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6. 5. 30. 23:30

 

행복한 수요일 아침

                                                  <소설시대 10호> 2006


수요일 아침이면 인희는 눈물을 머금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곤 한다. 남편의 출근이 일정해진 이 근년에 생긴 버릇이다. 눈물을 머금고 앉아서 주문처럼 되뇐다, 넌 참 행복한 삶을 살았구나! 세상에 저리도 많은 생이별 가족들이라니! 보고 싶은 사람 그리워하면서 사무친 세월의 대가들 앞에서, 누군가를 이별한 기분에 빠진 자신을, 상대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이별을 이별이라는 자신을 나무란다.


그런 인희가 오늘 절대적으로 행복하다. 세상에 진정 행복한 날들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수요일도 아닌,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아무 것도 아닌 어느 평범한 날이다.


인희는 편집자에게서 받아온 A4 원고뭉치와 원전을 나란히 놓고 앉아있다. 얼마만인가. 제목과 번역자 이름만 인쇄된 겉장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다. 왼손을 들어 종이뭉치 위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안아본다. 그의 원고 교정 작업을 처음 시작했던 때의 막연한 불안감이 되살아난다.


환영, 환상, 유령 - 그게 어디 쉬운 구별입니까?

상상, 상상력, 표상, 표상력, 공상, 몽상, 망상, 환상, 환영, 환각 - 그 구별은 어떻고요?


처음 그를 만난 자리는 언쟁에서 언쟁으로 끝났다. 편집자는 불을 붙여놓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비교적 큰 출판사의 편집자들은 번역 교정에 외주자들을 사용한다. 번역자가 다소 불쾌해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우리 인간은 실로 나약한 존재지요. 한 줄을 통째로 지나치거나 단어를 잘못 보는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실력 여하에 관계없이요. 비슷한 단어만 혼동하는 게 아니지요, 엉뚱한 단어로 튀는 수가 많아요. 편집자의 융통성 있는 발언은 번역자들의 인격에 흠을 줄 필요가 없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번역이란 어차피 없는 것이고, 그럴 바엔 이름이 교수라야 그냥 애송이 강사들보다 책에 무게가 실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번역자로서 교수를 선호한다. 교수의 원고를 외주자에게 줄 때는 직접 현직 강사들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한다. 누가 누구의 원고를 보았는데....... 하는 것도 좁은 세상에서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교수의 원고가 ‘아무것도 아닌’ 인희에게 왔던 것이다.


인희로서는 그의 원고가 처음 작업은 아니었다. 남편이 그녀의 무기력에 질린 표정으로 아예 둔감증을 운운하던 시절, 그녀는 뭐라도 일감을 찾아 출판사를 기웃거린 터였다. 아직 어린 아이가 조기유학을 떠난 직후였다. 아이는 아이 큰아버지의 소망대로 빈의 음악원 입학을 목표로 호된 훈련 길을 떠났다.


큰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의학박사의 기로에서 의학을 선택해야 했고, 어딘가에서 그 보상을 찾아야했던 모양이다. 큰아버지의 아이들, 그러니까 아이의 사촌남매는 바이올린에서 멀었다. 음악의 고장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두 아이들은 완벽한 언어 정복을 위해 표준 독일어와 표준 프랑스어를 듣기에 진력을 하는 동안 음악적 귀가 닫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 아버지가 말했다. 처음 보았을 때 조카애들은 둘이 너무도 달라서 이상했다. 어머니의 얼굴에 가까운 아들은 노랑 곱슬머리고, 아버지를 닮은 딸은 밤갈색 생머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야 정식으로 한국어코스 강좌를 받겠다고 이곳에 오래 머문 적이 있었다. 생머리가 긴 딸아이는 먹을거리부터 서울풍경에 섞여들었지만, 아들애는 낯설었다. 아이들은 “제3국에 산다”는 부모의 결정대로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살지 않기 때문에 세 나라 말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의 말, 어머니의 말, 제 3국의 말, 그러니까 그들의 모국어 독일어. 그 중에서 가장 잘 하는 말이 당연히 그들의 모국어이다. 다음으로 어머니의 말이란다. 긴 여름 방학을 프랑스 남단으로 휴가 떠나거나 외가에 머무르는 동안에 저절로 얻은 수확일 것이다. 세계어라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저녁, 아이들은 “숙부”와 “숙모”만은 열심히 한글로 말했는데, 발음은 “죽부”와 “죽모”였다. 아버지의 말에 서툰 아이들은 아버지의 바이올린과도 서툴러 아버지를 서운케 했다.


그런 터에 인희의 아들은 음악을 가깝게 하면서 자라났다. 남편이 아끼는 재산은 LP판들을 포함한 CD무더기다. 형이 유학 떠날 때 남겨둔 것들도 함께 고이 보관중이다. 다른 집들처럼 거실에 오디오를 두지 않고 “아빠 방”에서 음악을 들었다. 보통 서재라고 할 방에 책보다 많은 음악들. 그래서 아빠 방이다. 아들아이는 아빠 방에서 어린 시절의 저녁을 보내곤 했다. 제 엄마가 두 번째에도 자연 유산을 계속하던 시절이라서, 엄마 근처를 보호하던 몇 년 말이다. 네댓 살짜리 사내아이가 엄마에게 와락 달려드는 자연스러운 동작에도 엄마는 가능한 동생을 잃곤 했으니까. 달려와서 덜컥 보듬기는 일이 뭔가 금지된 일이라 알게 되었는지, 조금 철이 들면서 아이는 저라서 엄마 곁을 뱅뱅 돌다가 아빠 방으로 향했다. 남편 또한 “아내 보호차원에서” 밖으로 돌았다. 음악회들도 날로 수준급이랬다.


처음엔 보통으로 시작한 유치원 시절의 피아노교습이 어느 새 바이올린으로 바뀌었고, 아들애는 제 방의 책상에 앉기 보다는 바이올린을 들고 아빠 방으로 향했다. 그 동안 아빠 방은 방음벽으로 바뀌었다. 방음벽은 부자를 결속시켰겠지만, 이상한 단절감이 존재했다. 인희는 늘 혼자였다.


인희의 기억 속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따로 사랑채 남자들이었다. 안채의 마당을 빙 돌아 기웃거리면 사랑채 뒤쪽이 나오고, 세월에 무거워진 문짝을 다 걷어 올린 대청마루는 교교했다. 사람 소리는 멀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낀 남동생은 낮에는 안채에 저녁이면 사랑채에 속했다. 왜 난 저기에 가면 안 되는가.


