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강좌2014. 7. 6. 15:49

인류의 지적 진화와 사회의 발전 단계

무등도서관 201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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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 인문주의와 계몽주의의 발흥

 

1. 고대 그리스‧로마의 헬레니즘

 

호모 사피엔스 - 이 말은 고인류를 분류할 때 사용하는 명칭으로, 현생 인류를 ‘생각하는 사람’ 또는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있다고 하는 인간관이다. 인간에게 특질적인 것은 언어와 사고(사유)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한 인식의 한계는 유한성의 인식에 있었다. 이 지식, 인간의 절대적 유한성을 초극하고자 하는 열망이 어느 문화에서나 상대적 무한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착한 것이 초월적 존재이다. 유사 이래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를 열망해왔다. 그 초월적 권능의 존재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 종교 - 신과 인간의 결합 내지 교감으로서의 종교가 발생했다. 서양의 원류,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 수호신의 숭배는 중심 문화의 하나였다.

에게 문명(3650~1100 BC)을 이루어낸 그리스 신화도 다른 민족의 신화들처럼 많은 초자연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미토스(mythos: 이야기)에서 신들의 이야기나 영웅전설 등을 이야기했다.

기원전 7세기에 헤시오도스(Hesiodos)의 『신통기』는 세계의 시초를 제일 먼저 질서정연하게 서술한 작품이었다. 만물은 자연히 이루어져 각기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들도 인간처럼 나중에 생겨난 것이었다. 주신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인류의 시초는 신들과 마찬가지로 가이아[대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들과 동족이라는 생각이었다.

동물과 인간의 창조 신화가 있다. 에피메테우스가 각 생물들에게 저마다의 특성을 부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맹수들에게는 강한 이빨과 발톱을, 약한 동물들에게는 다양한 의사소통과 온갖 도주의 능력들을 주었다. 인간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남은 것이 없었다. 인간은 벌거숭이에다가 허약한 채로 남겨졌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도와 육체적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지능을 마련해주었다. 물론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네가 관장하던 기술의 능력과 불, 그리고 제우스의 정치술을 신들로부터 훔쳐 인간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스 신화의 대부분은 신들의 자손인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황금양털에 얽힌 이아손의 이야기, 오이디푸스왕(王)의 기구한 운명, 트로이 전설 등은 가장 총애받는 아이템이었고,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800∼750 BC)가 복합적으로 탄생했다.

 

이어서 그리스 비극 시인들이 나타났다. 비극은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아테네에서 시작된 디오니소스 축제의 연극 경연대회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던 합창이 변형되어 연극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스킬로스(Aeschylos, 525~456 BC)의 경우는 ‘오레스테스 3부작’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정념의 가공할 작용을 주제로 하며 특히 여성심리 묘사에 뛰어났던 에우리피데스 Euripides(484?~406? BC), 그리고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니고 국가에 공헌했던 소포클레스(Sophokles, 496~406 BC)의 『안티고네』 등은 현대극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무엇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공연이 고대 문화의 꽃이었다. 작품 속의 세계관에서 자연과 인간과 신은 같은 질서 속에서 관계를 이룬다. 절대적인 질서는 운명이고, 운명의 종말은 비극이다.

 

철학의 탄생: 자연 연구 - 자연을 따라서

 

신의 계보를 정리하고, 신화 속의 정신과 사상을 통해 공통

된 세계관을 얻어보고자 한 의미에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이미 신화와 철학의 중간에 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세계와 만물의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과제는 자연 연구였다. 인간은 자연을 따라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와 만물의 원질(arehé)은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탈레스(Thales, BC 6세기)였다. 그의 결론은 이 원질은 ‘물’이라는 것이었다. 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8~524 BC)는 지구는 둥글다는 생각을 했다. 만물의 원질은 프시케(Psyché, 숨, 호흡, 공기, 영혼, 생명)라고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490~430 BC)는 그것이 불, 물, 땅, 공기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생각은 소박한 실재론으로, 그들에게 철학의 과제는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C)는 백과전서적인 박학자로, 동일하면서도 불가분, 불변적인 자립성을 갖는 물질의 단위 ‘아토마(atoma)’를 상정했다. 아토마는 형, 배열, 위치에 따라 서로 구별될 뿐이라 했다. 이는 이후의 물리학 상의 ‘원자’에 해당한다.

 

형이상학 - 자연을 넘어서

 

형이상학은 자연학(천문, 기상, 동식물, 심리 등에 관한 연구)을 넘어서 관념적 사유로서의 학문이 된다.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 없는 것, 초경험적인 것을 직관으로 탐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동양적으로 말하자면 기(器)에 대해 도(道)에 대한 학문이라 하겠다.

