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실
『PEN문학』2012 5,6월호(통권 108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146-165쪽.
은실이 거의 울고 있었다. 늦은 저녁시간이었다. 은실은 내 바로 손아래 동생이고, 딸 뿐인 집안에서 아버지 어머니랑 함께 사는 효녀다. 사람 좋은 제부 덕에 그만할 것이었다. 그런 은실이 전화 저 쪽에서 말을 잇지 못한다.
언니, 어쩜 좋아.
왜, 왜 그러는데? 아버지가 안 좋으셔? 아님 엄마가?
아니, 승연아빠가, 승연아빠가 그래. 무서워 죽겠어. 지금 병원에 있어.
뭐야, 이 밤에? 그럼 입원한 거야? 왜? 그리 단단한 사람이?
강단은 무슨. 조용했지, 그냥.
그래, 조용했던 사람이 왜? 어디가 아파서? 무슨 병이냐니까?
모르겠어.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아. 아무 상관없는 말들을 계속 내뱉고 있어. 기계처럼. 무서워 죽겠어.
뭐라 그러는데?
병원에서 그대로 입원시켜놓고 집에 연락을 했다니까. 해서 그냥 쫒아왔어.
병원에서 바로 입원을?
그래, 옆방 놀이치료실 여선생이 퇴근하려다가 들여다보았었대. 검사시간은 벌써 끝났는데 안에서 소리가 나서. 승연아빠가 검사실에서 혼잣말을 하고 있더래. 얼마나 놀랐겠어!
뭐야?
치료실 선생이 김샘, 김샘을 아무리 불러도 안 되니까 이비인후과 진료실에 가서 사람들을 불러왔대.
뭐야, 그럼 정신이 나간 거야?
뭐 그런 거 비슷하대나 봐. 한 박사야, 나 무서워.
거기서 한 박사는. 그래 언니가 일단 올라갈게. 낼 일찍 출발해도 한낮이 다 되겠지 뭐.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계셔?
자세히는 말씀 안 드렸어. 어지럼증으로 퇴근 못 하고 그냥 병원에 있다고 둘러댔어. 물론 의아해하시지, 언제 아파 누운 사람이었어? 링거 꼽고 누워있으니 병원 가서 함께 있겠다고 왔지 뭐.
제부네 집은? 누님이랑 형님이랑?
나 좀 봐. 어머나 몇 시야, 더 늦기 전에 거기 먼저 연락해야지. 끊어, 끊어!
은실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제부네 쪽에 연락도 않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은 그냥 본능이었을 것이다. 제 일이니까 제 언니에게! 그만큼 남편의 일과 자신의 일을 동일시 한다는 뜻에서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지금쯤 제부네 집에선 얼마나 놀랐을까. 거긴 부모님이 안 계시고 큰형이 아버지 같은 집안이라 했다. 자세히는 내 머리 속에 없다.
달력을 올려다본다. 낼 올라가면 월요일까지는 괜찮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갈 생각으로 미리 간단한 짐을 챙겨둔다.
봄은 봄인데 우중충한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내릴 것 같다. 나서다 말고 다시 현관문을 열고 구석의 우산을 구겨 넣는다. 살 하나가 잘 굽지 않는다. 은실은 비뚤어진 우산을 보면 칠칠맞다고 핀잔일 것이다. 한길에 나서자 물주전자를 내려놓았는지 가스를 잠갔는지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다시 집으로 향한다. 내 방이 화재에 휩싸이는 것도 문제지만, 방화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옆방에 사는 사람들의 인생을 흠집 내서야 되겠는가.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성가시기도 하다. 무늬가 짝짝이 다른 양말이 눈에 들어와서 미소가 나온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양말이라고 해서 꼭 아름다울 리는 없다. 나는 괜찮다, 조금 다른 무늬의 짝짝이 양말이. 무늬도 다른 양말이 싸지도 않네, 라고 하던 은실이 생각났다.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생산가를 지불하는 것이라고 했더니 은실은 웃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부러 다른 무늬로 짜면서 경제성으로 그랬다고 하지는 않겠지, 하면서.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면 동생이 그냥 언니보다 더 언니 같아지나 보다.
제부가 근무하는, 아니 지금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가려면 평택에 내려서도 근 한 시간을 이동한다. 집이 더 가깝지만 방향이 다르다. 짐이 짐스럽다. 이래서 사람들이 장거리운전을 마다하지 않는지 모른다. 병원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버스에서 내렸지만 건물에 들어설 즈음에는 사실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긴 시간 기차에 버스에 시달려서이기도 하겠지만, 병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겁이 난 탓이리라.
