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메피스토에게
1.
비를 품은 날씨가 스산하다. 밤새 내리던 비가 잠시 그쳤을 뿐이다.
나 나가요! 오늘도 계속 비 소식이네. 비 오면 외려 외출이라도 해요!
남편은 잔소리를 남기고 출근한다. 집안 공기가 더 나빠요. 우산 꼭 챙기고! 남편은 비 오는 날을 더 염려한다. 안다. 나를 위해서 염려한다. 늘 햇빛 타령이다.
평소에 좀, 햇살 좋은 날 산책을 좀 해야 할 텐데. 당신 얼굴색을 보면, 딱 봐도 멜라토닌 부족이라……. 두 손으로 어깨를 잡으며 눈에다 대고 말할 태세다.
알았어요. 멜라토닌과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기분이 더 가라앉아서……
그래요, 다 외웠으니 더는 말하지 말라? 그럼 실천을 좀……
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문을 닫았다. 남편이 꼭 끝말을 하려는 것이 싫었다. 싫은 날도 있다. 우울증은 일조량과 관계가 있다. 게다가 비가 오면 습도로 인해 우울 모드가 상승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먼 데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가까운 소리들은 다 들어야 해서 귀가 윙윙거린다고 느낀다. 당신이 가까운 소릴 못 듣고 먼 데 소리만 들린다고 하는 건 그냥 상상이다. 실내 운동이라도 하면 좀 좋아요. 남편의 레퍼토리는 유독 비오는 날엔 더 증가한다.
비가 오면 뛰어다니라고? 그게 강아지지 사람인가! 대문을 닫아 놓고도 혼자 중얼거린다. 비와 우울증과 상관관계가 있기는 한가. 『그리스인 조르바』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기는 하다. 그걸 믿을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의학서도 아닌 소설의 말을 믿다니. 외려 며칠 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는 숙제가 있다. 미순이 메피스토를 들먹였기 때문인데, 그 애 말이 늘 그러듯 알쏭달쏭했고 난 머리가 아팠다.
메피스토 말이 맞아, 인간은 신이 짐승들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준 이성을 사용한답시고 외려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되었다고.
합리적 이성이란 철저한 계산의 다른 말이라는 대목에서 내 머리가 복잡해졌다. 귀로는 들렸는데 알 수가 없었다. 이성적 인간일수록 더 잔인하게, 경제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향해서 맹수보다 더한 잔인성으로 상대들을 제압해 나간다고, 그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구조라고, 미순은 말했다. 유대인을 하등인간으로 분류했던 시대는 지났어. 이젠 외려 유대인들의 돈과 명성이 최강국 미국을 움직이는 동인이야. 이스라엘이 유네스코에서 탈퇴하는 것과 맞물려 미국이 탈퇴하는 것 봐. 누구의 돈이건 돈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 첨엔 그냥 객관적 지식으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다 알아들을 필요가 있나 뭐. 그러다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다시 궁금증이 요동쳤다.
미순은 평범한 우리들이랑은 다르다. 요새 말로 비혼족이다. 젊은 날 다 태워버린 열정이 그 애를 일찍 성숙하게 했는지, 우리와는 뭔가 차원이 달랐다. 분명 그 문장에도 대단한 곡절이 있을 거야. ‘그’ 인간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란 말에서 그 인간을 떠올린 것은 내 선입견일까. 맹수보다 더 잔인한 그 인간을 눈앞에 떠올리며, 내 상상이 맞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그 맹수를 함께 욕한다.
그래 맘먹은 대로 편지를 쓰자. 누구라도 웃을까. 웃으라지. 하지만 악령의 권능이라면 이런 것쯤 읽지 못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생각이 병통이다.
2.
조금 놀라시려나, 메피스토님, 편지입니다. 인간에게서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을지 모르지만, 세상엔 처음 일어나는 일들로 넘치잖아요.
당신을 내게 불러와 이런 계기를 만든 것은 내 친구 미순이니까, 소개부터 할게요. 윤미순은 평범한 아줌마-할머니 우리들과는 다르답니다. 평생을 공부를 놓지 않고 스스로 밥을 번 독립적 인간이죠. 대부분 다소 어려운 말을 하고 우리를 일깨우곤 하는 미순이 말끝을 흐릴 때도 있답니다. 그럴 땐 풋풋하고 튼실해 보였던 캠퍼스커플의 미래를 쓸어간 파도가 범인임을 우린 다 알죠. 시쳇말로 몸과 맘을 통째로 다 퍼내주고도 대어를 그물 밖으로 놓아 보낸 회한이라고 해 두죠. 속절없이 파편으로 흩어진 날들을 어찌 쉽게 잊나요.