에게 해의 섬 사모스에서 심오한 종교성과 음악에 심취했던 피타고라스(Pythagoras, 572~495 BC)는 무엇이 만물의 원질인가에 대한 물음보다 어떤 원리와 법칙에서 존재하는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수학자답게 그는 세계의 원리와 질서는 수의 조화법칙에 의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조화의 질서가 생활과 세계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윤리적 스승이었다.

그 이후 엘레아(이탈리아) 학파에 속하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00년 경)는 감각 세계, 변화, 유전하는 만물은 지식의 대상도, 학문과 진리의 내용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존재는 그 본질로서 자기동일성인 것이다. 이렇게 본질의 불변의 실재성을 주장하여, 이어 플라톤의 이데아, 즉 관념적 논리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와는 다르게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C)는 우주의 만물을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로고스(logos)는 오직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사물과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본질이란 사유의 조작에 불과하며, 만물은 쉴 새 없이 유전한다고 생각했다. 동일성 대신 모순이 만물의 변화와 생성을 가능하게 하며, 특히 절대적인 진리란 없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뿐이라고 간주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는 회의적 가치관은 후일 헤겔을 위시한 변증론의 기초를 놓았다고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관념론과 실재론의 기나 긴 싸움의 시대가 열렸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소피스트의 등장

소피스트란 흔히 궤변론자라고 하는데, 소피아는 ‘지혜’이므로,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의미였다. 이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토양 속에서 변론술과 출세의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이었다.

궤변의 금메달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2~411 BC)에게 수여되어 마땅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이다. 이 명제는 철학과 학문의 주체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정향한 인간 표준론이자, 지식과 진리는 상대적일 뿐이라는 진리 상대주의를 드러냄으로써 학문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소피스트들은 우리가 간단히 알고 있듯이 단순히 궤변론자들이 아니었다. 소피스트들에 의해 인간은 역사의 주관자로 작동할 수 있었으니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한 마디에 이 철학의 핵심이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제우스도 아니고, 헤라도 아니며, 헤라클레스도 아닌 인간이 만물의 척도요, 따라서 개별적 인간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역사 속에서 인간 해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진행은 허무주의로 귀결되었다. 고르기아스(Gorgias, ? ~380 BC)는 보편적인 덕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개별적인 덕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말로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극도의 허무를 가르쳤다.

 

너 자신을 알라. - 그리스 철학의 정점

극도의 회의주의 속에서 ‘참 지혜와 진리로 이끌어 주는 스승’이 아테네의 철학을 꽃피우게 되었다.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는 자연 연구에 몰두해있던 철학을 인간성찰의 방향으로 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간의 사고와 가장 가까운 개념은 이성이다. 이성을 통한 진리로의 길은 대화와 토론, 즉 사유의 변증법이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어진 확실한 개념의 상태가 공통성이자 보편성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신전에 쓰인 글이었다고 한다. 그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지’를 강조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있다.’의 상태가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아는 것이 선의 출발’이라고 믿었던 그는 ‘도덕적 신’을 강조하여 신화의 주인공들을 배제함으로써 종교계에 피해를 입혔다.

 

● 현실 세계는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

이상주의의 대명사 플라톤(Platon, 428~347 BC)은 20대에 소크라테스 수학했고, 최초의 자유대학에 해당하는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삼각형은 많다, 원형은 근본적으로 하나다. 정의의 상황과 모습은 여러 개다. 이상적인 정의의 원 모습은 하나다.’ - 이것이 이데아의 출발점이었다.

동굴 안에서 평생 그림자만 쳐다보고 살아 온 사람들의 비유에서, 동굴 안의 눈에 보이는 것이 현상 세계요, 동굴 밖은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실재 세계이다. 즉,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데아 중에 최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이다. 현상의 세계는 변함으로 참다운 세계가 아니고 이데아만이 변하지 않는 절대 이성의 참된 세계이다.

모든 인간의 의지와 행위는 선의 이데아에 의하여 지배되는 ‘참 실재’의 세계를 목적삼고 있다. 즉,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감성계의 경험적 존재를 목적삼지 않고, 세계 전체의 최고이상의 의미와 목적을 뜻한다. 현인은 영혼의 순화에 의하여 감성계를 벗어나 영혼의 실재화와 이데아 계를 바라는 철학적 진리를 직관코자 한다. 정의 사회, 즉 이상 국가는 4주덕[지혜, 용기, 절제, 정의]이 실현된 상태에 가능하다. 인격과 지혜를 갖춘 철인(철학자)이 통치자가 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 본분에 해당하는 덕을 발휘하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정의로운 국가인 이상 국가가 된다.

 

●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이며, 선으로 가는 과정에 덕이 있다.