저, 청력검사실 김 선생님이 입원하신 곳이 어딘가요?
안내에선 청력검사실 김 선생님을 잘 몰랐다. 이름 석 자를 대고서야 안내 받은 곳은 그냥 이비인후과 병동이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귀에 문제가 있다면 그리 대순가? 일단 병원 밖의 일반인들은 이비인후과라면 조금 안심을 하게 된다. 안과라고만 해도 만에 하나 실명에 이를 병도 있어 무섭지만, 귀머거리가 된들 좀 어떠랴, 그런 마음이 되는 것이다.
병동 간호사는 내가 처형이라는 말에 다소 놀란다.
김샘이 우선 우리 병동에 계시긴 한데, 지금 들어가시기가 좀 뭣하신데요.
예?
놀라실까봐서요. 계속 헛소리를 하다 잠들다…….
그렇담 간호사님 말씀을 들어야겠지요 뭐. 그런데 어쩌다가?
모르세요? 어제 퇴근 무렵에…….
간호사는 소리를 낮춘다.
어제 퇴근시간에 놀이치료실 민샘이 첨 발견했대요. 검사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중얼중얼, 암튼 모두가 놀랐대요. 일단 병동에 입원해 놓고 밤엔 응급검사 몇 가지만 했고, 오늘은 보자, 지금 정신과 쪽에서 검사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피.에이.아이도 할 수 없는 상태고.
그게 뭡니까?
네, 성격심리검사 종류요, 그런 것이 기본인데 한 시간 쯤을 조용히 검사를 못 하죠 아직은. 그게 디.에스.엠 - 그게 혹시 정신질환 진단 관련해서요.
어쩌나. 식사는 제대로 하나요?
그럼 좋게요. 링거 들어가는데, 안정제랑 함께죠, 지금 다이아제팜 10미리그람 맞고 잠들었을 걸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이던 나는 결국 복도 한쪽 휴게공간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은실에게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야 될 일이었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일단 좀 시원했다. 전화기는 속 어딘가로 들어가서 얼른 잡히질 않았다. 그 사이 은실이 전화가 세 번이나 걸려와 있었는데 몰랐다. 기차에서 진동으로 바꾸어 놓은 때문이었다.
나야, 언니. 병원에 왔어. 왜 승연아빠 혼자 있어?
일단 아침 회진까지 보고 잠깐 집에 왔지. 며칠이나 걸릴지, 챙겨 갈 것도 있어서. 승연아빤 어쩌고 있어?
병실에 못 들어갔어. 간호사가 들어가지 말래. 자다 말다 혼란스러워 한다고. 아직 검사들도 안 끝난 모양이야.
그럼 어쩌나. 언니, 나 곧 출발 하니까 언닌 집에 와. 와서 아부지 어머니 보고 갈 거지?
그래.
암튼 언닌 집으로 와. 승연이 승주 좀 봐 줘. 언니, 일감 가지고 왔지, 노트북이랑?
왜, 일감은?
빨리 내려갈까 봐서 그러지, 며칠 좀 있어! 그럴 거지?
우선 여기 있어 볼게, 천천히 와.
휴게공간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개그프로가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에겐 다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할 수 없이 병원건물 밖으로 나가볼까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시간을 보니 구내식당 같은 데 식사는 끝났을 것 같았다. 뭔가 뜨겁고 물기 있고 매운 것을 먹고 싶은데. 왜 이런 순간에 시장기가 밀려오는지. 가끔 이렇게 느닷없이.
혼자 살아온 시간들이 통째로 시장기로 몰려오면 기억은 늘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무슨 생각으로 이역만리 공부를 향해 돌진했을까. 무슨 자랑이라고 외국문학의 박사가 된다는 것에 청춘을 걸었을까.
외환위기의 봄. 졸업식을 앞둔 겨울, 책에서만 배웠던 국제통화기금이 실체로 다가왔다. 아이.엠.에프 위기. 사람들은 장롱에 넣어두었던 금반지들을 내다 팔았다. 그보다 앞서 재미교포들이 달러를 모아 보내오기 시작했단다. 놀라운 애국애족이었다. 난 아니었다.
세상은 안팎으로 흉흉했다. 그 한해도 뉴스는 온갖 죽음들을 날랐었다. 여름에는 대한항공이 괌에서 추락했다. 200명도 넘게 순간에 그냥 변을 당했다. 베트남항공이 뒤따랐다. 작은 비행기였던 것이 그나마 다행, 한국인도 있었다. 그 사이 세기적인 교통사고가 있어 떠들썩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죽음. 37세로 굵고 짧게 살다간 영국여자의 최후가 된 파리의 터널은?
