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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19 수필 「말」 - 『그리움의 빛깔』
  2. 2010.10.09 말과 글, 그리고 경계인
수필-기고2012. 12. 19. 10:25

 

 

 

  만일 여러분이 기자가 된다면 누구를 인터뷰하고 싶나요? 인터뷰할 대상을 정한 후 질문 목록을 작성해보는 것이 오늘의 숙제입니다. 왜 그 사람을 대상으로 정했는지 그 이유도 함께 적어서 보내세요, 이메일로!

 

  사실 이메일 숙제는 편한 작업은 아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외국인 학생들의 한국어 실력은 ‘말하기’는 물론 ‘쓰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 때문이다. 일일이 고쳐줘야 하는 것이 기본인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다. 무심코 쓰던 문장이었다가도 학생들의 표현에서는 갑자기 자신이 흔들려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는다. 그 버릇은 간단한 글을 쓸 때도 여전해서 이젠 마음 놓고 글 한줄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도 그럴 것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라고 열심히 외웠던 ‘뿌리 깊은’ 기억과 아무 상관없이 이제와 표준어는 ‘나라말’이라니 말이다.

 

  그동안 표준어는 ‘만날’인데 입에서는 맨날 맨날이라고 움찔거리다가, 어느 날엔가는 그것 또한 표준어란다. 이런 조변석개를 두고 반갑다고 해야 할지, 요새 아이들 말로 ‘멘붕’이다. 국적이 불명한 멘탈붕괴의 약자로, 말 그대로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는 말이란다. 어떤 상황이나 말에 의해 평정심을 잃고 ‘정신이 나갔다’, ‘자포자기’ 또는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식의 뜻이란다. 누리꾼들의 장난이다.

 

  - 어땠어? 쌔끈?

  - 말도 마. 폭탄이었어! 얼큰이었다고.

  소개팅에 나가서 섹시하고 멋있는 - ‘쌔끈’ - 상대를 만났냐는 질문에, 소개받은 사람이 외모나 성격 등이 마음에 안들 때 쓰는 ‘폭탄’이란 답을 보낸다. ‘얼굴이 큰 사람’이었다고!

 

  은어를 피하면 돌아오는 것은 ‘은따’ - 은근한 따돌림이다. ‘리하이’라는 예법을 몰라도 당근 은따. 대화방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인사는 그냥 ‘하이’면 부족하다. ‘re-’를 붙여야 예의(?)란다.

 

  음절 줄이기는 귀여운 부류에 속한다. 게임은 ‘겜’, 서울은 ‘설’, 애인은 ‘앤’, 어서 오세요는 ‘어솨요’로 줄인다. ‘아뒤’를 멋진 프랑스식 인사말인줄 알고 대꾸했다가는 혼난다, 곧 ‘강추’다. 그것은 강력 추천일 때도 있으나 강력 추방으로도 사용된다. 그런데 ‘아뒤’는 누리꾼들에게는 아이디의 준말이다.

 

  제일 따라가기 어려운 말들은 모음 비틀기다. ‘다덜, 모냐, 알쥐, 안뇽, 안냥하세엽, 화났나여? 넵’은 ‘다들, 뭐냐, 알지, 안녕, 안녕하세요, 화났나요? 네’의 비틀기다. 비트는 데 시간이 더 걸려도 비튼다. 왜? 모른다.

 

  ‘절친’에게서 문자가 날아온다.

  - 열공중? 반반무, 반반무마니 시켜노코 ㄱㄷ!

  - ‘베프, 방가방가. 냉무 아니쥐?’

 

  베프는 물론 베스트 프렌드의 준말이다. 영어도 막 줄인다. 한국어가 재미가 쏠쏠해 보인다. 그러나 신세대 누리꾼들이 아니고서는 불행하다.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야? ‘후라이드 치킨 반 마리, 양념 치킨 반 마리, 무 많이’ 시켜놓고 기다릴게! - 이것을 알아듣는 ‘사오정’이 몇이나 있을까. 실세(?)에서 물러난 것은 기정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가상세계에서는 아예 출입금지다. 어디에 살꼬?

 

  본론을 잊고 있었다. 이메일을 열어 숙제를 점검해야 한다.

이들이 인터뷰하고 싶은 대상이 누구일까? 에임 하이! 그렇게 권장 받으며 자란 대학생들임이 드러난다. 중국 학생이 버락 오바마를, 안젤리나 졸리를 인터뷰하고 싶단다. 셀레브리티에겐 이미 국경은 없다.

