 경쟁적으로 한 줄 서기만을 가르쳐왔으니까. 우리가 가르쳐 낸 것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자원’, 나아가서 품질 좋은 ‘상품’이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설마 ‘상품 인간’이 성장하고 있었다니! 사실이었다.
자유는 처음 황홀하게 맞이하던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단면에 걸쳐 자유와 윤리, 개인과 국가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밀은 『자유론』(1859)에서 ‘다수의 횡포’에 의한 ‘비주류 소수’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경고했다. 다수가 소수에게 여론과 관습을 내세워 ‘대세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1%의 득표율로 오불관 100% 전횡을 휘두를 수 있는 양당 구도에서의 대통령 권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와 연대감이란 소수에 대한 이해’(하인리히 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하는 개인 또는 단체의 자유라 하더라도,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수 있어야 한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사회와 국가의 간섭이, 규제가 있어야 한다.
화두는 어쩔 수 없이 - 아니 당연히 - 다시 참사로 돌아간다. 1,000명이 넘는 재외학자들도 참담한 성명을 발표했고, 제목은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에 울리는 경종’이고, 부제는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와 민주적 책임 결여가 근본적 문제’라고 적시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정철학의 전환이 없이 새로운 대한민국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국가 -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다른 생명을 소모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부여 받았고, 자급자족보다는 공동체 속에서 그 수고로움이나 위험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국가사회를 만들어냈다. 국가는 부여받은 권능으로 욕구의 조정이라는 어려운 역할을 해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어렵사리 끼어든 세계경제 속에서 세계적인 불황이 닥쳤고, 때맞춰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세계 경제가 자본주의로 통합되면서 국제적 경쟁이 가열되자 복지국가들도 흔들렸다. 이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비대해진 재정적자를 비판하면서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에 반대했다. 시장의 기능과 민간(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세력을 얻은 것이다.
곧 그 역기능이 들어났다.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그리고 재산권을 중시하다보니, 개인과 기업의 무한대의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가운데, 빈부 격차는 날로 커갔다.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이라는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미명의 예컨대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이란 곧 시장개방의 압력이었고,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개인 또한 무한대의 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에 내던져진 상태에선 적나라한 투쟁만이 살 길이 되었다. 사람 가치는 땅으로 땅으로 떨어져가더니, 아예 상품이 되고 말았다.
‘일단 내가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다 보니 평소 과잉보호가 있어서…….’ 1990년쯤에 태어났을 한 스타급 젊은이가 공항에서 팬에 대한 불손한 매너로 비난을 받자 반성문과 함께 내놓은 변명이 그랬다. 쭉정이들이야 공손하겠지만 주력 상품이다 보니…… 그런 뜻은 제발 아닐 것이다. 인간이 상품이라는 인식에는 애어른 구별이 없다. 지난 지자체선거에서 중후한 정치인 한 사람도 자당의 후보를 가리켜 ‘그 이상 더 좋은 상품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웠다.(데일리언 5.27.) ‘상품 인간’은 명품이 되어야만 대접을 받는다. 시장만능주의자들에게 노동과 노동자는 상품생산에 과정으로 참여해있는 부품에 불과하다. 온전한 상품이 못된 불량품 인간은 장기라도 부품으로 내다 팔아야 산다.
이 살인적 경쟁사회에서 인류에게 미래가 있을까? 경쟁은 이익과 승리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호배타적이고, 결과 지향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것은 물질과 대상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필요와 욕망의 경계를 망각한 인식의 오류 때문이다. 가치의 혼돈 때문이다. 이제도 우리는 젊은이들을 비싼 상품이 되기 위해서 공부만하라고 내몰아야 하는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한글로 풀어쓴 노자 『늙은이』 20장 첫 말이 떠오른다. ‘써먹기 부터하려는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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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프리즘>에 기고
다른 그러나 같은 PEN 문인들
2014.6.28.~29.
제16회 영호남문학인교류에 다녀와서
열여섯 번 째 영호남문학인교류 한마당 -
어언 대여섯 번 참가하는 행사이지만, 이번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스멀거리는 것은 기대감이 아니라 아랫입술이었다. 출발 전날부터 흉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이 부산 나들이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처음 이 교류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 1999년이라는데, 그때 무슨 심정에서 이런 행사를 시작한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대가 열렸다고는 하나 신한국당과 민주당 합당으로 태어난 한나라당의 견제 속에 편치 않는 세월 아니었던가. 어쩌면 금강산 관광의 시작으로 남북문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 그때, 요원한 남북통일에 앞서 가능한 동서화합이 더욱 그리웠을까? 아무튼 최소한의 이해의 숨통을 트는 일을 문학이 문학인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이 밑뿌리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PEN부산의 회원들과 문인들이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었다. 6월 28일 토요일 정오가 지나 모인 참가자들을 확인하고 출발 신호를 날렸다. 귀찮을 것을 알고서도 주민등록번호며 주소를 수합하여 여행자보험에도 들었고, 걱정할 일은 없었다. 열성 회원들의 열과 성으로 녹두시루떡도 찰밥도 노랗게 익은 참외도 실렸다. 수육에 머리고기에 결정적으로 알싸한 홍어무침까지 실은 버스는 주암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대충하고 나왔을 참가자들의 기운을 돋우었다. 마침 곡성에서 나오는 소설가 한 분도 함께 합류하여 간식을 즐기고 버스에 오르니 서른다섯 명 예정인원이 꽉 찼다. 늘 그러면서도 외지에 가면 길은 서툴러 해운대 학생수련원을 학생수련관으로 찍은 내비게이션 때문에 엉뚱한 곳에 도착하여 PEN부산 회원들을 오래 지치게 했다.