인희는 언니들 따라하기 보다는 동생 인석이 가진 것들을 부러워했다. 쪼끄만 아이가 따로 책상을 가진 것, 따로 서랍을 가진 것이 가장 그랬다. 퇴락한 안채에는 어디에도 책상이 없었다. 교자상이 늘 방 가운데 있었고, 밥상이고 책상이었다. 밥을 먹을 때에는 어른들을 끼어서 여럿이 되는데, 왜 공부할 때는 아이들만 해도 안 되는가. 이 책과 저책을 다 꺼내놓을 수 없게 되자, 인희는 하루에 한 가지씩만 책을 보기로 했다. 숙제가 여러 과목이어도 그냥 한과목만 하기로. 책을 펼쳐 놓아야하는 과목보다는 그냥 들고 있을 수 있는 과목으로. 중학교에 가자 언니들 방으로 옮겼지만, 사정은 더욱 나빠졌다. 언니들의 짐 속에서 인희는 귀퉁이 참이었다. 묘안이 떠올랐다. 여자이면서 유일하게 사랑채에 속하는 사람, 할머니였다. 사랑채 옆쪽으로 달린 상하 방이었다.


어머니는 안 될 말이라고 했는데, 할머니가 알고는 인희를 데려갔다. 비밀들이 드러나선 안 된다고 했던 어머니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할머니의 작은 책상은 인희로서는 정말 놀라운 발견이었다. 인희는 이제 작지만 진짜 책상에서 숙제를 했다. 강경애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빛바래고 닳은 책이 꽂혀 있었던 판자 책꽂이. 『예술과 인생』이란 표지는 한 뼘을 넘은 두께였다. 세로줄로 쓰인 윤곤강의 시집 『살어리』, 두꺼운 시집이었다. “모오파썅”이라고 이상하게 적힌 시선집은 50년대의 번역이었고, 그보다 더 오랜 『이희승 시집 박꽃』은 붉은 물주전자가 붉은 대접에 얹혀진 누런 표지였다. 하지만 문청 기질은 할머니의 방을 나오면 곧 집안의 모두에게 철저히 금기였다. 하나 뿐인 고모가 역시 “글이나 끌쩍거리던” 문학청년에 홀려 시집갔다가 영 이별이 되었기 때문인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집안에서는 분단 때문보다는 문청기질이 그 이별의 원흉이라고 믿는 때문이었다.


인희 또한 글쓰기와 관련된 “병든” 이상을 싹틔우지는 않았다. “소용없는” 할머니와 “소용있는” 어머니 사이의 낯설음은 조금 시끌벅적하고 따뜻한 안방에 끼이면 해소되었다. 어머니에게서는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는 자연스러움이 자질구레한 불협화음쯤은 흩날려버리곤 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인희의 “무난한” 몰개성적 성격의 근원일 게다. 어머니는 셋째 딸이 “하필이면 독문과”에 지원하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을 때에도, “좋은 대학에 가려는” 이유 정도면 통과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하필 독문과를 진학한 것은 순전히 영문과에 못 미치는 성적 때문이었다. 이제 그것이 소일과 자긍심을 좀 더해 준다. 영문과였더라면 단순 대졸의 주부에게 번역교정일이 들어올 차례가 아닐 것이다. 하긴 독일어 분야도 만만치 않지만, 오스트리아라는 거점을 배경에 지닌 덕일까? 그 배경 또한 순전히 “대학 간판으로 건져 올린” 결혼 때문 아니겠는가? 평범한 결혼 생활 16년 째 나선 일이 기껏 번역교정일이나 받아오는 것이었지만, 뭔가 책과 더불어 하는 일은 예상보다 더 정서적인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할머니의 책상이 허전하지 않아서 안도감도 느끼면서. 초고층 아파트엔 참 어울리지 않은 낡은 책상을 그녀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결혼 전에 병석에 있던 할머니가 굳이 물려주신 몇 권의 책과 책상이다. 어머니는 한두 번 이사 때 도와주러 오셔서는 그때마다 것 좀 치우지 않느냐고 성화셨다. 어머니는 큰 소용이 안 되는 옛 물건에 집착하거나 그러시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명색이 일을 시작한 이래로는 별말씀 없으시다. “할머니 피가 섞인 건 확실한거라......”


인희는 처음 그의 원고를 받아들면서, 철학자가 쓴 문예 이론서를 번역한 사람은 당연히 철학과이거니 했다. 철학과 교수였다면 철학용어에 대한 확고한 개념이 있어서 양보를 위한 자리는 필요 없었겠다. 그런데 철학과가 아니라 문예창작과라 했다. 문창과 교수라면 작가가 먼저일까, 그냥 교수일까? 초벌교정을 들고 나간 날, 젊은 편집자는 비좁고 북적대는 사무실을 피해 근처 커피숍에 나이든 교수와 나이든 외주자를 간단히 대질시켜놓고 사라졌다. “번역물이 효자죠, 나름대로 바빠 죽겠어요. 제발 좀 직접 조정해 주세요.” 그러니 남은 둘의 입씨름이 시작되었을 밖에.


환영, 환상, 유령 - 그게 어디 쉬운 구별입니까?

상상, 상상력, 표상, 표상력, 공상, 몽상, 망상, 환상, 환영, 환각 - 그 구별은 또 어떻고요?


어설픈 외주자의 의문에 자존심을 다쳤을 전문가를 너무 의식하지 못했었나 보다. 독일어에서 같은 어원은 우리말에서도 같은 어원을 유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억지에 가까운 현학적 고집은 일을 점점 뒤엉키게 했다. 몇 번의 씨름 속에서도 일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더구나 그는 워드 작업을 겨우 해낼 뿐, 이메일은 물론 그때 벌써 꽤 흔한 휴대전화도 불통이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만나야하는 일이 늘어났다. ‘시간 많은’ 그녀를 고르고 골라 일을 맡긴 편집국장은 공동작업의 불편함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시간 없는’ 교수 때문에 작업은 터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오월이었다. 그는 그동안의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종일이라도” 시간을 내준다면 좋겠다고 했다. 스승의 날 행사로 여유가 생겼노라고, 변명을 덧붙이면서. 그 수요일 아침이 되자 인희는 명치 아래가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이 간헐적으로 올라왔다. 막상 그를 만나서, 그가 “오늘은” 일 대신 다른 무엇을, 그런데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동안에는 위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율리시즈의 시선》같은 영화에 대해 뭐라 말하기 시작했지만, 어두운 영화관 같은 곳에 아내 아닌 다른 여자와 둘이서 들어갈 용기를 가진 품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어딘가로 무작정 차를 타고 나가게 되었다. 차가 한참을 달려 나가자 고통은 서서히 줄었다. 대신 아스라이 멀미가 일기 시작했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가? 마침내 산자락의 풀을 밟았다. 그는 진지한 어조로, 그러나 내용은 참으로 애매모호한 몇 마디의 말을 흘렸다. 예상 밖의, 소년들 사이에서나 가능할 비현실적인 단어들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녀의 청각기관을 지나서 폐부로 들어가자면 해석이 필요할 단어들....... 그냥 남편 또는 아내 아닌 사람과의 드라이브가 낯설었던 만큼, 그만큼 낯선 일탈은 꼭 그만큼의 긴장을 묻혀왔을까? 차가 시내로 들어오면서 다시 일상의 공기가 밀려왔다.