그 겨울 나는 파리를 향해 진력하고 있었다. 사실이지 도망갈 궁리를 했다. 우선 재수마저 시들시들 실패한 은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컸다. 우리는 마주앉아도 말이 겉돌았다. 떠날 구실도 좋았다. 대학졸업장은 은실에겐 미안함이었고, 사회엔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했으니까. 영문과 부전공을 했던 친구들은 예상 밖으로 입지가 넓어졌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전격적으로 영어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영어 세상이 점점 더 확실해졌다. 그러니까 멋모르고 다른 부전공을 하지 않았던 내 불어교사 2급자격증은 별 쓸모가 없었다. 임용고시에 아예 불어과는 없었으니까. 더러 사립학교에 원서를 넣어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용기를 낼 이유가 있어야 했다. 나한테는 용기가 없었겠지만, 이유도 없었다.
봄이 되자 꿈틀거렸다. 그동안 공들였던 알리앙스 프랑세즈는 내게 곧바른 길을 보여주었다. 아버지도 대학원 진학이 틀어졌으니 일단 파리 행이 낫겠다고 하셨다. 언제까지가 상현달 인생이었을까? 아니, 조금 뒤까지도 달은 자라나고 있었을까? 손에 묻은 크루아상의 기름기를 닦고 또 닦으면서, 바게트 부스러기를 줍고 또 주우면서, 그렇게 살면서 느꼈던 허기, 시장기 속에서도.
그때의 허기는 비단 위장의 시장기만은 아니었다. 쥬 느 꽁프랑 빠, 쥬 느 쌔 빠 - 프랑스 말 잘 못한다는 구실로서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화불량을 누군가 위의 문제라고 말한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소화불량은 귀의 문제였다. 삶은 언어로 비롯되고, 귀가 불량이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으.에프. 캠퍼스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대학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제9구역의 캠퍼스에서 주변문화를 향유하며 또는 홈스테이를 통해 반쯤은 프랑스 사람이 되어서 대학에 들어가는데 무엇이 힘들랴! 국일관이며 참새와 방앗간 등 한국식당도 좋을 것이고.
그때 나는 귀의 소화불량으로 영양실조에 걸려 입으로만 먹어댔다. 바게트를 먹다가 물리면 크루아상으로, 다시 곧 바게트로. 요리가 예술인 세상에서 무조건 빵들만 먹어댔다. 은실이가 - 은실은 내가 떠난 그해 겨울에 결혼을 했다 - 빈 우유깡통에 넣어서 땜질해서 보내준 고추장은 잼 대용이었다. 그렇게 탄수화물을 먹어댔으니 뚱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지고 간 옷들이 많지도 않았지만 곧 꿰어 입을 수도 없이 뚱보가 되어갔다. 패션의 중심에서 뚱보는 가만히 엎드려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공부는 가만히 엎드려야 잘 되기도 한다. 그 덕택에 공부는 빨리 된 셈, 그것밖에 하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그것이 괜찮은 것인 줄 알았다. 파리에 살면서 파리도 모르고 파리 사람도 모르면서도 서둘러 학위를 끝내는 것. 그것만이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파리는 자판위에서 적당히 벌리고 춤추던 내 손가락 사이로 다 사라지고 없었다. 파리에서 살면서 파리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 그 다음에는?
아니 그런데 속이 쓰리다. 어디 컵라면이라도 먹어야겠다. 매점엘 가자.
그런데 금의환향처럼 돌아온 모교 캠퍼스에서는 어땠나? 그러고 보면 연속…….
언니, 어디야? 집에 가고 있어?
아니, 그냥. 너 오는 것 보고 갈까 해서. 기다릴게.
어, 그래?
은실은 안절부절못했다. 계속 전화를 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금의환향인줄 알고 돌아온 그때, 맙소사,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은실은 거의 만삭이었다. 둘 째 아이였다. 세 살 승연이는 뒤뚱뒤뚱 걷다 넘어지다 했다. 웃다가 침을 흘렸다. 우리가 헤어져 있던 4, 5년 사이 은실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있었다. 튼실해진 은실이. 김실이가 된 은실이. 제부는 조용했지만 은실이 기댈 만한 어깨를 내주었나 싶었다. 나는 뭔지 모를 짐을 벗은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명치끝이 막히곤 했다. 막힘과 허기가 샴의 쌍둥이였을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은 프랑스어 때문만은 아님이 분명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모교의 괜찮은 강사시절에도 마찬가지로 허기 속에 살았던 것 같다. 입은 늘 말보다는 먹는 일을 탐했다.