진부한 이야기죠. 한국에서 사시합격은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는 말, 알죠? 근년에 우수수 떨어지는 판검사들의 모양새를 보세요. 당신이 파우스트를 유혹했던 첫 번째 낚싯바늘도 젊음 그리고 욕망을 눈뜨게 한 거였잖아요!
지금처럼 무엇이든 센서로 작동하는 시절은 아니었죠. 절거덩거리는 열쇠꾸러미를 주렁주렁 들고 나타난 솔직한 예비 장모님, 목소리 또한 사근사근 노랫소리처럼 들리는군요. 보소, 고마 자랑스러운 기라! 예비 장인은 또. 마, 우리 집으로 온나. 아들 하나 저거는 얼라다. 난 다 들을 수 있었어요, 내 기막힌 청각에 잡히는 먼 데 소리들을.
젊은이의 욕망, 그 욕망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때 누군들 망설이겠어요. 보통 인간들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문이 열려 있어요. 칙칙한 오솔길에 비쳐든 햇살에, 누구라도 그 순간 꿈처럼 드러난 따뜻하고 환한 길로 각도를 확 꺾죠.
뒤돌아보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젊은 나날이었을 텐데요. 아니,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단어일 뿐, 눈물과 땀과 땟국 얼룩진 남루함의 연속이었겠죠. 나야 그토록 격하게 공부를 해보지 않았으니 알 수는 없죠. 하지만 공부 그것이 희열이기만 했을까요. 합격 후 다시는 글자들을 보고 싶지 않다, 그럴 법도 하죠. 그래서 법조문들은 그리도 낡아서 시렁에 걸려 마르다 말다하는 시래기 같은 것인지. 외국어보다 더 어려운 글자들이라지요. 너희 무지렁이들은 법률용어 같은 것 모른 채로 대충 살아라, 그런 식이죠. 능력에 못 미치는 부류는 아예 하등인간 취급하고요. 반려견 보다 아래, 심하면 두더지나 벌레 보듯 하면서. 암튼 다른 계급에 발돋움한 그가 일순간 사라졌을 때, 우린 그를 증오했을 밖에요. 비열한 놈!
미순이 인사대의 퀸 같은 존재일 때 그는 도서관 붙박이, 파리하고 왜소하여 눈에 띄지도 않았어요. 우리가 ‘도파’라고 부른 이유죠. 기지에 빛나는 구석도 있었죠. 미순더러 ‘레미’라 부르며 도레미파 화음을 과시하곤 했을 땐 솔직히 모두 부러워했었거든요. 미순 혼자 과외알바 뛰고 남친은 공부만 하기, 그런 듀오전략이 흔들린 건 4학년이 되어서죠. 우리 모두 졸업에 대한 부담감으로 우울할 때였죠. 게다가 여름엔 느닷없는 과외금지령으로 속수무책이었죠. 가을학기엔 결국 미순이 휴학을 했어요. 종일 일해서 남친은 공부만 계속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졸업도 늦고 일만 하던 미순은 산 정상에 첫발을 올린 순간에 벼랑을 만나더라고요.
이 날개를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런 말을 했었다고. 나중에 세월 흐른 뒤 미순이 그러더군요. 그 망할 놈의 날개, 밀랍으로 만든 이카로스의 날개였음 좋겠다! 내가 아예 저주를 했죠! 미순의 속마음은 모르는 채로. 그러다가 근년 들어 고위직 판검사 한 둘 티비에서 뭇매를 맞을 때 그 이름이 살짝 튀어나오기에, 그래 에게해로 빠져나 버려라, 속으로 그랬지요. 웬걸, 어물쩍 살아나더군요.
이런 미순이 당신을 불러낸 거죠. 나는 차라리 원전을 찾아보기로 했죠. 미순더러 언제 학교 가는 길에 도서관에서 『파우스트』 좀 빌려다 달랬죠. 웬 고전? 이라는 표정으로 웃더군요. 아마 자신이 했던 말을 잊었을 거예요. 방황돼서 그래, 인간은 방황하는 한 어쩌고, 그것 좀 읽고 싶어져서. 나는 딴청을 부렸지요.