일은 차차 순조로웠다. 인희로서는 단어에 토를 다는 일이 줄었다. 그의 진지함에 압도되어서, 그가 심각한 고투를 겪어서 내놓았을 우리말 단어를 빨간 펜으로 칠할 수 없어서. 속내를 알지 못하는 편집자는 예상보다 빠른 탈고에 대해 그녀 쪽에 고마워했다. 나중에 <옮긴이>에 보니, 그는 철학과 졸업 후 대학원을 국문과로 옮겼다고 되어 있었다. 문학은 철학보다 한 수 아래라고 배웠던 인희는 그런 경력이 특이해 보였다. 그의 우리말을 긁어놓은 교정자 인희에게 처음에 그가 그렇게 적대적이었음이 이해되었다. 교수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가 아니라, 국문학 전공자가 비전공자에게 갖는 적대적 우월감.


여름 방학에는 아들 애 곁에 다녀오느라 일을 쉬었다. 학교는 쉬지만 독일어도, 바이올린 레슨도 쉴 수 없는 것이 아이의 상황이었다. 남편은 처음 동반길만 함께 했다. 일주일 이상을 비울 수 없어 한다. 대리의사를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려서라도. 아들 곁에 남은 어머니는 아들에게 고국의 음식을 먹이려 애쓰지만, 아들은 생각 보다 서양식에 잘 적응해 있다. 부엌의 주인, 서양인 형님은 요리에 능하고 힘차다. 인희는 별 할 일이 없었다.


여름이 고비를 넘길 때야 돌아와서 출판사에 들렀을 때, 그녀 앞으로 작은 책이 든 봉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공동번역을 제안하며 검토해보라고 맡겨둔 책이라는, 편집국장의 말이었다. 봉해진 봉투를 일부러 뜯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다. 집안일들은 겹치면 겹친다.


첫가을 날이었다. 아직은 햇볕이 따가운 오후, 밝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인희는 할머니의 작은 책상에 앉았다. 그와 공동번역을? 작가 이름을 얼핏 편집국장에게 들었는데, 잘 모르는 이름이었다. 봉투를 열어보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산도르 마래, 마라이? 독문과 졸업이 부끄러우리만치 난생 처음 듣는 이름인데, 표지는 귀족 저택의 초상화에 나옴직한 미녀 초상에 초록 옷자락이 살짝 풀잎처럼 내비치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작은 쪽지가 떨어졌다. 대략 5㎝ 크기의 정방향의 종이에 희미한 글씨의 토막글. “그 동안........” 그 동안이라니? 대체 왜? 그렇지만 그런 글을 읽고서도 곧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정의할 수 없는 애매함으로 뒤덮인, 그런데다 지나치게 짧은 글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해에 골몰하려는 동안, 일은 완전히 뒷전이었다. 아예 잊혀졌다.


대신 믿기지 않은 일이 생겼다. 인희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혹시 “메디슨카운티 증후군”이라 할 상태일까 걱정이었다. 미친 짓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어머니, 그의 아내, 그의 딸, 그렇게 가능한 모두를 시샘할 정도였다. 인희는 아무리 앞서도 그의 네 번째 여자였다. 쓸쓸했다. 아니 네 번째라도 좋았다. 희미한 글 한 조각에 온갖 의미를 걸게 되다니. 평온한 나날들이 혼란의 시간들로 바뀌었다. 안과 밖의 불일치에 초점이 흐려갔다. 그런가하면 폐부로부터 밀려 올라오는 열감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입술의 열감은 영화 속에서나 보는 불가항력적인 입맞춤의 뒤끝처럼 스멀거렸다. 선문답 같은 대화의 파편이 구슬처럼 입안을 맴돌았다. 눈과 귀, 귀와 입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하더니, 본 것과 들은 것, 들은 것과 말한 것, 나중에는 생각한 것과 말한 것들이 혼동되어서 함께 떠 있었다.


계속 바다로 가는 꿈을 꾸었다. 너무 많이 상상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정말로 그와 바다여행을 다녀온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의 지중해, 알함브라, 지브랄탈 해협에서부터 북해까지 온갖 바다를 유영했다. 섬이 연결된 ‘질트’나 ‘퇴닝’ 같은 지명은 그가 더욱 꿰뚫고 있었다. 전설에 등장하는 것 같은 그러나 실재하는 오두막을 빌릴 수 있는 곳.


바다는 많이 광활하고 그 광활한 만큼 바람을 몰고 와서 그들을 내몬다. 적어도 환영은 아니다. 해가 곧 질 것이었으므로, 아니 이미 지고 있다. 바람은 지는 해를 두고서 무섭게 폭풍을 동반해 왔다. 십분 전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변해 버린다. 바람은 그들을 매우 세차게 내몰아서 발을 떼어도 밀려 나갈 정도가 된다. 도망치듯 그것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한없이 서운하다. 그녀는 그에게 ‘증명사진’을 부탁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그 한 장의 사진을 추억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인가. 체험은 길이가 중요하지 않지요, 순간이 영원할 수도 영원이 순간일 수도 있음을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것을. 몰아치는 장대비를 맞으면서 이리저리 헤매며 따뜻한 불빛을 찾는다. 그가 담배 가게를 찾아 갔다가 모퉁이를 돌아올 때까지의 15분에서 20분 사이가 영원처럼 길다. 그를 다시 보기 전까지는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균열이 생긴다. 그것은 그들이 만나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 어떻게 그들이 그들의 바다를 정당화할 것인가!