강의는 어쩔 수 없었다. 강의는 말로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통로였다. 그런데 내 강의는 살아있는 말이 아니었다. 첫 학기에는 조심스러워서 그랬겠지만, 난 늘 강의 거의 전부를 미리 써둔다. 그러니까 다음 날 가져가서 하는 강의는 이미 죽은 것들이다. 보고 읽지 않고 외워서 읽더라도 마찬가지다. 간밤에 벌써 태어나서 조금도 자라지 않은 그 물체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중간에 살짝 농담이라도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면, 그것까지도 살짝 표시를 해 둔다. 내가 강의시간에 혹시 농담을 했더라도 그것마저 즉흥적이 아니었으니 죽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머리통은 즉흥적인 발상이라거나 융통성이 없이 꽉 막혔다. 유연성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라 해도 내겐 없었다. 속이 말랑말랑한 식빵을 뜯어먹게 된 것이 한국에 돌아와서 빵의 변형이었다. 말랑말랑한 음식을 먹는다고 유연함이 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은 정말 따뜻하다 뭣해 뜨겁고 매콤한 무엇이 절실히 그립다. 이 병원 마당에서. 저만치엔 틀림없이 장례식장이 있을 것이고, 장례식장에는 뜨거운 국물이 있을까?
멍청하도록 무례한 생각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식당에는 점심이 없을 시간이지만 장례식장엔 스물네 시간 식사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맞다. 그렇지만 배가 고픈 순간 장례식장을 떠올렸다면 참 엽기적이다. 아니, 결혼식장을 돌며 하객인양 점심을 해결하는 얌체족 이야기는 들었다. 축의금 봉투를 내밀어야 식권을 나누어주는 중산층의 결혼식장이 아니라, 아예 밥표 같은 것을 초월해서 식장이자 식당인 거대한 홀로 안내하는 부유층의 결혼식에 끼기가 쉽단다. 그러려면 옷만 잘 갖춰 입으면 될 터. 의복이 날개라고, 옷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는 문화가 여전한 나라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난 지금 결혼식 하객 면모는커녕 장례식장에 끼어들기에도 옷차림이 말이 아니다. 또 대부분의 장례식장에선 절을 하고 봉투를 넣고 식탁으로 안내되니까 몰래 비집고 들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니, 정녕 그런 국밥을 탐하고 있단 말인가.
그래, 뜨거운 국물은 라면국물이지. 식당 내 매점에서 김치라면에 물을 부어서 텅 빈 식당 한 구석에 주저앉았다. 저쪽에 스터디쯤으로 보이는 뭔가를 하고 있는 무리들이 보였다. 물론 하얀 가운들이었다. 식당이 빈 시간을 이용하는 모양이다.
거기, 학교 카페테리아는 천장이 높았다. 값이 싼 음식들과는 어울리지 않은 높이라고 생각했었다. 음식 냄새를 잘 참을 수 있게 하기에는 높은 천장이 옳았다. 김이 나는 고기 요리를 즐기는 사람도, 요구르트와 사과 한 알만으로 점심을 먹는 여학생도 있었다. 난 샐러드를 먹었다. 빵은 미리 썰어가지고 간다. 바게트 - 굴러다니다 조금 마른 바게트에는 참치 캔을 더해 먹으라는 어느 한국학생의 말을 따라 그가 말해준대로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걸 산 적이 있었다. 해바라기 기름이었을까? 올리브기름에도 적응을 못하던 나는 슈퍼에 가면 안절부절못하곤 했었다. 뭔가 먹을 것을 거의 모두 슈퍼에서 해결해야 했는데도.
단순무식하게 살던 그 세월 동안 나는 팡테옹에도 가보지 않았다. 루소뿐이 아니었다. 빅토르 위고도 에밀 졸라도, 아, 앙드레 말로도 거기 잠들어 있다고 하지만, 거기 까까이 간다고 뭘 더 얻을 것인가.
모딜리아니의 무덤엔 가 볼 마음을 먹었다. 감수성 과잉의 청소년기에 무한한 흡입력을 지녔던 그림, 목이 긴 여자 잔느 에뷔테른. 아직 파리가 낯선 때였지만, 페르 라세즈는 20구역의 바로 같은 이름의 역에서 내려서 올라가면 곧 있으니 찾기 쉬웠다. 그 그림에서처럼 목이 긴 장미 한 송이를 살까 하고서 꽃집에 들렸다.
