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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1.15 침묵 4 - 투틸로
소설2024. 1. 15. 18:59

 

 

 

 

 

 

 

 

 

 

 

 

 

 

 

 

 

 

 

 

 

 

 

 

 

 

 

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 교황 바오로 3세, 1541년 시스티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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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틸로 –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이름, 너는 오늘 너에게 빠진다.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가 한국의 김 스테파노 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바로 그날 세상에 나온 그는 바로 그것으로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유아세례 때 어머니는 그에게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게 하고 싶어 했더란다. 아니면 이그나시오, 주임신부님을 따라서 이그나시오라고. 하지만 신부님은 생일의 성인을 따라 투틸로라 이름지어주셨다.

성 투틸로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은 자라면서야 풀렸는데,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단다. 지혜와 웅변술로 수도원 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한 시인이며, 회화, 조각, 공예를 두루 섭렵한 미술가이자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졌다는 만능 예술가였단다. 베네딕토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베네딕도라고 쓴다. 대구수녀원이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소속이다. 바른 표기라면 툿칭일까, 아무튼 뮌헨 근교의 지역이름이니까 의미는 없다. 어쩌다 베네딕도수녀원의 긴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일가 수녀님 때문이다. 평생을 미국 중부 어디 오마하의 수녀원에 있는 그 수녀님은 일가이니까 한국인인데, 법적으로는 미국인이겠지만, 한국에 피정을 오면 매번 대구를 방문한다. 같은 베네딕도수녀회라서 그런다 했다. 수녀님은 그곳을 다녀오면 꼭 들려주는 말이 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한1서 어쩌고 한다. 그의 특기는 ‘예’도 아닌 침묵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영원히, 어디에 남아, 뭣 하러?

 

다른 이야기로 갈 것은 없고, 그 투틸로 수도승 같은 만능 예술인의 이름을 받은 기분은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유전이 아닌 만큼 불행하게도 그가 예술적 감각과 관련해서 유전자를 갖지 못한 것이 분명해졌다. 웅변, 글쓰기, 음악, 미술 어느 것에서도 소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겁이 많은 사내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머나 먼 성 투틸로 대신에 그는 그에게 투틸로라는 이름을 주신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로는 큰 도시의 성당으로 나가셨다고 했다. 자라면서 괜스레 궁금해진 그는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찾아보았고, 로마 유학을 떠나셨고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셨다는 것까지, 그리고 돌아오셔서 곧 세상을 떠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모른 체 했다. 침묵은 말보다 편한 도구였다. 다만 마음속에 만일 로마를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레고리오 대학과 성 이그나시오 디 로욜라 성당에는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170㎡가 넘는다는 성당의 천장화 <성 이그나시오의 영광>을 꼭 보고 싶었다. 그 성당을 완공할 즈음 재정난으로 돔을 만들 수 없었을 때 – 돔이 없는 성당이라니! - 포초라는 화가가 실제로는 평평한 천장에 돔을 그려넣었다는 것 아닌가. 착시현상을 이용해서 돔과 하늘을 드높고 드높게, 그러니까 다만 시각적으로 공간을 무한 확장했단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릴 것 같은 사람들의 형상들도 함께 그려넣었다니. 두 눈으로 보면서 눈속임에 빠져보고 싶다. 물론 로마에 갈 수 있다면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놓칠 수야 없겠지.

천장화 – 그런 것들을 새들이 그린다면 또 몰라, 어떻게 사람이 그릴 수 있었을까. 4년을 천장화에 매달린 미켈란젤로, 이런 것만으로도 옛날 사람들은 그에게서 경이를 자아낸다. <최후의 심판>은 어떻고. 167.14㎡의 벽면에 391명의 온갖 모습을 7,8년의 세월에 걸쳐 그렸다니. 당시 교황님의 김탄사가 의아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하긴 모든 예술이 그렇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석고형으로 구체화하는 데에 꼬박 37년을 보냈다잖은가. 서울에 있는 No7/8 청동작품 제작만도 2년 반이나 걸렸다는데, 대중이 관람할 수가 없다니 애석하다. 작품을 전시하던 로댕갤러리는 폐업을 했고, 해서 지금은 다른 미술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니, 혼도 따라서 수장고로 들어가 잠을 자고 있을까. 그의 내면은 멀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채워졌다.

