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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기고2005. 10. 15. 23:30

 

교집합과 합집합  

 

<문학사상> 2005년 11월호


 

“수학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도형은…….”

첫 강의시간에 운을 떼자마자 학생들의 얼굴이 굳어지려 한다.

봄이, 가을이 올 때마다 우리 선생들은 새 학생들과 만난다. 학생들과 세대간 거리가 더해갈수록 앞으로의 상호이해에 대한 불안감은 커지기만 한다. 강단에 선 사람은 소통을 터야할 의무를 갖지만, 시작은 항상 이렇게 어렵다. 첫 시간의 단골메뉴가 하필 수학에서 차용된 것들이라 더욱 낭패다.

수학은 성년이 된 이들에게는 학창 시절 골치만 아픈 존재였다고 기억되곤 한다. 졸업 후 바로 실 인생에 뛰어든 경우도 그렇지만, 인문계열에 진학을 해 보아도 수학은 쓰임새가 없다.

아예 인문계열에 수학을, 자연계열에는 국어를 면제하고, 영어만을 공통입시과목으로 택하는 대학도 있다. 대한민국은 가히 영어-정보화 대학들로 넘쳐있다. 그에 걸맞게 동영상으로 맞이해야할 젊은이들에게 분필로 그리는 삼각형이라니. 그것도 밑변에 해당되는 선분 하나만 달랑 그려놓고 잔소리에 들어간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이 밑변을 그리는 시기에 있습니다…….”

밑변을 최대한 넓히는데 힘쓰라는 당부를 위해, 카프카의 빈둥거리기 예찬까지 들먹인다.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참 안 되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 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아 확고한 성취동기로 무장하고 앉은 젊은이들에게 그렇게 찬물을 끼얹어야 할까. 산학연계 학습과정을 개발하라는 사회적 독촉에도 어긋나고……. 해서 그것이 요즈음엔 점점 벤다이어그램 쪽으로 기운다. 교집합과 합집합을 인간관계에 비유해 설명하기 위해서다.

교집합은 쉬운 말로 공통의 원소를 가지는 집합이다. {김, 이, 박, 최, 정}과 {최, 정, 강, 조, 윤}이라는 두 집단이 있을 때, 교집합은 {최, 정} 두 사람으로 좁혀진다. 그러나 합집합은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으로 여덟 사람이 된다. 여기에 성씨 대신 나의 특성과 타인의 특성을 대입하면, 교집합은 공통점을, 합집합은 두 사람의 합을 드러낸다. 합집합의 크기는 교집합과 반비례하므로, 큰 합집합을 위해서는 교집합이 작아야 한다. 물론 가장 큰 합집합을 위해서는 교집합이 없어야겠지만, 그것은 무의미하다.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교집합은 필수적이니까. 장황한 설명보다도 동그랗게 원 두 개로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면 모두에게 순간 확연해진다. 땅 따먹기라 해도 합집합을 늘리기 위해선 교집합을 줄여야 함이.

수 개념은 매우 중요한 인식의 출발을 결정한다. 그 중요하다는 영어를 배울 때의 어려움 중 하나도 단수 복수 구별이었다. 물질은 셀 수 없기 때문에 많아도 단수다. 하나 둘, 세어지는 사물은 둘 이상이면 복수다. 거기에 또 집합적 단수. 얼마나 힘든 개념이었던가. 개와 고양이는 합쳐서 말하면 ‘동물들’이고 복수로 ‘데이 아’인데, 여러 ‘사람들’인 가족은 복수가 아니라 집합적 단수라 했다. 우린 참 형제자매가 많은 가족이었으니 더 혼란스러웠을까.

그래 우리가 영어나 독일어로 말하면서 복수 쓰기를 잊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말에서 ‘우리’와 ‘우리들’을 굳이 구별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심지어 내 고향에서는 “나는 매운 것을 무척 좋아해서”라고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운 것을 원칸 좋아해서”라고 하는 일이 허다하다. “우리는 도통 요새 영화는 범벅이요”라고 하면, “나는 요즈음의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무남독녀인 우리 어머니도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라 하신다. 서울 중심의 사람들이 쓴다는 표준어에서도 ‘나의’ 아버지 대신 ‘우리’ 아버지다. 심지어 ‘우리(!) 집사람’임에랴.

왜 ‘나’ 대신 ‘우리’를 즐겨 사용할까? 언어에서 연원하는 문학을 전업으로 사노라니, 진작 언어 일반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소홀히 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 소설가 ‘ㅂ’이 한껏 조롱한 늙은 교수들에 속하게 되었다. “명성이라는 더러운 스타킹을 뒤집어쓴 부패한 관료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물론 그 명성도 없이. 그러면 차라리 학생들도 그 소설책에서처럼 모두 “독학자”가 되겠다고 캠퍼스를 버리는 상상을 한다.