바랜 금발의 뚱뚱한 아주머니가 물었다, 뿌르 쇼팽?
농! 뿌르 모딜리아니! 그렇게 답하자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양 여성들은 거의 쇼팽을 찾아온다는 것이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이 서툰 동양여자였다.
그렇게 실팍한 프랑스 아주머니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딜리아니를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어쩌다?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객관적 평가도, 그의 세파르디 유대인인 혈통도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 첨엔 남자가 죽은 다음날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가 어린 내 마음을 짓눌렀다. 남서쪽 바뉴 묘지에 묻혔다가 10년이 지나서야 모딜리아니 곁으로 갈 수 있었다는 잔느. 스물세 살. 치명적 사랑, 나는 물론 사랑을 믿거나 그러지는 못한다. 믿을 증좌가 없었다. 내 가슴을 흔들어놓은 것은 나중에 화첩에서 본 그의 카리아티드 몇 점이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에 이적행위에 대한 중벌로서 카리아이 마을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여자들은 건축물을 떠받치는 벌을 받았다는 것이 신화적 설명이다. 하지만 고전적 에레크테이온 신전이며 오스트리아 국회건물에까지 카리아티드 입상들은 아름답기만 하다. 모딜리아니의 그것들은 도발이었다. 건물의 무게에 짓눌린 채 힘을 지탱하고 있는 분절된 나신들은 그 단순한 선에서도 터질듯 했다.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 낼 것인가. 나는 해석 중독자였다.
나는 그때 모딜리아니의 무덤을 찾지 못했다. 안내에서 받은 묘지지도를 가지고서도 찾지 못했다. 안개비가 오락가락하는 중에 묘석들 사이를 헤매다가 화려한 검은 무덤에 닿았다. 프루스트였다. 높이보다 넓이가 큰, 반듯하게 잘라낸 매끄러운 검은 대리석은 부동의 단단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래, 나는 영생이다, 뭐 그 비슷한 메시지 같았다. 평생을 공부하고 글을 쓰기만 해도 되었던 사람. 약한 몸이 변명이 될까? 의식의 ‘흐름’이라니? 의식이라니?
사교모임에 드나드는 젊은이가 홍차에 프티트 마들렌을 적셔먹는다. 순간 과거의 무의식적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로써 자신의 길을 자각한다고? 동급생 거의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넋을 잃고 매료되었을 때, 그때 그 강의를 하신 교수님은 대단한 평판이 있는 분이셨다. 반대로 그때 나는 프랑스문학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후회하는 심정이 되었었다. 자아가 시간 속에 매몰되어 해체된다고? 열아홉 살 나는 자아만이 기댈 곳이라는 독단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래서 프루스트 같은 박학다식한 회색 인물들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 회색은 어스름 매력의 베일이 아니라 몽환이었다. 숨은 - 당시에는 커밍아웃이란 없었으니까 - 동성애자의 혼돈 같은 것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싫어했다. 그 특별난 취향은 예술가들의 병적 특성일까? 영혼이 있다면 그 크기가 좁쌀만 한 내게는 위대한 영혼들을 담을 공간이 부족했다.
그것을 거스르는 과정에서 문학 아닌 문학으로서 매료된 것이 장-자크 루소였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 사회 이전의 상태, 천부적 자연권인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상태를 향하여 -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에는, 그때는 적어도 어떤 실체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어느 사상가나 작가의 생각을 ‘해석’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낄 뿐이다. 남의 나라 남의 글이나 파먹는 하이에나 …….
전화다. 또 은실이다.
언니, 어디야? 병원 나선 거야? 나 아직 도착하려면 30분쯤은 더 걸릴 텐데, 병실에서 보호자 오라는데?
보호자? 그럼 내가?
으응, 언니. 언니가 좀 가봐.
그래.
컵라면 쓰레기를 치운 둥 마는 둥 곧장 달려갔는데 병실이 비어있다. 옆 병상에도 사람이 없다. 간호사실로 내닫는다.
염려 마세요. 검사 갔어요. 보호자가 있었대도, 따라가 보아도 할 일은 없어요.
할 일이 없으면서…….
근처에 계시면 따라갈 수 있을까 해서. 가도 도움은 안 됩니다, 뭐.
무슨 검산데요?
나중에 주치의 선생님한테 들으세요.
다시 넋 없이 환자도 없는 빈 병실에 앉아있자니 내가 환자가 되는 기분이다. 은실인 언제 오려나.