책을 손에 넣었죠. 회심의 각오로 신과 내기를 벌렸다가 실패한 당신의 방대한 이야기는 내버려두죠. 오늘은 그 서곡에서 당신이 신과의 내기 가운데 말했던 ‘천상의 빛’에 관한 것으로 한정할게요. 그 단 한 문장이 얼마나 어려운 말들을 내포하는지.
메피스토펠레스: 지상의 작은 신(이라는 자) …… 차라리 천상의 빛을 비춰주지 않았던들 그가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는지. 그것을 이성이라 부르고는, 어떤 동물보다 더 동물적으로 사는 데만 써 먹고 있군요.
당신은 인간을 지상의 작은 신이라고 했죠. 이성을 사용하여 짐승처럼 살아간다고. 그러니까 예컨대 도파 씨의 이성적 결정과 행동은 짐승보다 더 짐승 같다, 이거죠. 맞나요?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랍니다. 미순도 자신을 저버리고 성공의 에스컬레이터에 오른 남친의 이성적 결단을 맹수의 잔인성으로 표현했고요.
하지만 신이 비춰준 천상의 빛이 어떻게 짐승보다 더 짐승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요인이 되죠? 쉽게 이해되지가 않아요. 지적 사고의 훈련에 익숙지 않아서겠죠. 원래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성’의 긍정적 측면과도 상치하고요.
할 수 없이 당신을 끌어낸 괴테라는 작가에게서 ‘이성’을 더 찾아보기로 했지요. 웬 쓸데없는 짓인지, 암튼 미순에게 이번엔 소설작품을 부탁했지요. 우리 또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죠. 그 다음 소설작품이라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펼쳤어요. 빌헬름의 출신이야 메피스토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베르테르의 철 든 긍정자일까, 여전히 시민사회의 부를 버거워하는 빌헬름은 이제 연극에 생애를 걸죠. 유전은 한 세대를 건너뛴다던가요, 유능한 상인의 전형인 부친이 아니라 예술애호가였던 조부의 피가 드러난 거군요. 마침 그 조부를 알고 있었던 한 낯선 길손을 만났을 때, 그가 빌헬름에게 들려주는 말이었지요.
이 세상이란 직물은 필연과 우연으로 짜여있는데, 인간의 이성이 이들 둘 사이에 들어서서 둘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오. 이성은 필연을 자신의 현존재의 기반으로 취급하고, 또 우연을 조종하고 지휘하며 이용할 줄 알지요. 그런데 다만 이 이성이 굳건히 흔들리지 않고 서 있어야만 인간이 지상의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라오.
보세요, 다만 이성이 확고부동한 인간이라야 ‘지상의 신’이라고 불릴 가치가 있다는군요. 우연을 조종하지 못하는 인간은 비이성적인 저능한 인간이다, 뭐 그런. 그러니까 도파 씨가 빛나는 기회를 잡은 것 또한 이성적인 행동이고, 그러므로 가히 ‘작은 신’다운 인간으로서의 선택이다. 사랑 따위 어설픈 감성의 세계에 머물러 최적의 기회를 놓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의 세계이고. 또 사전적 정의를 봐도 ‘이성이란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진위와 선악 또는 미추를 식별하는 능력’이잖아요. 그러면 이성은 무조건적으로 긍정의 영역에 존재해야 맞지요.
그런데 괴테는 왜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저기서는 부정적으로 그렇게 헛갈리게 말했을까요? 악령인 당신의 입에서 나올 때만 부정적인가요? 지금 듣고는 있는 거죠?
말의 강도를 따라가다 보면 이런 건가요? 이성은 인간으로서 갖출 최소공약수이다. 다만 과도한 이성은 부작용을 불러 올 수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계산의 영악함과는 경계가 필요하다. 그럼 그 경계는? 그 경계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아뇨, 그런 경계는 없더군요. 책 속의 문장과 현실의 괴리는 엄청나서 우리의 인식을 넘는 항성의 간격이죠. 잠깐만요, 숨 좀 쉬고요.
3.