필리포스 2세 주치의를 부친으로 두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3~322 BC)는 20년간 플라톤에게서 수학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기도 했다. 아테네 돌아와 소요학파를 이루었는데, 이데아의 실재성을 의심한 점에서 플라톤과 구별되었다. 경험과학적 사유를 통해, 존재하는 것은 현실세계 뿐, 학문적 대상이 되는 것도 현실계라고 생각했다. 이데아는 존재의 ‘원형’[플라톤]이 아니라 현실사물의 형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가졌는데,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덕을 쌓아야 하는데 이성에 알맞은 덕스러운 활동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윤리사상의 핵심은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이라는 입장이었다.

방법론으로서 중용의 덕을 찬미했다. 중용은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이다. ‘오만 / 긍지/ 비굴’이나 ‘아첨/ 친절 / 퉁명’은 각각 ‘지나침 / 중용 / 부족함’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Hellenism)은 그리스인을 의미하는 ‘헬렌(Hellēn)’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그리스 문화를 말한다. 굳이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를 때는 헬레니즘이 그리스 안에서 밖을 향해 전파되어 세계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던 시대를 이른다.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인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 예전의 페르시아제국의 영토 전역을 포괄하는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그 문화는 후일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성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철학으로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학파 등이 나타났지만 공통점은 무사안일을 지향하는 개인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밖으로부터 오는 장애에 극도로 민감했고 자기의 내면에 파묻혀 욕망을 최소한도로 줄이려 하였다. 빵과 물만 있으면 제우스와 부를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은둔주의를 내세운 에피쿠로스(Epikuros, 342?~271 BC)는 이 방면의 전형적인 현자였다. 안티테네스(Antisthenes, 4세기 초)가 창설한 견유학파역시 참 행복은 외부에서 주는 세속적 관심을 떠나 정신적 단순성과 정직한 노동에서 얻어진다고 믿었다. 덕은 행복의 원천이요, 덕에 따른 행위는 무욕과 자기억제를 전제로한다. 내면적 자기만족과 정신적인 자유를 행복으로 간주하여, 윤리적 귀착점은 자연상태로의 복귀이므로, 무욕, 현실과 가정 및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소외성, 반문명, 현실회피, 기성사상 절연을 목표로 한다. 디오게네스(Diogenes, ? ~ 323? BC)는 ‘쾌락에 속하기보다는 차라리 광인이 되겠다.’는 말로써 극단의 청빈과 무욕을 선언했다.

 

스토아철학

이 시기에 동양의 도학정신과도 상통하는 스토아철학(BC 4~2세기)이 이성주의의 기치로서 윤리적 인생관을 펼쳤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견유학파를 계승한 이들의 세계관의 근거는 자연이었다. 자연은 로고스(세계를 합목적으로 지배하는 법칙)와 일치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로고스적인 질서의 특수성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이성이고, 인간 이성은 자연의 로고스와 통하며 자연의 질서는 인간적 사유와 삶의 기반을 만든다. 욕망, 격정 등 자기보존의 본능을 극복하여야만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자연에 따른 생활이고 아파테이아(apatheia, 냉담)라고 불리는 현자의 생활이다.

 

로마 시대

기원전 700년 티베르 강변에서인구 1000명의 농촌 마을로 시작된 로마의 팽창은 헬레니즘 강대국들과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착실하게 세력을 넓혀갔고, 기원전 270년경에는 이탈리아 반도 거의 전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헬레니즘 세계를 장악하거나, 그 영향권 아래 두게 되었다.

로마의 속주가 된 이후 그리스는 독립과 자유를 상실한 대가로 평화를 유지하며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시대가 계속된다. 신흥국 로마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이었지만, 철학의 빈곤으로 아테네의 철학, 예술, 사상이 그대로 유입되었다. 로마인들은 지중해 지역과 유럽에 그리스 문화를 발전하여 퍼뜨렸고, 고대 그리스 문명은 언어, 정치, 교육 제도, 철학, 과학, 예술에 크나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옥타비아누스가 제정을 시작한 기원전 27년 이후 200년 동안 로마 세계는 국내외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을 ‘팍스 로마나’라 한다.

초기 로마에서는 네로황제의 스승이었지만 그에게 자살을 강요당한 세네카(Seneca, 4 BC~ 65 AD)가 군주아래에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여, 제정체제의 이념적 좌표를 마련했다.

달은 차면 기울듯이 로마 또한 기울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는 전통의 다신교 대신 기독교를 로마의 사실상의 국교로 정립했고, 전통의 로마 대신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세웠다. 그때부터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나뉜 제국은 다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였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5~493)에 의해 멸망했다. 헬레니즘 문화는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세력을 잃어갔다.