우리가, 은실이 고등학교에,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봄은 따뜻하기만 했다. 우리 둘은 집에서 보다 더 친해졌다. 은실은 서울의 여고에 진학할 수 있었던 행운을 언니 덕이라고 신이 났었다. 나는 그리 신날 것은 없었다. 여자들만의 대학생활은 고등학교의 연장선에 있었다. 딸들을 여자대학에 보내겠다던 어머니의 소망이 크게 작용했고, 또 불문과가 신설된 대학으로 진학하면 진로가 좋을 것이라는 고3 담임선생님의 권유도 있었다. 왜 하필 불문과였는지는 의외로 간단했다. 영어로 내 이름은 케이에스 에이취가 되어 아이들이 ‘미스 에취’하고 놀렸었는데, 불어로는 ‘마드무아젤 아슈’ 얼마나 멋진가. 또 불어 선생님이 그러셨다. ‘쓰 끼 네 파 끌레 네 파 프랑세.’ - 명확하지 않으면 프랑스 말이 아니라니. 더 매력적인 유혹도 있었다. 모음마다 색깔이 있다니. A는 검정색, E는 흰색, I는 빨강색, O는 파랑, U는 초록이다. 어린 내게는 랭보가 프랑스어를 대표했었다. 대학생이 되어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불문과 학생답게 세계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가 생긴 정도였다.
도버 해협의 ‘처널(Chunnel)’ 개통 소식. ‘채널 터널’을 줄여서 그리 부르는 곳. 해저만 해도 40킬로미터를 통과하는 유로스타를 타면 파리에서 런던까지 2시간 반도 채 걸리지 않는다는 인간승리! 아니, 기술의 승리! 인간승리라면 아파르트헤이트의 땅에서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뉴스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뉴스는 독서보다 더 직접적인 세계와의 연결고리처럼 느껴졌다. 책이 마음속으로 젖어든다면 뉴스는 곧 바로 피를 건드렸다. 물론 뉴스란 항상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인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해 여름 지독한 폭염에 비실거리다가 다시 캠퍼스로 돌아간 가을, 우리는 한번 끔찍한 뉴스의 중심에 들게 되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느닷없이 무너져 내린 한강 다리. 아직 8시는 안된 시간, 게을러 늘어터진 대학생들이 아직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은 고등학생들과 직장인들을 덮쳤다.
게을러 횡액을 피하기도 하는구나, 그것은 훗날 먼 나라 911사건 때도 그랬다. 희망찬 아침이 절망과 죽음의 나락으로 변해버린 그 아침을 가까이서 경험한 우리는 갑작스레 벙어리가 되었다. 화두가 따로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휴대전화가 있기는 했지만 사용자는 드물었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도 그러려니와 손바닥 길이만큼 길고 무거운 그것을 실제로 쓸 필요를 몰랐던 때이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아버지는 ‘그날’ 모두에게 휴대전화가 있었으면, 삐삐라도 있었으면, 덜 놀랐을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나는 사실 저녁때까지도 사건내용을 자세히 몰랐고, 무사하다는 연락을 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은실과 나는 양재동 고모네에 나와 살고 있었는데, 고모나 팽성 집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다. 강바닥으로 떨어진 16번 버스는 남에서 북으로 가던 중이었고, 하필 우리도 그 방향이었으니 놀라실만했다. 은실은 가끔 나랑 함께 가겠다고 아침자율학습에 늦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금요일 아침에도 은실로서는 조금 늦은 시간에, 나로서는 빠른 시간에 함께 집을 나섰다. 한강 근처에 이르렀는데, 비뚤거리는 다른 길을 따라 다른 다리로 - 알고 보니 동호대교였다 - 강을 건넜을 때조차 은실이 지각할까봐 조바심을 내는 건 나였다. 설마 다리 상판조각이 통째로 강물로 떨어지고, 그 순간 하필 그 상판에 버스며 차들이 지났으리라고는, 더구나 은실이네 같은 학교 학생들이 그렇게나 많이 그 버스에 탄 채 추락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현실은 늘 상상보다 더 잔인하다. 그런 명제가 무서움과 불안을 동반하고 핏속으로 스며들었다. 도버 해협 바다 밑을 기차가 통과하는 세상과 다리 위로 버스가 지나갈 수도 없는 세상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각인되었다. 세상은 믿을 수 있는 세상과 믿을 수 없는 세상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럽으로의 정향이 어쩌면 벌써 그 가을에 확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하고 안전한 유럽의 이미지가.