이렇게 편지를 쓴답시고 앉아 있자니, 돌덩이 가슴이 된다. 뭔가 육중하게 걸린 일이 한둘이 아니다. 내가 해왔고 하는 일들은 내 나름 이성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왔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누구라도, 나는 쉽게 틀리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 틀림없는 것인지.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내가 선배의 목소리는 못 듣고 나무 위 지저귀는 새 소리만 들었다는 사실, 그 확신이 바닥부터 요동친다. 가까이 선배 옆에 서서 선배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고 먼 데 나뭇가지 위의 새 소리만을 들었다는 느낌, 그 기억. 이 기억은 내 의식이 있는 한에서 회상하는 것에 불과할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자 내가 서술할 수도 있는 기억. 나의 의식이 개입된, 내가 그렇게 기억을 하고 싶어서 기억을 하는 형태일까. 그래서 소뇌가 아닌 해마에 저장된다는 기억.
하지만 난 정말 못 들었다. 나무 아래 함께 서 있었던 선배의 목소리는 잘 못 들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만을 기억한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 소리만 들었다. 그 순간 두려운 것이 무엇이었을까? 청혼 그 자체, 결혼이라는 일에 놀랐을까? 그의 심한 청력장애가 덜컥 걸렸나? 군대 간 첫해 사격훈련 중 총기를 잘 못 다루다 그리 되었다는, 심한 청력장애였다. 캠퍼스 곳곳을 안 쳐다 본 나무들 없이 함께 산책했던 우리. 꽃잎파리 하나하나를 모두 설명해준 선배. 꽃만 피는 건 진달래, 잎과 함께 피는 건 철쭉이야, 개꽃이라고! 개꽃 따먹다 죽으면 안 되지, 내 색시 하려면!
사람들은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게다. 나중에 나중에 미순한테 살며시 그 말을 했을 때, 미순도 나를 의심했다. 미순이 벙어리가 되었던 그때, 그 앨 위로할 필요 때문에 ‘우리도’ 헤어졌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검지 둘을 살짝 합쳐 보이면서 말했다. 나란한 두 직선이 있어. 가까워져서 만나면 다음 순간 서로를 뚫고 지나가 버리게 돼. 상황은 오히려 나빠졌다. 미순은 나를 죄인 취급했다. 제 남자친구였던, 저를 떠나 속절없이 사라진 아무개랑 똑같다 했다. 배신 가까운 개념을 들먹였다. 아무개나 나나 다 같은 배신자라고 말하고 싶어 했다. 딱히 배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은 그 애의 미덕이다. 미덕이 참으로 여러 가지인데도, 미순은 야멸치게 배신을 당했다. 확고부동한 이성이 범인이었다.
아니, 이젠 미순 문제가 아니다. 선배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고 믿는 나의 기억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내 기억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확보하려면 타자의 기억들은 자의적이며 인위적이라고 밀어붙여야 한다. 타자, 실제로 청력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선배는 내 우스꽝스런 장애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나는 무조건 듣지 않았다는 기억을 고집한다. 그러고서 그 순간이 귀에 걸려있음으로 해서 평생 귀앓이를 한다. 그 벌이다. 먼 데는 잘 듣고 가까운 소리들을 흘려듣거나 못 알아듣는 병을 앓는다. 하필 이비인후과 의사인 남편도 그냥 허허 웃고 있는 모양이다.
며칠 전이었다.
내가 주중에 한 나절씩 쉴까 봐요, 수요일 오후 쯤. 산책도 하고.
무슨 소리예요.
우리병원 피부과도 그래요. 그 양반이야 대단한 신자라서 그렇지만.
신자라서?
수요 저녁예배요.
저녁예밴데 오후부터 쉬어요?
준비도 하고 그러겠지요. 저녁예배 준비, 예-배-준-비 한다고요.
내가 또 헛듣는 기색이었나 보다. 남편의 말소리가 커졌다. 이비인후과 의사인 남편이 내 귀를, 청력을 어쩌지 못한다니 속상하겠다 싶다. 처음에 이비인후과 전공의가 되었을 때는 내 이상한 습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청력을 걱정했던 것이 맞다. 오빠랑 함께 의대를 다녔으니까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오빠가 도중하차하고 진로를 바꾸었지만, 계속 친구이니까. 결혼 후 이비인후과 의사도 내 귀를 어쩌지 못하는 것을 알고 나서는 세부전공에서 귀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이비인후과 의사가 돕지 못하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가 ‘잘 나가는’ 과를 선택했을까? 가장 파리 날리는 전공이 이이비인후과인 것 같아서 늘 조금 미안하다.