그러다가 그가 떠났다. 충전기간이 필수적이라 했다. 그동안 동독이 개방된 후로 유럽에 가보지 못한 것을 그는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곳을 통로로 동유럽을 그리워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때문이냐고, 그녀가 물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일곱 다리 건너기 문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논리를 지나 수학적 사고를 주제로 대화가 되는 것에 그녀는 조금 흥분하곤 했다. 자신이 무기력한 존재가 아닌 것이 증명되기나 하는 듯이. 아무튼 지금은 리투아니아에 속한다지만 그가 전공했던 이성중심 철학의 본고장인 그곳에 가보고 싶을 것으로 짐작했었다. 그의 대답은 달랐다.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어딘지 모르게 처녀지인 곳, 동유럽에 몰려 있다고 했다. 잘 알려진 카프카도 그렇지만, 산도르 마라이도 그 하나라 했다.


“파스칼과 횔덜린 그리고 니체를 파괴했듯이, 고독은 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를 무덤 속에 내던질 이 세상에 아첨하는 것보다는 이런 실패나 붕괴가 사색하는 인간에게 더 어울린다.” 그것이 마라이의 생각이라고 말했는데, 그는 그 말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었다. 잠시 두려웠다. 절대 고독을 꿈꾸는 사람, 그런 그가 그녀에게서 무엇을 구하는가? “혼자 남아서 대답하는” 조용히 들어주는 친구를? 상대적으로 넓어서 더 높은 아파트 벽 속에 갇혀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을 타던 그녀로서는 그런 지적 대화는 듣는 것만으로도 신비했다. 생은 더 이상 진부한 것도, 무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면 되었다.


인희는 그가 가려는 곳이 혹시 빈에서 가까운 남쪽이기를 바랐다. 그녀 또한 아이를 만나러 한두 번 갈 것이니까.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머물기, 그것이면 될 것 같았다.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지중해, 그 동쪽 소아시아 반도와 크레타 섬들에 얽힌 숱한 신화들은 그들의 단골 화제였다. 다이달로스가 추락한 짙푸른 바닷물, 그런 바다에도 그들은 벌써 몇 번을 다녀온 터다. 하지만 실제로 그 물살을 손에 쥘 수 있다면!


그가 구동독 깊숙한 대학도시로 간다고 했을 때 인희는 조금 실망했다. 떠날 날을 정한 뒤로는 뭔가 슬며시 엷어지는 기운마저 돌았다. 그는 시간이 없어했다. 작은 눈을 반짝이는 통통한 여학생이 대신 원고 심부름으로 나오기도 했다. 이별은, 이별이란 말도 가당찮은 이별은 벌써 서러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떠났다. 추운 겨울이었다.


인희는 현실에서 숨을 쉬면서 상념은 다른 궤도로 흐를 수 있는 인간의 불가해성에 머리를 내저었다. 멀리 떨어진 거리와 관계없이 치열한 교감 속에서, 분류되지 않는, 정의되지 않는 상태에 혼란해하면서, 아리지만 풍요로운 순간들을 부여안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오월, 풀냄새에 놀라 봄을 탄식했다. 그는 어쩌면 오월을 피하기 위해서 떠나야 했구나! 곧 그녀는 균형을 잃어 갔다.


그의 철 이른 카드가 출판사로 날아들었다. 편집국장 친구에게 보낸 카드와 똑같은 카드였다. 그쪽에는 그렇다 치고, 다들 외주자인 인희에게까지 카드를 보낸 교수를 예의바른 사람으로 치부했다. 미려한 외관을 유지하는 것까지도 그다운 일이었을까? 인희는 그의 마음이 어딘지 부담감으로 차있음을 행간에서 느꼈다. 여름에 합류한 대가족과 함께 휴가여행을 떠난다는 그에게 지중해 혹은 그리스로는 가지 말기를 바랐던 인희의 마음을 그는 과잉으로 읽었을까? 두꺼운 카드 사이에 접어 넣은 얇은 종이는 글씨마저 얇게 느끼게 했다. 내용은 더욱 얇았다.


돌아온 그를 다시 만난 것 역시 출판사에서였다. 그가 번역 가능한 책 몇 권을 가져오기로 한 날, 편집국장이 인희에게도 연락을 했기 때문이다. 그를 바라보면서 인희는 갈비뼈가 금갔을 때처럼 아픈 것을 느꼈다. 너무도 큰 숨을 내어쉬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안 좋으신가요? 저 다시 안 들어가도 되니까 데려다 드리지요. 가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도 할 겸.” 인희는 편하게 기댈 양으로 뒷좌석에 탔다. 다음 블록에서 그가 차를 세웠다. 앞자리로 옮겨 탔다. 그는 오른 손을 가만히 내밀어 인희의 왼손을 잡았다. 괜스레 상처입고 오므라들었던 가슴이 펴질 새도 없이 아프기만 했다. 아픈 가슴으로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아니 제 안의 마음이 커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느낄 공간이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행여 열정 같은 것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정석이다.


이번 작품들도 마라이였다. 그녀는 처음에 받았던 작품을 여전히 읽고 있었다. 제목부터 “열정”과 “정열” 중 선택하기가 어려웠기에 내버려둔 채 그냥 독서에 빠져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20년 넘게 형제처럼 붙어 지냈던 두 친구가 헤어져야 했고, 그 후 40년도 더 지나서야 만나서 하룻밤 동안 나누는 대화형식”이라는 그의 설명은 정말 궁금증을 자아냈다. 실제 독서는 사전을 찾느라 더듬거렸지만, 부분 부분이 몇 곱절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일부나 다름없던 우리 두 남자의 침묵으로 그녀가 죽었네. 여자로서 참아낼 수 있는 이상으로 비열하고 거만하고 비겁하고 오만하게 침묵했기 때문이지.”


“여자가 참아낼 수 있는 그 이상의 침묵”이란 무얼까? 구절구절에 빠져있는 동안 번역 작업은 멈췄다. 대신 편지 같은 것을 쓰고 또 썼다. 전달될 가능성이 없는, 그래서 뒤틀려도 좋은 글을 무작정 써내려갔다. 마음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의 캠퍼스로 가서 서성이며 전화를 할까 말까 궁리하다가 지쳐 돌아온다. 난생 가보지 못한 그의 학교가 상상으로는 완벽에 가깝게 지어져있다. 돌바닥의 현관, 그가 오르는 층계, 걸어가는 복도, 오른쪽으로 휘면서 연구실 문을 열고, 방문이 열리면 순간 바람이 세게 밀려온다. 10cm 쯤 열어둔 창으로 바람이 밀리는 거야. 상상이 발광 직전에 이른 날엔 미장원으로 내닫곤 했다. 혼자서 들어가도 좋은 곳, 오랜 시간 혹사당하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되는 곳.