은실은 이후 학교생활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만큼 충격을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같은 반 학생이, 그것도 한 자리 건너 친구가 국화 꽃 한 다발로 남다니. 자신이 탔을 수도 있는 바로 그 버스! 충격이라는 단어는 너무 완곡한 단어였을 것이다. 은실은 그해는 물론 2, 3학년을 다 마치도록 내내 뭔가 불안을 극복하지 못했다. 2학년 시작하기 전에 아버지는 우리를 행당초등학교 뒤쪽으로 방을 마련해 옮겨 주셨다. 고모는 많이 서운해 하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작 은실이 양재동으로 주소를 옮겼으면 8학군 배정을 받았을 것인데, 하시면서. 대신 며칠이 멀다하고 우리에게 반찬을 나르셨다. 고모가 오셔서 은실이 응석을 부리느라 결석을 했는지, 은실이 결석을 해서 고모가 자주 들르셨는지. 아무렇거나 은실은 결석 투성이로 겨우 졸업을 하자 그냥 고향집에 틀어박혔다.
그해 겨울, 은실이 졸업을 하고 나는 4학년만을 남겨놓은 겨울 내내 나는 서울에 남았다. 은실이 고등학교 생활을 망친 것이 꼭 나 때문일 리는 없지만, 은실이 서울로 나온 것은 분명 나 때문이었다. 나는 은실의 실패를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설날과 대보름 때는 어쩔 수 없었다. 보름이 지나고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아버지는 은실을 데리고 강남의 학원가를 둘러보러 가셨다. 이제 다시 고모네로 옮기면 학원 다니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라고 설득하시겠다고 했다. 그날 더는 건널 필요 없는 그 한강변을 왜 다녀오셨는지. 다리 붕괴사고 현장에 이제 얼마 안 있어 새로운 다리가 준공된다고 하는 때였다. 아버지는 은실에게 현장을 보여주고, 누구라도 다시금 다리를 건너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주려고 하셨을 지도 모른다. 재차 충격을 받은 것은 은실이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였을지. 아무튼 집에 들어오시면서 집안에서 웬 파도소리가 난다고 하시더니, 그것이 갑작스러운 이명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원래 귀가 썩 좋은 편은 아니셨다. 우리는 그냥 아버지들은 다 그러는 줄 알았다. 아버지가 그 동안 한쪽 귀만으로 생활하셨던 것, 그런 걸 도통 몰랐다. 그러다 심한 이명과 함께 갑자기 전혀 말을 못 알아들으시니까 다들 놀랐다.
괜찮다, 조금 만 더 크게 말해 봐라.
아버지이!
아버지 소리는 안다, 다른 것 말해 봐라.
아빠가 언제부터 이러세요? 엄마도 모르셨어요?
나도 건성이었구나. 전화 온 걸 바꾸어 드렸더니 통 못 알아들으시는 거야. 날더러 뭔 소린가 들어보라고 하셔서 깜작이나 놀랐지. 전화 끊고 말을 걸어보니까 통 못 알아들으셔야. 이게 어찌된 일이라니!
아빠 아빠, 내 목소리 안 들려요? 막내도 방방 뛰었다.
괜찮다, 머리가 좀 띵한 것이, 몸살 나려고 그러나.
몸살 난다고 소리가 안 들려요? 큰일 났어요, 병원엘 가야지.
그러다보니 다저녁때였다. 모두가 조금 어리둥절한 채 저녁이 깊어 갔다.
아빠가 서울 갔다 오셔서 병나신 거야? 나 때문에?
은실이 숨죽이며 물었다.
설마.
나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튿날 병원에 가시는 아버지를 따라 나서는데, 은실도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은실을 말리셨다. 가까운 이비인후과에서는 큰 병원엘 가보라고 했다.
보통 한쪽 귀에 이런 일이 오는데, 돌발성 난청이라고.
그럼 왜 완전히 안 들리세요? 아부진 거의 못 알아들으세요.
모르셨어요? 왼쪽은 오래 전부터 완전히 고장이 나 있으신데요. 어쩜 어렸을 때부터.
그럼 어떻게?
그러니까 큰 병원에 가셔서, 지금 당장 가셔셔 입원치료를 시작하세요.
입원을요? 청력 때문에?
예, 응급상황입니다.
응급상황? 응급실에를요?
응급실이 아니라, 일단 종합병원으로 바로 가세요! 서두르세요.
그런데 그 금요일 오후를 또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는 귀가 안 들린다고 큰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버티셨다. 사리분간 보다는 고집 센 시골 할아버지들처럼 우기셨다. 그렇게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이번에는 은실도 기어코 따라 나섰다. 아버지는 일단 학교에 출근하셨다가 병원으로 가시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학교에 들어가신 동안 차 안에서 은실은 울 것 같았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비인후과 첫 진료는 귀 때문이면 으레 청력검사실을 거친다. 검사실에서는 말 한 마디 없이 결과지만 내밀었다. 아버지는 청력검사실에서 받은 종이를 들고 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약간은 애송이로 보이는 초진의사의 말도 같았다.