이비인후과 혹은 이비인후-두경부외과는 귀 뿐만 아니라 코와 후두며 인두 그리고 두경부 질병을 관리하는 의학이랬다. 이만큼 범위가 엄청 많다는 것은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에 알게 되었다. 학위논문에는 가성크루프 운운, 일반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무튼 후두학이라고만 들었다. 인두보다도 더 아래 기도나 폐 쪽에 가까운 곳이라 해서 더 중요한 기관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미 의사로서 활동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가 상대하는 환자는 이비인후 모두를 망라할 것이다. 박사가 아닌 부분도 진료하는 것이 의사들의 일이라고 생각할 때 조금 걱정도 되고 그랬다. 내가 왜 걱정을? 남편이라서? 그 보다는 세상의 모든 의사들에 대한 걱정이다. 내가 좀생이라서 남 걱정이다. 오빠는 나랑 그런 좀생이 기질을 공유해서 의대를 포기했을 것이다, 아마. 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오빠는 의대생 친구를 나에게 데려다 놓고는 진로를 바꾼 셈이다. 친구가 자발적으로 왔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 이야기도 나눈 적은 없다, 남편하고도, 오빠하고도. 왜 우리는 이야기 나누는 일이 적을까. 싸우는 것을 소통이나 이야기에 포함한다 해도 적다. 싸우지 않으니까 더 소통이 없다. 그래서 메피스토를 불러내려는가?
4.
메피스토님, 아직 듣고 있지요? 낡은 노트북 꼬마자판 위의 글씨들이 당신의 귓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 느낌. 어떻게 내가 악령과 한패를 먹고 있을까 신기하기도 하네요.
세상은 사적인 고민에 빠져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용인치 않더군요. 지축이 울리면 어떤 시금석도 사라져버려요. 나머지 대학생활은, 그 시절의 대학생활은 개인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대통령 시해라는 역사적 사건 속 술렁임으로 요동쳤지요. 서울 YWCA 집회에서 발표되었다는 거국민주내각구성을 촉구한 성명서는 우리 캠퍼스까지도 왔어요. 시위에 나선 학생들은 우리대학만 해도 그 때 수천은 되었을 걸요. 조기 개헌, 군대의 중립, 또 빼놓지 않고 어용교수 퇴진! 특히 교육지표 사건 이후로 어용 문제는 심각했었죠. 수배자가 생겨나고, 구류에 재판에 넘겨지는 학생들. 미순 남친도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겼다 하더군요. 수배중인 후배를 하룻밤 숨겼는데, 무사히 고향집으로 데려갔으니 망정이죠. 그건 전화위복이 됐어요. 홀어머니가 병중인 걸 보고는 짐 싸가지고 내려갔더래요. 다음 봄 학기를 휴학했고요.
그렇게 졸업반이 되었죠. 우리들 몇은 정치를 워낙 몰랐었다 봐요. 이러다가 결국 군부가 약화되고 민간의 정치로 옮겨가리라는 순진한 기대도 없지는 않았거든요. 웬걸, 서울역 회군(?)이 갈림길이었다죠. 수천이 아니라 수만의 함성들. 하지만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의견이 갈렸다죠. ‘다음을 기약하자!’ ‘아니, 지금 멈추면 엄청난 보복으로 돌아올 거야.’ 신중론에 따라 흩어지는 학생들, 사람들. 사흘 후 전국 동시다발을 기약하자!
- 뭐라? 사흘 뒤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나선다꼬? 요놈들! 비상계엄 전국 확대다. 대학교 휴교령 내리고, 걸거치는 놈들 다 잡아넣어! 가택연금 시킬 놈들 시키고!
- 됐다, 마! 인자는 언가이 됐제. 어데, 광주가 들고 나선다꼬?
- 미친놈들, 아예 폭도의 이름으로 처단해뿌라! 거 불온세력, 빨갱이들 폭동, 그런 것 안 있나! 전국으로 확대되는 일은 단디 막으라.
- 모든 수단 동원하라꼬! 군은 자위권 발동인 기다!
