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네 번째의 죽음」을 읽고 //
이 소 림 (전남대학 독문과 박사과정 2학기)
2008년 9월 30일
단편 「네 번째의 죽음」은 마리루이제 플라이서 Marieluise Fleiβer(1901~1974)의 『심해의 물고기 Der Tiefseefisch』(1930)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남자주인공 라우렌츠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 생각, 말, 남자에 대한 태도를 순종적으로 할 것을 여성에게 종용한다. 대등하지 않은 이성간의 관계에서 억압받던 여자는 결국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난다는 것이 플라이서의 소설 내용이다. 이러한 서두는 「네 번째의 죽음」의 큰 틀이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벌어질 것을 시사한다. 더불어 인용된 소설의 남녀주인공들이 작가라는 것과 「네 번째의 죽음」속 일인칭 화자 '나'와 친구인지 누구인지 아무튼 가까운 '그'라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설정도 공통적이어서, 독자는 「네 번째의 죽음」에서 남녀의 지배관계와 글쓰기의 문제가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인칭 화자 '나'와 '그'를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소설의 주체로서 그녀의 시각에서 남과 여 각각의 세계가 그려진다. 이들 두 세계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세계의 양극단으로 분리 되어있다. 그들은 비슷한 날에 (사실은 한 날에) 태어나고 지적인 교육을 함께 받으며 자라났음에도, 그의 지성은 명철함과 합리성으로 그녀의 지성은 표현하지 않고 적당히 감추어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이다. 여성 고유의 생물학적 특질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는 모범과 질서와 선행의 세계 속에 있어, 그녀가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무질서함과 산발성과 초보성은 늘 그의 비난대상이 된다. 남과 여 이원의 세계는 그녀에 대한 그의 힐책으로 소통될 뿐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더욱 자세하게 들려주기 위해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소설 속에 삽입해 넣은 액자소설이다. '독서-글쓰기-싸움-병-죽음'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진행된다. 다섯 단계의 내부이야기는 (독서-글쓰기를 '생'으로 묶어) 자연의 법칙인 '생-노-병-사'에 병렬 할 수 있다. 각각의 주제 속에서 그녀와 그의 인물성향이 나타나고, 에피소드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적 세계 안에서 여성의 글쓰기 문제와 작가로서의 창작의 문제는 '실존(삶)'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음은 액자소설 속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독서>
그는 친구와 관념의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한다. 그와 친구가 서로를 반박할 때, 그는 혁명적, 반항적, 이방인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친구들과 멀어져 갈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한다.
독서의 문제로 그녀와 그가 티격태격 할 때, 그는 평생 주워 읽은 모든 것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236)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녀는 너무 많이 읽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글쓰기>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다. 독서를 한 후 그와 친구와의 토론에서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드러난 것처럼, 그의 글쓰기도 그 시대의 문단에서 요구되는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담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글에 타인의 글이 섞이는 것,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 고민한다.
<싸움>
그는 자기 스스로 창안한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그녀를 힐난한다.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게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 중독.(241) 결국 사랑에 빠질 듯한 그녀에 대한 힐난이기도 하다.
<병>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신의 일산화탄소중독은 그녀의 신체적 병으로도 나타난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 후반부에 그녀가 바흐만 Ingeborg Bachmann(1926~1973)의 작품 『말리나 Malina』의 여주인공이 벽 속으로 사라지며 자살하는 것을 패러디 함의 전조이다. 그녀 삶이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되는 것이 문제라는 소설창작의 문제는, 역으로 그녀 삶(논픽션)과 소설(픽션)이 혼합되는 문제와 교차된다.
<죽음>
그와 그녀는 남성(작가)의 문학작품 속에서 '대상화된 여자'(245)에 대해 토론한다. 대상화된 여자를 두둔하는 그녀를 그는 '골통나부랭이들'(246)이라고 비난한다.
그녀가 작품을 처음 썼을 때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것에서부터 그는 그녀를 비난해왔다. 그는 그녀에게 규칙적이고 표준적인 글쓰기 과정과 내용의 논리 정연함과 개연성, 그리고 그 안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완벽한 픽션을 창작하기를 요구해왔다. 그는 그녀 앞에서 곧 질서이자 상징이자 규칙으로 군림한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는 그가 제시한 지배적 글쓰기 체계가 그녀의 창작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
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 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244)
이 단계에서 그녀가 창작하는 이유도 드러난다. 그녀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246)으로 창작을 한다. 창작의 문제가 실제 삶의 문제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면서 군림해온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자신이 사라지는 수 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말리나의 죽음을 패러디 한다.