이 병은 입원치료가 최선책입니다. 물론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죽고 사는 일은 아니다? 그러면 되었다, 나는 또.
아버지는 난감해하셨다. 새 학년 교실에 자리를 비울 수도 없다고 하셨다. 차선책으로 귓속 주사로 결정을 하셨다. 이상한 자세로 20분 이상을 앉아 계셨는데, 밖에 있는 우리는 기웃거리며 불안에 떨었다.
그 때 청력검사실 아저씨가 복도에서 끼어들었다, 왠지 화가 난 듯.
의사가 응급상황이라면 응급상황입니다. 아버지 한쪽 귀마저 안 들리시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요?
입원치료가 확실히 더 좋은 거예요, 확실히?
은실이 그에게 다가가서 불안하게 물었다.
아버지도 밤새 고심 끝에 다음날 담임을 내놓으시고 입원을 하셨다. 병가 2주면 치료가 끝난다니 믿어볼 밖에. 그 봄학기, 티.에이. 일을 계속하면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나는 서울에 있어야 했다. 은실이가 아버지 병원 시중을 도맡았다. 그러고 저러다 그 청각사가 아버지의 사위가 되었다. 이듬 해 내가 서둘러 프랑스로 떠난 다음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착실하다는 단어에 걸맞은 제부는 작은 종합병원의 청각사다. 단순한 일이어서 스트레스도 없을 것 같았다. 승진이나 그런 것과 거리가 멀 것이니까. 어찌 보면 그냥 하나의 부품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이비인후과가 있는 병원이라면 꼭 한 명은 있어야 되는 중요한 자리다. 그런데 왜? 어쩌다가?
상념에 잠긴 나를 은실이 깨운다.
언니, 아직 있네.
어, 벌써 와?
승연아빠는? 아직 안 끝났어?
모르겠어. 그냥 뒤따라 갈 것 없다고 해서.
그렇지 뭐. 난 어디 좀 가볼래. 언닌 그만 엄마한테 가봐. 애들도…….
아니, 잠깐. 승연아빠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는 거야. 아무 상관없는 말들이라니. 기계처럼 무슨 말을.
그게, 그게 말이야. 청력검사 때 쓰는 말들 같이 단어들만. 뜻도 뭣도 없이.
뭐, 청력검사?
그래, 귀, 힘, 갓, 잔, 수도, 우유…… 그런 말들 말이야. 나중에 얘기 해. 나 어딘지 검사실로 가볼래. 몇 층이래?
그게, 이비인후과 검사가 아니라던데…….
정신없이 서두는 은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병실을 나섰다. 청력검사 때 쓰는 말들? 그걸 외워서? 귀, 힘, 논, 맛……. 그때 아버지가 청력검사를 할 때 왠지 그 좁은 공간을 꺼리셔서 내가 따라 들어갔었다. 검사자 옆에, 그가 밀어준 작은 작은 의자에서 이상한 단어들을 들었다. 솔, 잔, 국, 솜, 닭, 옆? 아니면 수도, 마포, 학교, 돼지, 접시, 기차, 바다, 전기 그런 것? 그날 밤 나는 그 의미 없는 낱말의 집합이 신기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다가 웃었던 생각이 났다. 그런데 제부라면 그것을 완전히 외울 법도 하였다. 외우는 게 오히려 당연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늦은 오후, 바람이 차다. 봄바람은 품으로 드는 님바람이라더니.
좌석버스에 오르니 눈이 절로 감긴다. 지하철이건 버스건 자리를 잡고 앉으면 눈을 감는 버릇이 이젠 아주 굳었다. 집으로 가자면 우선 40분쯤을 가는데 그 사이 잠이 들진 않겠지. 통복육교에서 갈아타고 나면 그땐 눈을 뜨자. 10분 정도에 내려야 하니까. 아침에 남녘에서 올라온 시간의 흔들림까지, 아득하다. 은실이 이 일을 어찌 감당할까. 은실이 다시 힘든 상황에 빠진다면 나는 어쩌나. 아버지는 또 속내를 아시면 은실이가 안쓰러워 어쩌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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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 2012년 5,6월호 투고
* 국제펜클럽 제78차 대회(경주)를 앞두고 원고청탁을 받아 뛸듯이 기뻤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주대회에 참가한다. 9월 9~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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