 

  독특한 것은 중국의 성전환 무용가가 여러 학생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진성 - 중국식 발음이 그러하지만 조선족이니 김성이라 불러도 되겠다. 1968년 조선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가족의 뜻과는 달리 인민해방군에 합류하여 무용과 군사훈련을 받고 청소년 무용수로 두각을 나타냈다. 곧 현대무용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이어서 로마에서는 무용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세계적 무용수가 26세에 고국으로 돌아가 28세가 되던 1996년에 ‘성확정’ 수술을 받았단다. 그러니까 본래 여성적이었던 그가 그녀가 되었다, 용감하게도. 세상은 그녀를 더욱 반겼고, 2004년의 <상해 탱고>는 유럽 순회공연에서 “우리의 현대무용이 어디로 발전할지 망설일 때 동방에서 온 무용예술가가 우리에게 방향을 잡아주었다.”라는 찬사를 들었을 정도. 이미 아들을 입양했던 그녀는 38세가 되던 2005년에 독일인 남성과 결혼하여 현재 3명의 입양아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산단다. 무용의 열정은 더해서, 지난해 2월에도 이탈리아의 로마공원극장에서 <제일 가까운 것과 제일 먼 것>을 공연하여 극찬을 받았다고.

 

  내가 왜 이리 긴 이력을 말하는가. 그냥 놀라워서다. 말로는 다 못할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람이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일까. 말로서 표현한 것은 진실인가. 말은 진실을 다 표현할 수 없다. 혹은.

 

  학생들이 뽑은 인터뷰 상대가 점점 놀랍다. 터키에서 온 여학생은 신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단다. “왜 세상은 힘들고, 왜 좋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않고, 세계를(세상을) 어떻게 만들어 주(시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물론 서툰 표현이다.

 

  갑자기 전혀 다른 유창한 말이 떠오른다.

  정말 결혼을 잘 한 것 같아요! - 30년 넘은 결혼 생활 후에 남편의 면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말. 다른 남편들이 모두들 감탄했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나는 믿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줄 모른다, 라는 생각에 압도되며.

 

  발이 시린 여름밤이 깊어간다.

  발이 시리면 맘도, 맘이 시리면 말도 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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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빛깔』, 이화동창문인회 2012, 142-145.

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10. 10. 9. 00:00

말과 글, 그리고 경계인


“프로메테우스 - 그 의미는 선각자이다 - 는 하늘에서 불을 가져오기를, 그것으로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 그는 그것을 땅이 불타도록 가져온 것이었다. […] 만일 이 금기위반이 […] 부르주아들이 점점 좋아하고 점점 더 돈을 버는 데나 쓰인다면 - 문학은 되돌아가야 한다. 아니, 불을 하늘로 다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 모든 선각자들처럼 지략을 써서 문학은 어떤 길을 찾아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이런, 평생 하이에나가 되어 남의 나라 남의 글 뜯어먹고 사는데 진력이 나서 도망쳤는데, 기어코 마침표를 찍으라 하니 또 그 짓을 되풀이하며 하인리히 뵐의 말과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군요.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이 말은 자본주의에 완전히 강점된 이 세상, 이 지구를 향해 통탄의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 말을 저는 마침 한글날에 즈음하여 이렇게 변형해보고 싶습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시면서, 훗날 남북으로 갈려 살면서 남쪽 대통령이 대북제안을 내놓을 때 하필이면 외국말로 ‘그랜드 바겐’이라고 하고, 우리 땅 멀쩡한 이름 놓아두고 새 이름 짓겠다고 총리실에서 ‘새만금 글로벌 네이밍 공모’를 하라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우리가 기적 같은 문자를 누린 600년도 채 못 되는 세월을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글자가 그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해서 한문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에게 경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갑오개혁에서야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지만, 곧 닥쳐온 국권피탈은 다시 극한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가, 말과 글이 푸대접 받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한글’은 그 이름을 얻고 ‘맞춤법통일안’이 나왔습니다. 세계문학에서의 근대적 사조들인 낭만 · 자연 · 상징주의 등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면서 신문학운동이 폭발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죠. 그런가 하면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의 문학장르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는 ‘이식문학론’은  ‘조선문학’의 정체성을 화두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증거입니다.

말과 글의 예술, 문학의 속성은 바로 그러한 불모지에서 더욱 꿈틀거리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배고픈 천사”의 친구 레오를 주인공으로 한 『숨그네』의 헤르타 뮐러에게 노벨문학상이 결정되었을 때 독일문단에서도 예상작은 아니었던 것이, 바로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경계인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변인, 경계인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 그런 이야기를 쬐끔 해보겠습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강연(?)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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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까지가 팸플릿을 위한 글이었다.

  강연은 2010년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03호실에서.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