 

 

2. 중세의 헤브라이즘

 

기독교의 융성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고대의 막이 내리고, 1000년을 계속할 중세(476~1453)가 시작된다. 5현제(96~180) 시대에 벌써 신흥 기독교는 100년 경 순교의 극치를 이루면서 성장해갔다. 이 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한 기독교 승인은 문화적인 대변혁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헤브라이즘 문화로 바뀌는 계기가 되고, 기독교는 국교로 정해졌다.(394년) 또한 민족대이동(4세기 말~ 6세기 말) 시기에 게르만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럽역사의 신기원인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게르만족이 이룬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으로 영토를 넓혔고, 이탈리아까지 정복하여 800년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제국과 대비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비잔티움제국에 헬레니즘이 잔류하고 있는 동안, 신성로마제국에서는 기독교의 문화, 즉 헤브라이즘의 꽃이 핀 것이다.

 

헤브라이즘(Hebraism)의 원형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 즉 구약성서에 기초한 유대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반을 둔 현세부정의 사상이다. 고대의 시대에는 타계 관념은 있었어도 현세의 가치는 부정되지 않았는데, 이 시기의 종교는 인간은 영원히 이 세상에 전생하며 고통을 경험하여야만 된다든지, 타고난 죄(원죄)의 관념 등을 가르쳤다. 헤브라이즘은 신에 대한 복종과 윤리적 행동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이상들을 포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헤브라이즘의 본질은 ‘양심의 엄격함’으로 규정된다.(매튜 아놀드) 헤브라이즘의 중심에는 절대자인 신이 존재하며 신은 언제나 도덕적인 존재로 상정된다.

 

유대교는 고대 이스라엘 왕조가 바빌론 유수(597~538 BC) 후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정립된 것이고, 다른 뿌리로는 고난의 종복이 구제받는 구제관이 강해지고 나사렛 예수에 의해 구제가 실현되었다는 믿음이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에서 출발하여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하면서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 · 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중세의 세계상은 기독교와 봉건제도의 두 축으로 안정되어 폐쇄 응집된 계급으로 분류된 조화된(것처럼 보이는) 질서의 상을 보여준다. 신은 존재의 피라미드에서 최정상이며, 최고의 존재하는 자, 모든 사물의 최초의 운동자이다. 모든 제한, 예외, 이단운동 같은 경계현상을 포함해서 지상적인 것은 최종 목적으로서의 신적인 표상에 따라 정돈된다.

창조의 핵으로서 인간은 정신적-영적이자 선한 세계와 물질적이자 악한 세계를 연결하는 부분이다. 인간은 선과 악, 신과 악마, 구원과 원죄 사이에서 투쟁하는 현신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 또한 신의 창조물이며, 신에 의해 영도된다. 역사는 구세사이며, 낙원의 추방에서 시작되어 최후의 심판일까지 계속되며, 그 이후에 비로소 신의 왕국이 이 땅에 도래할 것이다. 왕국들과 황제국은 신의 왕국이 우선 지상에서 잠정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이해된다. 개개인은 이 신의 질서 속의 작은 한 부분이며, 그에게는 이 질서 속에 특정한 확고부동한 자리가 점지되어 있다. 개인은 ― 오늘날 현대에서와는 반대로 ― 결코 개인이라고 느끼지 않으며,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느낀다.

 

●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카르타고 출신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0~222)는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고도 초월하는 신앙적 계시에 의한 것이므로, 때로는 초이성적이며 반이성적 진리적 인식을 호소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명제로,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다른 차원임을, 신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어떤 평신도도 플라톤 보다 우위에 있다, 신앙은 철학을 포함하며, 계시는 이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고대와 중세의 인간관에 현저한 차이가 발생했다. 고대 헬레니즘에서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영육의 구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세 기독교의 인간은 영은 신에게 육체는 자연물질에 속하는 양분법으로 나뉘었다. 육에 이르는 길은 타락의 길이며 죄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생각하여 신학교를 중심으로 금욕주의가 발생했다.

최초의 신학원(교리학교)이 180년 경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원의 클레멘스(Clemens, 150~211)는 이교도로서 그리스 철학을 섭렵한 뒤에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이해와 인식을 위해서 플라톤이나 스토아 철학적 방법을 도입했다. 신의 뜻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으로, 그리스인에게는 철학으로 나타났는데, 둘이 완성된 것이 그리스도의 진리이라고 생각했다.

 

클레멘스를 이은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스스로 거세한 금욕주의자로 신을 향한 인간의 질서에 관해 깊이 사색했다. 세계는 신의 피조물이고, 신은 만물의 영원한 근원, 영원, 불변, 전능, 전지이다. 피조물은 완전자에 대한 동경을 갖는데, 그것이 신앙의 원천이고, 구원에의 갈망이다. 주어진 자유를 오용하여 태만과 과오, 타락의 시계로 떨어진 인간의 지상의 삶은 훈련과 징계의 연속이므로 세속적인 욕망, 결혼, 병역, 관직 등을 버리고 초연한 신과의 일치와 안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교육했다.