늦었지만 서둘러 상견례를 치른다. 밥보다 금강산이 먼저다. 환영사, 답사, 축사, 축사……. 기념품 교환. 무엇보다 부산의 ‘거리 詩’ 축제에 참여했던 PEN광주 회원들의 시화작품을 전달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동질성 그 이상의 정을 느꼈다. 부산의 시 축제엔 늘 광주의 시인들을 초청하고 있고, 매년 발행되는 『부산펜문학』과 『국제펜광주』에는 상호 문학작품들을 싣는다. 영어로 쓰는 영미문학도 하나로 이해하고 강의하는데, 하물며 같은 한글로 쓰는 영남문학과 호남문학이 얼마나 다를 것인가 말이다. 오늘 <희곡의 이해>를 강의한 김영관 교수(PEN광주 명예회장)도, <김수영 시인과의 추억>을 들려 준 PEN부산의 시인 김철 교수도 한 올만큼도 동과 서를 나누어 말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올해의 행사는 무엇을 막론하고 편히 즐길 수 없는 마음이다. 너도 나도 아픈 가슴으로 그것을 느낀다. 외람된 말이지만 답사에서 오늘을 사는, 살아야 할 인연을 논했다.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유순’ 그 40리 평방의 바위를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물방울이 뚫어내는 시간이 ‘겁’이라는데, 법륜 스님 말씀 가운데, 지구 안의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태어나려면 1,000겁의 인연이, 하루 정도 같은 일을 하려면 2,000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 하더이다. 그런 우리가 만났으니, 통한의 4월, 달력을 넘겨 찢고 또 찢어도 찢어도 아픈 봄을 두고도, 한숨을 내쉬다가 깜빡 들숨을 들이쉼으로써 살기로 결정해버렸으니 살기로 합시다. 그 비슷한 너스레는 편한 시간들을 갖자는 부탁의 다른 변형이었다.
우리는 함께 식판을 들고 섞이어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니 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술이 빠지랴. 술술 넘어가는 술에 술 못하는 모범생들은 분위기를 마신다. 이어지는 멋진 자작시 낭송들, 아름다운 노래도, 다른 장끼자랑도 빠질 수 없다. 전문 음악인을 능가하는 기타리스트를 내놓는 부산, 뒤질세라 전문 성악가를 놀라게 할 가수를 내세우는 광주……. 그렇게 따뜻한 저녁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송정, 밤이 내려앉은 검은 바닷가에선 바다가 없어 늘 바다를 그리는 광주사람도, 바다에 물린 부산사람도 구별이 없었다. 젖은 모래 위에 저녁상에서 남겨온 비닐봉지 속의 안주도, 이름 할 것 없이 섞인, 모래까지 섞여 마시는 술도 달콤하기만 했다. 남자가 부르는 이미자도 명가수의 소프라노도 바리톤도 환영이었다. 기계음에서 해방되어, 파도 소리 반주더러도 ‘시끄러봐’라고 우쭐대면서.
날이 밝자 짙은 바다내음의 미역국에 도시락반찬이 울컥 생각나는 계란말이에 아침을 먹고 ‘공부’를 떠났다. 친히, 만기침람의 의미가 아니라 그저 넘치는 친절함으로 광주 버스에 오른 부산 회장은 아뿔싸 안내원이 된다.
욜로 가입시더, 욜로 욜로.
부산 회장님이 아저씨, 기사님 하다가 기사 선생님까지를 들먹이며 안내해 간 곳은 수많은 멋진 다리들을 지나 감천문화마을과 부산민주공원이었다.
감천문화마을 -
얼마나 대단한 문화가 숨 쉬고 있는 곳일까. 부러움 반 호기심 반 찾아간 곳에는 문화가 아니라 아픔이 있었다. 그곳이 간직한 역사는 아픔이었다. 관광 상품으로 알록달록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베어나는 것은 슬픔이었다.