첫 강의를 마친 저녁에 낯선 이메일이 하나 도착했다. 실명대신 별명으로도 스팸메일을 걸러내는 전산시스템에 통과된 것이다.

‘1학년에겐 점수를 잘 안 주신다는 소문이 있는데, 알고 계시느냐. 또 첫인상으로 보아 자기주장이 강하신 교수님 같은데, 하고 싶은 말 있어도 못하게 되면 어떡할지, 이것들이 괜한 걱정임을 밝혀주셨음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빠른 반응에 대한 기쁨 한편으로 숨이 막혀 왔다. 그러나 숨 막힘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인상을 여태 못 벗어났단 말인가?

실은 지루한 강의 사이에 우스갯소리를 그리워하는 학생들을 내 나름대로 이해한다. 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학생들은 결석할 자유가 있어서 좋겠소!” 정도다. 일단 학생들은 웃는다, 출결석에 까다롭지 않은 교수를 만나서 다행일까 하는 기대로.

말을 이어가자면, 자유시장경제에서 살고 자유결혼도 해봤지만 그리 자유로울 것이 없는 것이 삶인데, 한 학기 한두 번 결석조차 못할까 보냐! 그쯤에 이르면 웃음을 거둔다. 거 봐요, 이 사람은 우스갯소리 해보아야 썰렁해지니 아예 기대하지 마시오!

결석할 자유, 졸업하지 않을 자유! 이론상으로 인간에겐 자신의 진리를 고안해낼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자유는 우리를 미결정의 상태로 놓아둔다. 자유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자유는 변화를 갈구하는 프로메테우스적 본성이다. 모든 것을 알고자 언제나 다시 새로운 체험을 추구하는 파우스트적 충동이다. 자연으로, 곧 너의 본성 안으로 돌아가라! 너에겐 너의 진리를 고안해낼 자유가 있다. 그 자유를 보편화하고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관철시키려 하지 않는 한, 이 자유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는 다치지 않아도 될 아주 작은 자유를 꿈꾸는 나는, 그러니까 소인배였다.

반대로, 적극적으로 인간을, 인류를 사랑하고 그래서 선의를 행동하려는 역동적인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들을 사회에 적용시켜 다른 사람들의 소중한 삶에도 영향 주고 싶어 한다. 사회적인 장치가 인간의 본성에 합당하게 조직되지 못했다는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는 이들은 과감히 새로운 원리를 들고, 특히 소외된 계층의 구원이라는 입장에서 소유의 평등한 분배를 향해 사회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이론적으로는 정치가나 사회운동가나 참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차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합일에 대한 소망은 참담한 결과를 부르기도 한다. 사회가 공감으로 채워져 있는 공동체로 변화하는 루소의 꿈을 멋대로 끌어들이면 로베스피에르의 ‘덕에 의한 테러리즘’으로 왜곡되기도 했으니.

그런가 하면 소유의 분배 이전에 아예 소유를 초월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산업사회의 소비주의를 탄식하며 소유가 아닌 존재를 지향하는 삶을 꿈꾼다. 인간에게 소유욕으로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주어서 본래적 존재로 되돌려 놓을 사명을 지닌 듯하다.

본래적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여러 단수의 복수들인 인간에게라면 이 본래적 존재 또한 무수한 변형으로 파악불능에 이른다. 인간을 집합적 단수로 볼 때라야 그들의 사명이 실현 가능해 보인다. 위대한 진리들로 인간을 치유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여러 이론들은 매번 교집합의 확대를 꿈꾼다.

혼란스러운 단수와 복수. ‘나’와 ‘우리’의 조화는 뫼비우스의 띠를 맴돈다. 그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정작 분열적 환상에 시달린 사람들은 자기 안에 서로 다른 집합들을 가진 경우다.

나 역시 뭔가 자유롭지 못함을 느낀다. 남의 글들을 공부할 때, 자판 위를 날아다니는 손가락들이 먹다 남은 먹이를 파헤치는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으로 변하는 환상에 떨 때가 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나머지 손가락 하나씩을 위한 나의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글 공부와 글쓰기 ― 두 성분은 필연적인 분리를 지향한다. 궁극적 확장을 위해서 파괴되기 직전까지의 분리를 향하여. 미쳐버린 렌츠와 횔덜린에 이르지 않을 만큼만. 자신과 타인 사이, 자신과 사회 사이, 아니 제 자아들 사이에서 한 점 교집합이 없이 터져버린 이 영혼들을 새삼 보듬고 싶어진다.

교집합을 동경하면서 합집합의 확장을 꿈꾸는 모순이 먹안개처럼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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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