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둥병은 누구나 알 듯이 천형의 벌이라 간주되는 격리치료의 질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문둥병에 감염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인물을 위해서 사회가 빙자한 질병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
이라서 격리가 필요한가? 성직자의 독신 계율을 구체적 소재로 다루는 이 작품은 사실
평신도에게도 의무로 되어있는 정절의 덕행마저 이미 기만적인 현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혼인에 관한 "추상적 질서원칙"( 63년 작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참조!)에 대한 기만적 복종은 대기업주 부르의 <민주적> 작태에서 드러난다.
아내에게 아내의 자유를 준 남편! 매우 민주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선행(?)은 그러나
그의 성공적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 그는 자산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도 필요한 것이고, 또 가톨릭 신자로서의 평판을 위해서sms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임을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나 APO의 동조자인
젊은 쿰페르트신부가 외치는 장면이다:
저는 다만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성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내연의 관계나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순결의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또한 이미 결혼 한
사람들까지도 […] 순결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은 우리가 정말이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너그럽고, 죄악 자체에만 혹독하지요
심지어 "신앙을 버리거나 여자를 보더라도 눈감아 줄" 여생의 성직 대신 "특권을 부여
받고서 특권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일, 그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젊은 신부, 그리고 "포도주를 즐기고, 신학서보다는 소설 읽기를 즐기는, 그것도 최근의
초현대적 소설을, 또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고 고백하면서도, 감히 "부랑자 신세"를 택하지 못하고 조금 타협하고 신학 안에 남아있
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의 노 신부.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검역소에 억류된다. 젊은 신부의 자살이 '신원미상의
문둥병자 사망'으로 둔갑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낌새>를 알아챈 형사 -- 그는
시체에 접근했었으므로 잠정적 감염자로 분리된다 --, 죽은 신부의 <동쪽> 친구 --
그는 신부의 동구행 잠적이라는 시나리오에 어울리도록 함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이자 대 부호의 아내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여자,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뛰쳐나온 주인공 쿰페르트신부 등이다. 이 특이한 문둥병
아닌 문둥병의 치료 또는 해결은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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