그는 차츰 멀어져갔다. 그러나 뭔가 시작당한(?) 사람은 끝을 당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당황하게 된다. 억울했다. 마음 흔들렸던 마음이, 눈을 바라보았던 눈이, 손바닥에 닿았던 손바닥이. 배반을 배반당했음이.


겨울이 오고 또 겨울이, 계속 겨울이 왔다. 마침 세상은 21세기를 향해 막연한 환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인희는 책상에 앉아 또 편지를 썼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기원하고 싶은, 그래야 할 것 같은, 이 늦은 마물음의 시간, 저에게도 한 가지 소원은 있습니다. 다음 날에는, 다음 봄에는, 다음 해에는, 다음 세기에는 저 같은 사람 다시는 만나는 일 없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쉽게 깊게 상처 입어서, 스스로의 고통은 그렇다 치고, 당신께 배가된 고통을, 배가된 짐을 드렸었던 저 같은 사람일랑 다시는, 행여 비슷한 사람이라도 다시는 만나시지 않기를....... 물론 쓰기만 했다.


송구영신의 모임들은 어느 해보다도 떠들썩했다. 남편은 겨울 골프를 떠나는 일행에 합류했다. 방콕은 일교차는 커도 겨울 평온이 25도나 되는 따뜻한 곳이라고. 겨우 며칠의 휴가를 따로 쓰는 것을 미안해하는 남편은 언제나 좋은 사람이다. 약간의 휴가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남편도 알면서 하는 소리일까. 아들아이도 집에 올 겨를이 없다 했다. 학업과 연주와 그곳 생활에 열중하여, 집에 연락하는 일도 잊는다. “형님이 당신 아이들보다 듬뿍 관심을 부어주니 그 녀석 참 복이지.” 그렇게 해서 200년 역사의 음악학교에 입학하는 외국인들이 많을까? 여러 사람의 걱정을 잠식시키고, 아이는 특히 큰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성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희는 깊이 침잠했다. 여러 의미의 반성과 더불어, 제발 자신을 어여삐 여길 수 있을 다가오는 새 봄을 소망하면서.


봄은 왔다. 여전히 “잔인한 사월”이란 구절이 맴돌았다. 다시 오는 오월이 매번 두려웠다. 그날의 산자락으로 가서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오자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그 자리, 그 무심하게 다른 풀이 자라고 있을, 어중간한 돌들이 구르고 있을 그 자리에 가서, 풀은 풀일 뿐, 나무로 자라지 않음을 확인하고 오자! 드라이브를 즐기는 친구를 불러내면 탄성을 지르며 와줄 것이다. 그러나 끝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 돌멩이들을 바라 볼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아름답게 수줍게 그러나 단호하게 무엇인가의 시작을 신호했던 그 목소리를 망각 속에 묻을 수가 없다. 밥 딜런의 노랫말이 맴돌았다. “잇 에인트 미, 베이브, 아임 낫 디 원 유 원트, 아임 낫 디 원 유 니드.......” 그의 입술에서는 다른 버전으로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의 한계는 이것입니다.” 밥 딜런을 들으면, 그는 딜런 토머스를 앞세운다. “녹색 퓨즈를 타고 꽃을 몰아가는 그 힘이 / 내 푸른 시대를 몰아간다....... 나는 시든 장미에게 바보처럼 말한다 / 내 청춘이 똑같이 차가운 열병으로 시들었다고.” 인희가 난해한 시에 고개를 갸우뚱하면,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열여덟 잔을 마시고 다음 날 죽어간 시인을 누군들 이해하겠소, 하고 그는 말끝을 흐린다. 흐린 말끝 따라 인희의 마음도 흐려지곤 했다.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친밀함에 대한 그리움을 덮는다. 이 사회의 구조가, 관습이 “사람들 사이에 섬이 존재”하게 한다. 관습에 굴하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 세상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존재한다.” 어디선가 읽은 구절이 사무친다. 그렇구나. 세상에 ‘혹시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예외는 없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다. 달도 차면 기운다.


밥을 같이 먹고, 잠을 같이 자고, 목욕을 같이 하고 ― 사람 사이 친해지는 비결로 통했는데. 그건 구식이다. 현대생활은 가족끼리도 밥을 같이 먹기 어렵게 한다. 단출한 아침식사에 굼뜬 그녀가 식탁과 싱크대 사이에서 어물거리다보면, 남편은 벌써 일어선다. 남편의 점심 저녁은 밖에서가 대부분이다. 산부인과의 사양길을 일찍 예감하고서 건강관리협회로 옮겨 앉은 이래, 저녁 시간이 더 바쁘다. 더 한가하기 때문에 더 바쁘다. 아이는 먼 데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군대 문제로 한번은 들어와야 한다는데, 염려 말라고, 잘 하고 있다고, 큰아버지는 한껏 만족스런 기별만 보내온다. 가만히 숨쉬고 숨쉬는 동안 세월은 간다. 20세기가 그녀에게 유수와 같았다면, 21세기는 쏜살같다. 다른 유수한 출판사에서 마라이의 전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열정』을 위시해서 줄줄이.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가 권했던 작품들의 번역일랑 몇 년을 아예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단순한 교정 외주자의 일이 맘 편했다. 것도 겨우 간헐적으로.


책상에 앉는다고 잡념이 줄지는 않는다. 가끔은 긴 버스 혹은 기차여행을 꿈꾸기도 한다. 옆자리에 앉아서 멀미에 시달리며 잠시 잠들었다 깨곤 하던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 밤바다의 바람을 막아 그녀를 감싸주던 그. 그런 그가 정말 존재했을까? 그냥 꿈이었을까? 상상과 회상이 뒤범벅되는 나날들.