삽입된 다섯 개의 에피소드에서 남성의 규칙을 여성에게 내면화시키려는 '그'의 모습과 그와의 상호관계에서 억압받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글쓰기라는 모티브를 통해 심화되었다. 주지할 것은 그녀가 빛나는 상상력과 창작에의 열정과 상상력을 필력으로 옮길 수 있는 지성을 갖추었음에도 상징적으로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상황과, 일인칭 화자인 그녀가 내레이터로서 고백적 에세이의 '글을 쓰고 있다'는 모순적 상황이다. '픽션'과 '팩션'의 문제를 창작의 고뇌로 안고 있는 그녀의 글쓰기 문제는 글을 쓰면서도 쓰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소설을 써내려 가는 그녀 삶 자체다. '생-노-병-사' 삶의 법칙을 글쓰기에 대위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233)를 부렸다. 세계문학사의 남겨진 고전명작들의 작가들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과 정통을 그의 전유물로 만들어 글을 쓰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소설에 팩션 형태로 용해시키며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소설에서의 개연성(233)이란 남성 본위의 가치 판단 하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총체성에 다름 아니다. 한편, 그녀는 무작정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237)하고 자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조적 정신을 발현시키기 이전에 기계적으로 가부장적 사유체계로 점철된 대가들의 글을 읽었고, 남성의 전유물로 구성된 외부세계의 틀에 맞추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그녀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작업을 규정화된 조건에 맞출 수 없는 데 기인한 자기비하이다.
그녀는 기존의 전통과 정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한 후에 생겨나는 자의식을 비정통적이고 불분명한 척도라 생각해 부유하고 있다.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가늠 지어진 사회적 성 차별의 이데올로기 성 역할의 내면화 여성의 자의식의 발현을 향한 욕구- 욕구발현의 실패- 주체로서의 자아 정립 실패'의 과정이 그녀의 글쓰기 문제에서 나타난다. 상식적 '글쓰기', '언어'라는 것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며, 이러한 가부장적 사유체계의 지배 속에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언어, 여성의 자아는 억압되어 왔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 <죽음>에서, 그녀가 이와 같은 상황을 깨닫고 자살을 연출하는 것은 큰 전환점이다. 그런데 뒷방 서랍 속에 자살의 형태로 가두어 버린 '나'는 남성의 규범에 얽매인 '외부적 자아'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고픈 원래의 나'이다. 그녀는 '자신의 방'의 종이쪽지들, 물건들을 가리키며 "택배 방"(251)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녀이지만, 그 곳에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기만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은 여성에게 주인이자 절대자로서 행하는 남성들의 물건들(택배)로 오염되어, 그 방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 수 없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나'를 버리고 '그'가 되기로 한다. '그'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면서 다만 내면화 되어 일인칭 화자였던 '나'는 '그'에게 투항한 것이다. '그'가 기실은 남성적 질서 속에서 능란하게 적응하고 있는 건강한 여자임이 마지막에 언니와 남편의 등장에서 확인된다.
「네 번째의 죽음」은 바흐만의 『죽음의 방식들』 연작 3부작에 이은 네 번째 죽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부작 중『말리나』와 외부액자 속 '나'의 이야기, 액자 속 내부 이야기는 삼중의 메타픽션 구도를 이룬다. 『말리나』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남녀관계와 문학세계의 불평등성, 늘 훈계하거나 야단치는 남성의 모습, 여성의 정신세계와 실존을 무시하는 남성상 등이 차용되고 있다. 말리나의 정신이 남과 여로 분열된 모습은 남성적 세계 안에서 원래의 자신이기를 바라는 여성성의 발현으로 이해되는데, 결국 말리나의 여성성이 살해(강요에 의한 자살)된 것처럼,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도 같은 형식의 죽음을 취한다.
여성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결말은, 이 소설의 자서전적 성격과 더불어 남성들의 발전교양소설의 내용과는 대치되는 것들이다. 기존의 문예학은 여성들의 자기산출적인 텍스트들을 폄하해왔다. 자기고백적 성격, 줄거리의 부재, 주인공의 비 발전성 등은 여성의 자기고백적 텍스트에서 보는 일부 특징이다.
자서전적인 것의 혼합, '삶'에의 천착 그리고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출
판의 소망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한에 있어서 문학사 서술에 의해 통속성이라는 낙인이 찍히
게 된 문학표지들인 것이다.1)
페미니즘 문예학자 뷔르거 Christa Brger는 여성의 글쓰기를 삼 단계로 설필한다.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의 요한나 폰 쇼펜하우어나 샬로테 폰 칼프 등을 예로 들어, 여성들이 기존의 제도 문학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소피 메로 등이, 완전히 비고전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일기 책과 편지 글을 통해 소위 '고급'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는 요구를 따르지 않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카롤리네 슐레겔-쉘링, 베티나 폰 아르님 등이 글쓰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들에 의해 산출되는 자아에 대해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단계라 한다.2) 페미니즘 문학사에서, 세 번째 단계는 여성의 글쓰기가 삶과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미학적 실천3)으로 실행되어 온 시기이다.
뷔르거의 견해에 따르면,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는 위의 세 번째 단계에 있다. 글을 쓰지 못한다고 자기를 비하하는 그녀의 생각은 기존 문예학적 입장에 기인한 것일 뿐,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한다. 그와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알력다툼은 기존 문예학의 전통에 반하는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문제로 확대되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가 글을 쓸 수 없다며 상징적인 자살을 감행하고 체념하는 것을 비극적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 여성고유의 것을 표현하기 위한 규범이 부재한 현실을 비관하고 그 상황을 기술하는 것이 부지 중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전통을 따르는 '그 여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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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나 린트호프, 이란표 역: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110쪽 재인용.
2) 참조 : 앞의 책, 113~114쪽.
3) 참조 : 앞의 책,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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