 

●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자유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이자 가장 영향력을 가졌던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뒤늦게 기독교에 귀의하여 고대철학을 극복하고 중세철학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신앙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 신앙이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과 일반 학문을 함께 연구하는 중세의 스콜라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신학적 공헌은 은총론으로, 세계는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지되,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며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라는 예정설을 세웠다. 그의 결론은 『고백록』(400년)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부야말로 진리가 머무는 집이다.’ ‘믿으라, 그러면 인식하리라.’ ‘믿기 위하여 인식하라.’라고 가르쳤다. 인식보다는 진리 자체가 중요하고, 윤리보다 신앙적 구원이 절실한 것이었다.

 

스콜라철학

중세 전반부는 교부철학의 시대라고 한다면, 9세기경에는 교단과 신학원(대학)에서 스콜라철학의 융성을 보게 된다.

 

●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캔터베리 대주교 안젤무스 (Anselmus, 1033~1109)는 신은 실재이며 완전한 보편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스콜라철학의 본질과 위상, 신의 존재에 관한 본체론적 증명을 시도했다. ‘존재가 있는 이상 최고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최고가 아닌 존재는 최고의 존재에 그 존재성을 의뢰한다. 최고의 존재는 스스로의 본질에 의뢰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고가 되지 못하는 때문이다. 즉, 최고의 존재인 신의 본질은 그 존재성을 포함한다.’ 즉, 본질이 실재를 포함한다는 입장이었다. ‘신이 만일 형이상학적 존재를 가기지 않고 의식 내용에 그친다면, 형이상학적 준재와 의식 내용을 아울러 가지는 자는 신보다도 완전한 것이 되며, 따라서 신의 최고 완전성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신은 형이상학적 존재도 가진다.’

 

프란체스코 교단

영국 출생으로 프란체스코 교단의 창시자였던 알렉산더(Alexander, ? ~1245)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교회철학으로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그에게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범론(summa)’ 즉, 많은 저서를 통해 학자로서 인정받는 관습이었다. 현대적 의미로 논문의 형식이라 할 수 있게, 신학 및 철학적 문제를 제시하고, 답은 성서나 교부들의 말에서 전승되거나, 철학자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어야 한다. 마지막은 자신의 생각으로 결론짓는다는 것이다.

 

도미니크 교단

프란체스코 교단이 신앙생활에 더 큰 뜻을 두었다면 도미니크 교단은 학문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인 알베르투스(Abertus Magnus, 1206~1280)는 ‘보편적 학자(Doctor Universalis)’답게 모든 것을 인용했고, 자연은 아리스토텔레스, 신앙은 아우구스티누스, 의학은 히포크라테스 의존하면 된다고 말했다.

경험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동식물과 광물계의 관찰과 천문학적 연구를 하였는데, 이 영역에서는 경험만이 확실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관찰 결과에 근거하여 주저 없이 정정하면서도, 교육을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학문, 즉, 철학이 불가결하며 이 같은 세속적 학문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선의 교사라고 확신하였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나폴리 귀족 가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기독교 신학과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철학을 대성했다. 근본 사상은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은 엄밀히 구별되지만, 이것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 신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필연적인 조화라고 생각하였다. 철학과 신학의 조화에서 신학은 내용, 철학은 방법이 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인 한에서 진실한 것이다.

또한 자연이 은총에 의해 버림을 받지 않고 완성되는 것처럼, 자연적 이성은 신앙의 전단계로 신앙에 봉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신앙과 이성(은총과 자연의 빛)을 조화시키는 데에 있어 이성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며 종교적 진리에 대한 반대를 논박할 수 있다. ‘보편은 개체 중에 존재한다.’는 확신에서 이성과 신앙의 통일을 주장하게에 되었음은 중세신앙의 중요한 변화의 전기가 되었다.

 

● 영혼의 불꽃

다음 세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1260~1327)는 도미니크교단 소속이었지만 정통 기독교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바꾸어 놓은, 신비학의 창시자에 해당한다. 신비적 체험을 설교하되, 그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합일을 설교하는 정감어린 것이 아니라 지적이며 사변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영혼의 불꽃’이란 개념이다. 사람이 순수하게 신을 생각하고 자기를 벗겨 버리면 마침내 신이 항상 마음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영혼의 근저에 있어서의 신(신의 자식)의 탄생’이다.

완전히 개성적인 것을 향하는 경향 때문에 신비주의적 경건성은 점차 루터의 종교개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종교 자체가 전통적인 신앙에서 이탈되었다는 것은 중세의 종말을 의미하며 무신론에의 길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들은 또한 인문주의자들로서 르네상스시대에도 활동한다.