그렇게 가을이 오고 또 가을이 왔다. 구월이 가고 시월이었다. 출판사는 외빈내화, 불경기 중에도 하나 둘 히트가 나왔다. 문광부 선정도서에 인희가 교정에 참가한 책도 하나 걸렸다. 그런 저런 이유로 인희도 단합대회에 끼었다. 문청들에 애증으로 얽힌 출판사 사람들의 술자리엔 문청들이 밥이다. 모두들 혼 빠지게 매운 낙지볶음에 소주들을 들이 붓고 나서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했다. 2차는 맥주 집이었지만 사람들은 소주를 섞어 마셨다.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묘령의 아줌마까지 엮여든 것으로 보아 썩 마셨다 싶었다. 그는 실로 오랜 만에 합류했다. 그러니까 모처럼 초벌원고를 내놓은 것이다. 그는 친구인 편집국장과 더불어 저쪽으로 섞여 앉았다. 그녀는 그런 그를 차라리 존중했다. 그는 그녀의 아무것도, 그녀는 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먼발치로도 약간의 무게가 느껴졌던 그의 원고뭉치는 아직 출판사 책상에 놓여 있었다. 뭔가 하긴 했구나. 하기야 친구에게 졸려서 하는 번역일이 전업이 아닌 담에야 몇 년 걸려 내어놓는 원고도 미진한 것은 아니리라. 그렇다고 그는 작가도 아니다. “시를 못 쓰면 소설을 쓰고, 소설을 못 쓰면 평론을 쓰지요. 것도 못쓰는 사람들이 교수하구요.” 이 시대 최고의 대우를 받는 소설가 ㅈ씨가 어느 강연에서 했다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문창과 교수인데 창작대신 문예이론가라고? 위대한 소설가 ㅈ씨는 그의 직업을 비웃을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그는 진지함의 대명사일 따름이다. 사람을 눈앞에 두고서 그에게로만 상념이 흐르는 것이 들킬까 문득 겁이 났다.


그 순간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봄엔가, 또 『이혼전야』도 출판되었더군요. 대 출판사답게 확실한 번역권을 가졌으니 그랬겠지만, 박인희씨, 제가 드린 원전을 펼쳐보기는 했나요? 게으름 때문에, 아니 망상 속을 헤매느라고 좋은 기회를 다 놓친 그녀에게 대한 힐난일까? 하긴,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지만 마음을 얻지 못하는 남자들이 어디 소설 속뿐이던가요? 그는 다시 말꼬리를 내렸다. 말 적은 그가 갑작스런 돌출 발언이라니. 주인공에 대한 연민일까? 혹은 남자로서의 동일시일까?


교수님이 다 읽으신 줄은 몰랐어요. 그럼 직접 번역 하시지 그랬어요. 남편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으면서 이혼 직전에 이르러서야 그 사랑이 허상이었음을 깨닫는 아내 또한 그림자 인생의 표본 아닐까요?


그건 남편이나 아내의 문제가 아닐 것 같소. “사랑한다는 건 단지 안다는 것 이상일 것. 우주에서 똑같은 궤도를 도는 두 개의 별이 존재하는 것처럼 엄청난 우연일 것. 그런 우연은 결코 없을 것. 삶도 사랑도 모두 동일한 박자로 움직이는 우연! 그런 만남은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비한 환영 같은 것....... ” 그 왜 약간 뒷부분에 나오던데, 게까진 읽지 않았나요? 책 내용과 관계없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녀만을 향해 뱉는 말이었다.


뭐라 대꾸하려고 입술을 연 인희는 단어를 얼른 토해내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 탓이기도 했다. 그렇겠지요. 한쪽이 빠르면 다른 쪽은 느리고, 한쪽이 소심하면 다른 쪽은 용감하고, 한쪽은 뜨거운 반면 다른 쪽은 미지근....... 속으로만 어느 구절을 외울 뿐이었다.


대강 파하고, 더러는 노래방으로 향했고, 누구는 대리운전을 불렀고, 우왕좌왕이었다. 그녀는 사무실로 그의 초벌원고를 챙기러 돌아왔다. 상당한 부피였다. 원고를 만지려니 왼손이 먼저 나아갔다. 여기서 그의 오른손이 느껴질까? 순간 소스라쳐 놀랐다. 다시 꿈인가? 정신없이 방을 빠져나오는 그녀의 등 위에 그가 있었다. 현관께로 다른 아무도 없는 찰라. 그가 그녀를 안았다. 그녀를 등 뒤에서 안았다. 갑작스런 몸짓이었다, 놀랐을까? 의외라서 놀랐을까? 너무도 기다렸던 일이어서 놀랐을까? 기다리다 못해 지쳤고 절대로 더 이상은 꿈도 꾸지 않아서 놀랐을까? 아, 인희씨, 제가 정말, 아 이렇게 참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그 비슷한 말, 흉내 낼 수도 더 이상 기억해 낼 수도 없는 단어들, 단어 몇 개. 그런 단어들은 왜 허공 속으로 빨려 흩어지는지 모르겠다. 높지도 않은 천정에 붙어있다 어느 순간 다시 내려오면 안 되는가. 어두운 밤 시간에, 몇 시인지도 가늠할 수 없는 깜깜한 시간에, 단어들은 빛처럼 빠르게 사라져갔다. 다시 깜깜했다.


왜 뒤돌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까? 뒤돌아보기에도 짧은 시간이었을까? 뒤돌아 볼 수 없을 만큼 온갖 동작이 정지된 순간이었나? 자동적으로 발을 내디디면 앞으로 나간다. 인희는 바보같이 발을 움직였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떻게 그에게서 멀어질 수 있었을까? 인희는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마음은 더욱 더 뒤로 빨려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인희는 앞으로 발을 움직였고, 그렇게 멀어졌다. 그 현관에 그가 일이초간 더 서있었을지, 인희로선 알지 못한다.


*

 


그런데 세상이 달라졌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뜨면서 알았다. 해가 환히 비쳤다. 제법 가을인데도 이중 커튼 사이로 햇살이 깊이 박혀왔다. 머리카락부터 따듯함이 베어나서 발아래로 스쳤다. 그렇게 상쾌한 아침을 언제 기억하는가. 수요일도 아닌데 충분히 행복한 아침이었다. 세상에 진정 행복한 날들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A4 원고뭉치와 원전을 펼쳐놓고 앉아서, 제목과 번역자 이름만 인쇄된 겉장만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왼손을 들어 종이 위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그대로 안는다.


그의 원고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을까? 출판사에 별 일이 없었는데도 자꾸 들렀다. 뭔가를 핑계 삼으면 핑계는 있었다. 번역물 팀장 쪽에 영어담당 외주자가 우연히 와 있었다. 그 여자는 약간 들린 턱에 상당한 자존심이 고여 있는 유형인데, 사회적 미소를 한껏 띠면서 말했다. 웬 좋은 일이세여, 별안간에 환해지셨네여. 제가 눈치가 좀 되거든여.


눈치가 된다니 무슨 말인가. 눈치에도 급이 있나요, 좀 되시게?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미소가 번지는 데는 스스로도 놀랐다. 나도 침묵이 좀 되거든요? 그런 말도 다 침묵했다. 행복하면 말하는 일도 아깝게 된다. 열린 입을 통해서 순간 행복감이 새 나갈지도 모른다.