옥녀봉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산자락에 빼곡히 늘어선 계단식 집단거주지. 산비탈을 이용하여 절대로 뒷집에 해가 가리지 않도록 지어진 주택들에는 굳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벌써 한 세기 전 1918년 조철제 선생이 증산사상을 기반으로 시작한 태극도 신자들 수천 명이 고개 주변에 집단촌을 이루었던 것이 시발이라고 하니 특수한 종교심에서 서로의 해님을 배려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살아 있는 마을이 전시장이 되었다는 생각은 마음 한편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특이한 모습들이 외지인을 반긴다. 전영진 작가가 올려놓은 <사람 그리고 새>라는 작품은 추녀 끝에 새들인지 사람들인지 고개를 내밀고 앉아있다. 그래, 사람도 때론 날고 싶어……. 주민들은 개성 있는 색채감각으로 집단장을 했고, 멀리서 보면 색종이로 접었거나 고무지우개를 알록달록 맞춰서 가지런히 세워둔 집에서 산다. 가까이에서 보면 빨래 줄에 널린 빨래들 하며 배시시 살아있는 화분들이 삶을 말해준다. 용두산과 도심이며 항구가 다 내려다보이는 <하늘머리> 전망대에 오르니, 아, 따가운 햇살에도 상쾌한 바람이 맞아준다. <한지의 집>에서는 수공예품을 사느라 한눈을 팔고. <평화의 집> 등의 이름을 가진 골목길 프로젝트를 따라 가노라면 몸을 틀어야 통과할 수 있는 길이, 누군가는 정말 통과할 수 없을 길이 나온다. 전체가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때문에 PEN부산 사무국장은 아예 혼자서는 다니지 마라, 끝까지 가보려고 하지마라, 미리 경고를 준다.
이어진 부산민주공원 -
공원 입구 비스듬한 잔디광장에는 ‘민족통일대장부’와 ‘민족평화여장부’라는 이름의 장승들이 서있다. 이 장승은 진도군민들이 부산시민의 민주정신을 기리며 만들어 보낸 것이라 하니, 영호남 교류는 여기에도 있구나……. 흐뭇한 마음으로 <추모조형물>을 보러간다. 50미터가 넘는 대형 조형물로, 민주항쟁의 연속성과 현재성을 부각하는 상징물이자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들을 기리며 분향하는 곳이란다. 한참을 더 올라 <민주횃불>이 있는 곳, 그곳엔 수많은 반사 재질의 작디작은 조각들을 내부에 넣어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이름 없는 별들을 형상화 해냈다고 한다.
거짓말. 거기엔 가지 못했다. 설명만 들었을 뿐으로, 몇몇은 ‘분수’를 지키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배웠으면 ‘분수’를 아는 것이 사람 도리라고 쿡쿡 핑계대면서. 게까지 올라갈 여력이 없는 몇 회원들을 벗 삼아 힘들다고 아우성인 심장을 쉬게 했다. 일행은 한참 만에 내려왔고, 살며시 음과 식이 그리워질 즈음 버스는 밥집으로 향했다.
헤어지는 마당, 건배사 - 초청 측 PEN부산 회장의 건배사에 이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긴장을 풀자고 우스개를 했다. 열여섯 해면 남자 여자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다가도 못살고 헤어지기도 하는 세월인데, 우리는 부디 이혼 생각 말고 끝까지 가봅시다. 갈 데까지 가입시더. 양 도시 문인들의 우정을, 행복을, 무엇보다 문운을…… 여러 건배사가 이어지면서 <초원의 집> 점심이 무르익어 갔다. 실제로 오리고기가 익고 있었다. 그곳은 텔레비전에 ‘대통령들이 다녀간 집’ 소개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다녀갔다고 소개되었다고 한다. 몇몇은 깡소주를 노무현식 건배를 하자고 확 비우고 잔을 머리 위로 털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했는지는 아무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낮술에 취하면 어쩌려고?
어이없는 사족 하나.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어떤 휴게소에서 회원들을 놓쳤다. 휴식 후 5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고, 가벼운 식곤증으로 눈을 감던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잠시 후 버스를 따라잡은 검은 차에서 내린 둘은 별 계면쩍음도 없이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금의환향하는 월드컵 선수라도 되는 양 박수로 환영을 하면서 갑작스레 하나가 되어 깔깔댔다. 사고는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는 느닷없는 판소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기가 막히게, 임방울보다도 더 임방울 같은 목청으로 내놓는 ‘김싸부’ 덕택이었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 적막 옥방으 찬 자리어 /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거기까지만. 헤어질 시간이 다 되도록 우리는 배웠다, 불렀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내년에 우리가 부산 문인들을 초청하는 자리에서 이 구절을 합창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우리가 영호남 화합에 눈곱만치라도 기여했을까? 의로운 질문은 접어두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아련히 머릿속에서 도돌이표마냥 되풀이되는 가락은 우리가 정녕 남도사람임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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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에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