 

왜 현대에는 지독한 완벽한 일꾼이 없을까. 우리는 현대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그는 단정했다. 어느 부분 발전을 말하지만 능력 면에서 퇴보가 더 드러난다. 혹시나 기록되지 않은 태고의 역사 속에서는 인간에게 날개도 있었을까. 그 감각으로 천장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창세기의 인물들처럼 몇 백 년을 살 수 있었을까. 최초의 인간 아담이 930세를 살았다지만, 그 기록을 노아가 950세로 므두셀라가 969세로 깬다. 현대인에게 평생의 작업이 무슨 의미일까.

몸은 그렇다 치고 머릿속은 어떻게 그렇게 심오했을까.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의 이름을 그는 수학 시간에 알게 되었다. ‘두 직선이 만나면 마주보는 두 각은 같은 각을 이룬다.’ 라거나 ‘임의의 원은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이런 간단해 보이지만 완벽한 정리를 할 수 있었다니, 공책에 그것들을 눌러 쓰면서 그는 어지러움을 느낄만큼 감탄했다. 현대의 심오한 지식이라는 것들은 파편적일 뿐, 전체적으로는 위축된 인간들. 그는 자랄수록 배울수록 과거라는 시공간이 무한 매력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역사를 공부하자, 그랬다.

 

 

투틸로, 학교 이름으로는 노승욱, 그가 택한 사학자의 길은 수월한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전 대학강사에게 미래는커녕 현재도 없었다, 없다. 남사스럽다, 라고 부끄러워할밖에. 어머니의 속뜻대로 그는 신학대학으로 진학을 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종신서원까지도. 극단적으로는 카르투시오회의 모토처럼 오직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도 있었겠다. 천 년 전에 주교직도 마다하고 엄격한 은수 수도생활을 시작한 성 브루노의 후예들, 봉쇄수도원은 영화 〈위대한 침묵〉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들 봉쇄수사의 삶은 기본적으로 은둔 지향, 그렇다고 현대에 와서는 완전한 은수 개념은 불가능하고 반쯤 숨어서 생활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세상에는 스물도 넘지만 우리나라에는 두 곳, 20년 전쯤 세워진 상주시에 있는 남자 수도원에는 한국인 봉쇄수사 두 분과 외국인 몇 분이 계신다. 평수 사님들은 몇 분 더 계시고. 아, 그곳에 관한 한국영화도 있다. 그리고 수녀회는 보은에 있다던가. 믿거나 말거나 거친 빵과 밥 중 선택해서 먹는 것이 전부라니, 그로서는 그런 절제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인간의 기본 욕구, 그러니까 생리적 욕구인 의식주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안전에 대한, 소속감에 대한, 설마 존중에 대한, 자아실현에 대한 고차원적 욕구들이 채워진들 진정일까. 영화를 본 다른 누구는 봉쇄수사들이 자발적으로 시간과 미래를 버렸으므로 이미 천국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선뜻 동의는 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속세가 맞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천국인 그곳에서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초월할 것이다. 봉쇄수도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종교에서는 죽음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는 사례가, 그래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는 사례가 있다. 〈위대한 침묵〉에서의 드문 인터뷰도 생각났다. 한 장님수사가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자신을 장님으로 만드신 것에 감사한다고, 그것이 영혼에 더 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랬다. 이 무한 신앙도 한 인간의 것이다. 다른 인간은 그런 상태를 도취라고, 마취라고, 마약이라고 할 게다. 묵상과 기도와 독서와 노동이 전부인 삶을, 그 자발적 선택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20년에 걸쳐 인내하면서 영화를 찍은 감독 또한 수사 못지않다. 옛날만은 못하지만 세상은 대단한 사람들 천지다.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존재들 또한 현실이건만. 그러니까 살아서 벌써 천국과 지옥이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속을 끓이면서 그는 답을 몰랐다. 아스팔트에 둘러싸인 방, 열린 또는 닫힌 창문 하나, 이 침묵은 봉쇄수도원의 그것과 비슷하려나. 그의 그것은 헌신도 외경도 없이, 부끄러움만 더한, 그래서 더욱 소외된 침묵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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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  『작가교수세계』, 한국작가교수회, 474~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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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