순간 눈앞 여자의 얼굴이 살짝 가렸다. 이마 한쪽이 가려졌다. 놀라서 고개를 돌렸지만 다시 어딘가 막히는 영상이었다. 일정하게 왼쪽 윗부분에 물체가 고정된 것 같았다. 왼쪽 위라면 혹시라도 그의 차를 얻어 탈 때에 그의 머리가 있어야 할 곳이다. 계속 그의 머리를 의식하는가? 글씨는커녕 책이 통째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둥근 물체는 아예 눈꺼풀의 안쪽에 있는 듯 시야를 가렸다. 사물이 일그러져 보인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슬그머니 겁이 났다. 신체검사 때마다 불안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상한 점들이 아무렇게나 모인 검사용 그림책은 항상 두려웠었다. 색맹이라는 판정이 나올까 하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우선 그 어른거리는 색의 잔치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추상해 내야하는 그 일 자체, 그 순간의 길이가 두려웠었다. 게다가 수년 전 너무도 완벽한 건강한 모습의, 그러나 멍한 눈의 노인네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깨끗한 차림, 무엇보다도 깨끗한 표정, 거의 행복한 표정을 하고서도, 눈꺼풀 하나로 세상과 단절되어버린 삶의 한 순간을 목격한 기억이 오싹했다.


시력이 떨어져서 오셨나요? 가볍게 시작된 안과의의 질문은 어느 특정 병원으로 소개받은 후엔 집요해졌다. 글자체가 흔들려 보입니까? 직선이 굽어 보인가요? 시야 가운데가 흐릿하거나, 시야 중심에 검은 부분이나 반대로 텅 빈 부분이 있나요? 한쪽 눈을 가리고 바둑판 가운데 점을 보세요. 점 주위의 선이 물결치거나 휘어져 보이면, 황반부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어디, 아직 변색증은 안 보이지만, 변시증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새 혈관이 생성되어 망막 후극부 황반에 변성이 왔다는 말씀입니다.


진행? 행진처럼 들리는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가 계속 나빠진다는 뜻인가. 조만간 시력을 잃게 된다는 말인가? 그녀는 속으로만 생각한다. 변성? 망막이 목소린가, 변성기가 오게?


이어지는 온갖 검사들. 확대 렌즈는 기본에, 약을 넣겠다, 바둑판 검사지를 보며 이리 저리 답하랬다, 종당에는 형광색소를 주사하고서 안저를 촬영한대나. 알아듣고 싶지도 않은 검사들이 쏟아졌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구나.


사람들은 흔히 비싼 검사비용 내면서 고생고생하며 검사를 하더라도,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기대하며 검사에 임한다. 그러다가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걸리는 것이 없기를 바라고 시작했던 초심을 망각하고는 괜히 검사를 했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더러 “신경과민에서 오는”이라는 진단을 받으면 좀 부끄럽기도 해서, 뭔가 조금 나왔기를 바라는 심정이 되어 웃고 만다.


아무튼 이번에는 달랐다. 뭔가가 나왔다. 역시 황반변성에 의한 신종혈관이 문제입니다. 겁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 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시행하고 있는 광역학 치료법은 종전의 방사선치료법과는 차원이 달라서.......


확실하게 치료는 됩니까?


확실하다는 말씀은....... 그러니까 완치에 재발이 안 되는 것을 물어보신다면, 솔직히 대답은 “노우”입니다. 재발률은 높은 편이지만, 사모님은 마침 황반 주변부에만 신생혈관이 나타나 있어서, 조기에 치료를 실시하면 진행속도를 늦춥니다. 시술 시간도 극히 짧아서 고통스럽지 않은데다, 미리 염색된 비정상조직만 골라서 파괴하는 것입니다. 베르테포르피린이라고, 광자극 물질이죠. 이 물질을 팔뚝 정맥에 투입하면, 얘가 몸을 돌다가 잘못 생겨난 신생혈관만 염색시키고 나머지는 배설되어버리거든요. 그런 다음 빛을 쪼이면 되는데, 얘는 에너지가 약해서 정상조직엔 전혀 손상이 없죠. 미리 염색시켜놓은 딱 고 부분만을 얘가 파괴하는 겁니다. 딱 83초 동안에 끝나죠. 입원요? 그냥 이렇게 여기 앉으신 채로, 안압 검사 같은 것 할 때처럼 앉아서 합니다. 그러나 생활 중에 물체가 찌그러져 보이는 증상들이 다소 더 악화될 수도 있으며, 재발의 가능성도 높은 것이....... 지금 저의 병원에선 일년에 4회를 시술하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물론 일회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만.


말씨는 다시 엄숙하게 바뀌어 있었다. “얘는” 어쩌고 하는 식의,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다스런 패널들의 수다처럼 변하던 말씨가 다시 엄숙해진 것이다. 이제 비용을 말할 차례가 된 것이리라.


우선 인희 자신의 결심이 서지 않았다. 의사들 가운데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의학에 관한 무조건적 신뢰형, 그리고 제 식구들은 병원에 잘 보내지 않고 아이들이 감기가 들어 콧물이 줄줄 흘러도 내버려두게 하는 회의형. 남편은 긍정적 부류다. 기본이 선량한 사람은 자신의 일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온갖 정보를 찾아서 보여주었다. 정보는 겁을 몇 제곱했을 뿐이다. 섬세한 그물과 같은 신경조직 망막 중에서도 황반부는 중심 약 0.5cm정도, 겨우 녹두알 아님 완두콩 크기란다. 하지만 글을 읽거나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고, 색을 구별할 수 있었던 모든 일이 바로 이 꼬맹이 덕이었다니.


이제 글 읽기나 근거리 작업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고? 불가능할 수도?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치료가 시작되었다. 치료의 일년이 시작되었다. 그 후론 수요일 아침이 되어도 눈물을 머금고 행복해 할 수 없게 되었다. 텔레비전처럼 눈으로 함께 보는 대신 귀로 듣는 행복을 구해야 했지만, 남편의 차원높은 음악은 처음부터 인희에게 멀었다.