 

 

3.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

 

인문주의(Humanism)의 어의는 다양하며, 인간주의, 인본주의, 인도주의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로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인간 또는 인간에 관한 것에서 가장 중시하는 정신태도’로 정의된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특정의 체계적 사상을 가리키기보다도 오히려 인간을 존중하는 윤리적 태도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개별 인간의 이해와 가치 그리고 위엄을 지향하는 철학이자 세계관이다. 관대함,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양심의 자유 등이 인간 공동생활의 중요한 원칙으로 간주된다. 일반적 의미에서는 휴머니즘이라고 하고, 좁은 의미의 역사적 개념을 말할 때는 인문주의라고 한다. 특히 15세기의 이탈리아를 정점으로써 개화한 서구 르네상스와 관련하여 르네상스 인문주의라고도 한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유럽 공통의 문화시대를 지칭한다. 프랑스어로서 ‘재탄생’을 의미하며, 재생이란 한 번 사멸한 고대 문화가 그 시대에 소생한 것을 의미했다. 넓게는 고대의 문화적 재생, 예술과 사상의 재활이라는 범 유럽적 운동을 지칭한다. 특징은 인간 긍정의 지적운동으로, 고대의 재발견과 중세적 정신형태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한다. 그것은 지상적 인간의 활동과 인격을 재평가한다는 의미였다. 중세적인 세계상과 인간상을 극복하고, 전래(고전시대)의 국가질서와 사회질서를 극복한다는 것은 전권신앙의 자리에 비판적인 연구의 정신이 자리하고, 인간은 모든 사물의 척도가 되며, 국가의 이성이 정치의 원칙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적으로는 인문주의 정신에서 고전적인 고대가 재탄생한다는 뜻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핵심에는 휴머니타스 연구의 정신이 존재한다. 이는 고전적 인간교양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고전 고대의 문학적 연구라는 측면과 보다 좋은 인간을 형성하기 위한 지식추구라는 측면을 겸비하고 있다. 휴머니타스 연구는 과거의 신성연구에 대신해 새로운 시대정신의 모체가 되고, 그것은 피렌체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각지에 공명을 부르고, 르네상스 문화의 번영시대를 실현하게 된다. 여기에 새로운 진보적인 원칙들이 도입되었다. 핵심은 인간성 회복이 중심 과제로, 인간 중심의 학문과 사상의 탄생한 것이다.

 

중세는 종교의 시대였고, 기독교 신앙이 모든 사상계를 좌우, 은총과 조화의 질서가 가장 충만하게 채워진 기간이었다. 철학과 사상은 신학의 그늘 아래, 학문과 예술은 종교적 목적에 봉사, 인간은 신의 뜻과 질서에 순응하면 그만이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 준비된 신의 선물이다. 인간의 영적 실재인 정신의 신에게 속하고, 육신은 물질과 통하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제 중세의 신비적-정신적 경향의 형식언어가 세속적, 수학적-과학적 명증성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비잔틴에서 이탈리아로 온 그리스 학자들의 몫도 컸다. 1400년만 해도 비잔틴에는 서로마가 망한 뒤 여전히 천년의 고대문화를 간직했던 학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정신이 그대로 활발히 살아 있었다. 1453년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이 터키에 정복당한 뒤, 많은 그리스 학자들이 침략자 터키인들로부터 도주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그리스-로마 작가들의 원고를 들고 베네치아며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들로 이주했다. 유럽 전역에 예술의 재활과 고대 정신의 재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연원으로 돌아가라!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헤브라이어와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가능하면 새로운 언어로 전달하고자 했다. 성서의 신학적 해석에서도 또 철학적 논의들에서도 가능하면 고대의 원천에서 그 기초를 끌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문주의자들의 구호는 ‘연원으로 돌아가라 Ad fontes’(에라스무스, 1511)였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1469~1536)는 초기 근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많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 꼽힌다. 유명한 저서 『우신예찬』(1509/1511)은 영국인 친구 토머스 모어 Thomas More(1478~1535)에게 헌정한 라틴어로 쓴 아이러니적 교훈서로서, 이탈리아와 영국 체류에서 얻은 경험들을 다루었다. 의인화된 ‘우매’는 ‘자애’, ‘아첨’, ‘건망증’, ‘나태’ 그리고 ‘쾌락’이라는, 소위 치명적 죄악의 이름을 가진 딸들과 더불어 세상을 비굴하게 만들어간다.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쓸데없는 논쟁,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위선, 칼과 불을 가지고 기독교도의 피를 흘리게 하는 고위 성직자들, 이런 것들이 모두 ‘우매’의 승리라고 비웃었다.