예약된 병원 복도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통계에도 65세 이상의 노인 10% 이상이 걸린다는 높은 유병률이었다. 그녀 또래는 드물었다. 눈을 혹사한 탓일까? 그녀의 망막이 상대적으로 많이 혹사당했을까? 혹사의 역사는 절로 어린 시절로 거슬러 간다. 재래식 화장실의 침침한 불빛 아래 쭈그린 채 동화책을 넘기던 시절로. 언니들은 왜 하필 그곳에 책을 들고 가느냐고 의아해 하곤 했다. 할 수만 있음 빨리 나오고 싶은 데가 아니냐고. 하지만 그곳의 시간을 참기에 읽을거리만한 것도 없음을 그녀는 알았다.


남편의 눈 꼬리가 조금 치켜 올라갔다. 누가 당신 눈을 혹사하라고 해서 이런 일이....... 그렇게 말하는 눈이었다. 당장 일을 그만두라는 것이었지만, 하던 작업을 중단하기는 어려웠다. 바로 그의 원고였다. 그의 원고를 설명 없이 중간에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습관적으로는 책상의 스탠드만 켜는 것이 집중을 위해 좋았었지만, 이제 천정의 등도 함께 켰다. 모니터를 19인치로 바꿀까 했다 말았다. 이 작업이 끝난 뒤 더는 글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 것이 뻔했으니까. 대신 글꼴 기본을 12폰트로 올렸다. 곧 14포인트로 넘어갔다. 13을 쓰지 않은 것은 13징크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10-12-14 그런 습관 때문이었다.


이게 황반이 산화되는 것 비슷하다니까. 남편은 드디어 한 마디 했다. 당신은 인스턴트 음식도 안 먹고 술 담배도 안 하지, 대체 어디서 유해산소가 나온 걸까? 골프는 힘드니까 그렇다 치고, 음악회 한번 따라 나서지 않을 만큼 당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뭐요 대체?


그냥 고도근시 때문에 올 수도 있다 했잖아요?


글쎄, 당신이 원래 허약체질이라 해도, 스스로 몸을 돌보는 데 소홀한 건 틀림없어. 뭐 다른 일에 시달릴 것도 없이 이런....... 남편은 뒷방 쪽을 흘겼다. 할머니 책상이 놓인 곳이다. “쓸데없이” 눈을 혹사하는 짓거리에 파묻혀 그리되었다는 힐난을 담아서. 아이 입시문제로 시달릴 일 없겠다, 시댁문제로 힘든 것도 아닌 안락한 세월을, 어디 걸맞은 일 없어서 “남의 글 교정이나” 하겠다는 여자라니, 남편의 평상시 지론이다. 아들이 음악가로 성장하고 있는데도 도통 음악회도 마다하는 어미라니. 정작 의사 남편이 아내가 사람 북적대는 곳에서는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것을 성격 탓으로만 돌린다.


인희는 가슴으로 운다. 미안해요, “쓸데없이” 혹사한 것은 눈만이 아니었어요. 좋은 남편의 보통 아내이기에도 벅찬 그녀의 속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쓸데없이” 한 곳으로만 향하는 좁아터진 그녀의 시야를 비웃듯이, 정말 시야가 가리기 시작한 것이니까.


일년. 그 일년 사이에 그를 만난 적이 없다. 두 번째 시술 날을 잡아 놓고 일차 교정 분을 단번에 다 넘겼을 뿐이다. 그 사이 그가 유비쿼터스 세상으로 한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에 꼭 만나지 않아도 일의 전달에는 충분했다. 아니 무서워서 못 만났다. 그 후론 교정도 번역도 완전 중단이다. 그가 원전을 건네준 『결혼의 변화』도 다른 곳에서 출판되었다. 말로는 감정을 강조하지만 현실적인 아내, 욕망을 피하려는 구실로 경직된 규율로 도피한 이성적인 남편, 그런 가운데 “내레이터의 시각이 일품일 것”이라 추천했던가? 이제는 다 옛말이다.  번역서로나 읽을 수 있을지, 단순한 독서도 겁난다. 먼 데 초록을 보며 눈을 쉬자고, 한 친구는 나인 홀이라도 한번 따라나서 보라지만, 골프장의 햇빛인들 좋겠는가. 두더지처럼 아파트의 서늘한 그림자 안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뿐. 행복한 수요일 아침도 외면한다. 대신 눈을 반쯤만 뜨고 지내는 연습을 한다.


눈을 내리 감으면 감을수록 상념은 높이 높이 나른다. 파스칼도 횔덜린도 그리고 니체의 독서도 힘든 평범한 누구라도, 고독이 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는 데서 예외가 아니겠지, 그녀는 생각한다. 그가 마라이의 말을 인용했을 때, 렌츠의 이름을 거기에 추가하지 않은 것이 느닷없이 후회스럽다. 그 말을 들려줄 일도 영 없을 것이다. 괴테의 친구로, 친구의 그늘에 가린 채, 10년도 채 못 되는 창작기간, 그보다 훨씬 긴 정신착란의 세월 속, 모스크바의 길거리에 쓰러진 천재. 그 일생만으로도 가슴을 울렸던 렌츠가 갑자기 생각난 건 마음에 와 닿은 한 작가 때문이다. 일면식은 있는 사이다. 그와 더불어 이 작가에 관해서도 이야기 할 틈이 없었다. 아니, 그와 더불어 나눈 시간 자체가, 그와 나눈 대화를 통째로 녹음해서 편집했더라도 몇 시간의 길이나 될까? 그 시간이 내 수십 년 인생에 무슨 영향을 준다는 거야? 인희는 허망한 정답을 깨닫고는 숨을 죽인다.


오늘은 일년에서 마지막이라는 네 번째 시술 약속이 된 날이다. 세 번째부터는 남편 대신 큰 언니가 동행한다. 시술 자체엔 위험부담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아는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 않았나. 처음 83초를 견딜 때 작정을 했었다, 뭔가 꿈을 꾸리라고. 83초에 그러나 긴 꿈을 꾸리라고. 봉숭아 손톱물을 첫 눈송이에 대고서 소원 빌던 길이보다 훨씬 짧은 동안에. 흐르는 별똥별에 대고 소원을 비는 일에 비하면 엄청 긴 시간 동안에.


이제 한두 시간 후면 하염없이 82초, 81초 ....... 하고 헤아리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다다르고 싶어 했던 태양이 통째로 눈앞에 다가올 것이다. 형언할 수 없이 눈부신 83초 동안 어둡게 꿈틀거리며 되풀이될 꿈속에서, 여전히 그의 네 번째 여자이기를 소원할 것인가? 바로 그 부정한 소망 때문에 계속 병변이 재발되는 것은 아닐까? 흠칫 오한이 인다. 그녀의 오른손을 잡고 있던, 아무 것도 모르는 넉넉한 언니의 얼굴이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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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