‘인문주의자의 영주’요, 지적인 자유를 위한 투사는 중세의 구조에 대항해 싸웠고, 유럽의 자유를 위해, 시대정신에 대항해 싸웠다.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정신으로의 복귀를 역설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나왔다. 인문주의란 ‘보다 인간적인 학예’를 초래하려는 운동인데,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에라스무스가 ‘기독교의 복원’을 원하여 가톨릭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성서의 교정을 시도하고, 고대 학예를 소개함으로써 경화된 사고방식과 견해를 시정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인문주의의 정도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의 역할

원래 고대의 예지와 기독교적 윤리의 연결을 수단으로 내면의 개혁을 추구해갔던 학교와 대학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후일의 종교개혁의 선구가 되었다. 교육기관은 처음에 교회나 수도원의 부속학교가 교육을 담당하는 동안에는 스콜라철학 위주였지만, 12세기 이후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의 특색은 성직자의 양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문의 기틀을 다지는 데 있었다. 대학은 교회의 전래된 스콜라 사상과 결별하고, 교회의 저항에 대항했다. 많은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운동은 마지막에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서 촉발된 종교개혁의 성립에 기여한 부분이 크다. 루터와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도 초기에 여기에 속했다.

 

절대주의 사회

17세기 유럽은 정치적으로 왕이나 영주의 무제한의 통치권을 의미하는 절대주의가 폭넓게 각인되었다. 절대국가는 각자가 특정한 계급으로 태어나며 거기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사회위에 군림했다. 이 신분사회 최상부에 귀족이 자리하는데, 그 또한 절대적인 통치자에 의해 많은 부분 권력을 거세당했지만, 그 대신 면세의 특권과 토지소유권을 확보했다. 시민계급은 한편으로는 국가적으로 경영되는 중상주의 경제의 담당자이자 이용자이었고, 그러나 귀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영향력도 없었고 특권 또한 전무했다. 가장 큰 고통은 농부의 몫이었으니, 국가에 대한 세금과 땅을 갈아먹는 지주에 대한 공납이었다.

신성로마제국 독일을 예를 들면 주민의 75%는 농업으로 생계를 삼고 있었다. 이 대부분의 시골주민들에게 가톨릭과 신교는 왕과 영주들과 결탁하여 소위 ‘신의 뜻’인 그들의 운명에 순명할 것을 설교했다. 무지와 미신(마녀 광신), 편견, 깊은 회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계몽주의

18세기가 되면서 세계상은 달라졌다. ‘종교’라는 오랜 화두 대신 이제는 새 이념인 계몽주의(+고전주의)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럽으로 확대되어 갔다. 미합중국과 서유럽의 대국들이 점차 강해지고 국가와 사회생활에서 발전의 담당자가 되어간다. 유럽 전역의 의미에서는 산업자본주의와 자본소유 시민계급의 출현으로 귀족계급과 시민계급의 대결이 현실로 닥쳤다.

절대주의의 권위는 도전받기 시작했다. 우선 프랑스에서 시민계급의 일부 특히 지식인들과 몇몇 귀족들이 이 상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사고의 명령에 준해서 그것을 평가했다. 절대주의 대신 자유를, 신분질서 대신 평등을, 편견 대신 경험과 학문적 인식을, 교의주의 대신 관용을 ― 이것이 새로운 이상이었다.

피안에 대한 희망 대신에 낙관주의의 인간은 그의 생의 감각을 차안에서 보아야 했다. 그들은 선을 행해야 했고, 그들의 덕성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후일의 형벌(지옥, 불)에 대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그 정당성과 유용성에 대한 인식에서 전개되었다. 인간은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억압에 대해 ‘계몽’되어야 했다. 인간이 우선 이 억압의 원인들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들에게 정당한 목표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해방될 것이라고 계몽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이 경우 계몽주의는 ‘인간은 생득적으로 선하고, 그러므로 올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신학관의 세계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적 세계관을 부각시켰다. 근대 자연관에서 사용된 방법론은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경험으로 보고,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공통점을 추출함으로써 어떤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하려는 경험론으로 발전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로 유명한 영국의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우상을 타파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연 과학적 지식의 유용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후세에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 지성의 방법을 통한 참다운 지식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고자 하였다. (정복지향적 자연관)

베이컨은 『신기관』(1622)에서 낡은 우상의 파괴를 요청하고 낡은 스콜라식 삼단논법을 비판했다. 파괴해야할 우상으로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 네 개의 우상을 들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투렌 지방의 귀족 출신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지식 연구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원인ㆍ결과의 연관을 취하여 인간 본질을 개선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가 염두에 둔 보편학이란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 근거하여 형이상학, 의학, 역학, 도덕 등을 포함하는 학문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의 성과는 무엇보다 방법적 회의에 있다 하겠다. 방법적 회의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자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한다. 사유의 내용은 의심할 수 있어도 사유한다는 사실과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는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제1원리로 내놓았다. 이 명제는 신으로부터 출발한 객관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신앙으로 강요하는 중세적 스콜라철학에 대항한다. ‘생각하는 나’, 즉 ‘인간의 의식’이 우선한다.

 

●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국토 전체가 크게 황폐화된 독일은 근대화 물결에서 다른 유럽 여러 나라보다 낙후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영국의 경험주의자들과 프랑스의 합리주의자들의 철학은 독일에서도 점차로 정신생활에 대한 교조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영향을 감소시켜 갔다. 루터 이래로 넓게 퍼진 영혼의 공포와 종교전쟁에 의하여 뒷받침된 비판적인 현세부정을 수반한 이원론적으로 분열된 세계상, 그리고 신앙인들 사이에 여전했던 기적신앙과 유령신앙은 이성의 광명과 새로운 낙관주의 앞에서 후퇴해 갔다.

비판철학의 창시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게서 계몽주의의 개념 규정이 나왔다.

‘계몽주의란 자신의 잘못으로 된 미성숙상태로부터의 인간의 탈출이다. 미성숙상태는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자기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을 말한다. 만일 이 미성숙의 원인이 이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이 스스로 이용하겠다는 결심과 용기의 결핍에 있다면, 이 미성숙상태는 자신의 잘못으로 된 것이다.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를 가지라!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표어이다.’(1784)

그 외에도 칸트의 ‘정언 명령’ 개념은 현대에까지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정언명령의 2가지 원리 중 보편주의 원리는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고, 인격주의 원리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일이다.

인간의 이성이 꽃을 피우는 계몽의 시대에 계몽사상가의 좌익을 이루며 계몽주의조차 비판한 루소(J. J. Rousseau, 1712~1778)에게는 ‘모순적’이라는 형용사가 따라 붙는다. 인간은 출신에 관계없이 평등한데 불평등은 사유재산에 기인한다고 하면서도, 작은 소유를 인정하고, 노동을 높이 평가하는 소시민(쁘띠 부르주아)적, 수공업자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물질과 정신은 함께 영원히 존재하는 원리라고 보는 이원론에 서서 영혼은 불멸하다고 보면서 이신론(理神論)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도덕적 관념은 생득적이며, 모든 사람의 판단은 이성에 의해서이고, 개인에게는 자유가, 사회에서는 평등이 보장되는 삶과 국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학적으로는 봉건적 전제 지배를 격렬하게 공격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강조했다.

『사회계약론』(1762)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인데, 지금은 어디에서나 사슬에 얽매여 있다.’고 주장했다.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그에게 인간의 자연적 충동은 건전하고 선량하다. 사회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장소이다. 인간은 한때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지만, 이제는 겉꾸밈과 경쟁, 과시적 소비 속에서 살고 있다. 각종 제도는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작용을 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계몽주의 자유사상이 정신적 원인이 되었고, 이성적인 힘과 자유의 정신이 프랑스의 정신세계를 일깨워 혁명적 민중봉기를 낳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유, 평등, 박애 - 여기서 박애정신은 기독교 전통의 사랑이 아니라 휴머니즘 결실로서의 박애정신이다.

 

● 역사는 자유의 전개과정이다.

독일관념론 철학을 완성시킨 체계적 형이상학자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에게 세계는 ‘정신(Geist)’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그의 입장은 절대적 관념론으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Friedrich Wilhelm Schelling, 1775~1854)의 객관적 관념론의 모순 대립을 매개하여 통일한 것이자 이 두 입장을 관념론의 웅대한 하나의 철학체계로 종합하여 완성시킨 것이다.

『정신현상학』(1807)에서는 절대자의 자기인식, 곧 절대지의 생성 과정의 역사를 기술했다. ‘사고와 존재의 완전한 동일성’의 주장은 이성적인 것만이 진실로 현실적일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은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할 것이라는 근본적 전제를 말한다. 이성개념(절대자)이 정립ㆍ반정립ㆍ종합의 3단계를 거치는 자각의 과정이 변증법이다.

세계정신의 화신인 인류는 역사의 과정에서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점점 더 큰 자유와 완성으로 신적 이성의 확대로 점점 더 크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세계사를 신의 이성의 단계적인 구현이라고 간주했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객관적 정신의 최고의 형태로서 이성적인 인간은 현대적인 국가를 창출한다고 믿은 것이다.(『정신현상학』)

헤겔 철학에서 인간은 신의 전지에 맡겨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셸링은 개개의 현실적 인간으로서의 실존의 입장에서,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 등 헤겔 좌파는 사회적 현실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각각 그들 나름대로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셸링에서 후일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에 의해서 실존주의로, 후자의 입장은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주의로 각각 계승된다. 독일관념론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시작되어 헤겔의 사망(1831)으로 끝났다고 간주된다.

 

☞ 2강으로 계속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