내 귀엔 지금도 이 모든 소리가 들려요. 뇌세포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튀어 나오죠. 그런데 서울역에서의 후퇴 결정은 합리적 이성에 따랐던 게 맞나요? 공포 또는 비겁의 산물이었나요? 잠정적인 소강상태 후 사흘 뒤 산발적으로 봉기하자! 약속은 약속이지만, 약속을 깬 다른 지역은 결과적으로 이성적이었나요? 약속은 약속이다, 약속을 지켰던 이곳 학생들은 어딘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비이성적 하등인간들이었나요? 다가오는 극한위험을 모른 채 행렬에 나선 그들, 사라져간 그들, 함께 스러져간 광주사람들.
그해 5월, 참 따뜻한 일요일이었죠. 미순은 일요일에는 알바를 더 하느라 꼴 보기 어려웠어요. 집이 시내 쪽인 성주랑 둘만 만났지요. 영화를 볼까 하다가, 이 좋은 날에, 그러면서 버들가지가 나부끼는 천변을 따라 산책을 했지요. 느리게 걷는 사람들, 다리 아래 풀밭에서 나물을 뜯는 아주머니도 보였어요. 소만이 낼모레구나, 냉잇국을 끓여야겠네,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 생각났어요. 그날은 무등산 쪽으로가 아니라 물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었죠. 한 참 걷다가 큰길로 올라왔는데 학생운동기념탑이 훤히 보이는 거예요. 담장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자리에 예쁜 창살 같은 철책만 둘러져서 얼핏 담장이 없는 것처럼 보였어요. 성주가 느닷없이 안에 들어가 보자 했어요. 기념탑에 새겨진 작은 이름들에서 할아버지 이름을 찾아보겠다고. 성주는 정말 깨알 같은 이름들을 짚어보고 있었어요. 나는 그냥 잘 다듬어진 정원, 작은 바윗돌에 멍 때리고 앉아 있었지요. 곧 일어날 생각으로.
우당탕 탕탕. 길 쪽에서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리는 발소리가 나요. 우르르 쾅쾅. 계속 달리는 사람들. 한 사람이 어느 가게의 옆문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여요. 계단으로 올라가는지 하얀 셔츠의 뒷모습이 곧 사라져요. 모두 그쪽을 쳐다보고 있어서 들킨 건가. 뒤쫓던 군홧발들도 쿵쾅거리며 따라 올라가요. 아악, 내려오는 건 세 둥치인데 걷는 건 둘이어요. 가운데 새빨갛게 변한 셔츠의 뒷모습은…….
어느새 시커먼 군복들이 담장 안쪽에 우글거렸어요. 성주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힐끗거리며,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손을 꼭 잡고 교문을 빠져나왔죠. 대학 캠퍼스에 우르르 몰려든 전경들이야 수없이 봤었지만, 고등학교 애들이 있는 곳이잖아요. 게다가 총칼인지 뭔지 무장한 군인들을 마주치다니. 고개를 땅으로 처박고 길가로 붙어서 발걸음을 떼었어요. 조심조심 천천히,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는 포즈를 강조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어떤 가게로 빨려 들어갔어요. 거기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먼저 우릴 끌었는지 우리가 먼저 들어갔는지도 모르게 아무튼 그리로 들어갔지요. 실뭉치가 가득 쌓인 가게였어요. 코바늘을 든 채 서 있는 아주머니도 있었어요. 여럿이 계셨어요. 대학생들 큰일난당께. 어찌끄나, 어쯔고 집에 가끄나. 아주머니들도 떨고 있었어요. 한참 후 나올 때에는 아주머니 한 분씩이 따로 우릴 데려다 준댔어요. 묶은 머리를 대충 올림머리처럼 해주시고, 커다란 비닐봉투에다 우리 가방을 넣고는 뭔가를 구겨 넣어 부풀려서는 그렇게 들고가라 했어요. 시장바구니 행세였죠.
그날 『장터의 스피노자』던가, 아이작 싱거의 단편집을 들고 나갔는데, 거기 놓고 왔었나 봐요. 그 모사점에는 한동안 가지 않았죠. 필름이 끊긴 부분에 해당되었나 봐요. 몇 년 후에야 뜨개질 생각이 났고, 그 집엘 갔고, 책은 당연히 흔적도 없었고. 하긴 학생탑 근처 어디에 흘리고 왔었는지도 모르죠, 혼비백산했을 때. 다시는 그 책을 읽을 생각도 없이 몇 해를 지난 거예요. 노벨상 때문에 반짝했다가 곧 잊은 거죠. 대표단편은 다 읽었었는데, 주인공은 철학박사이면서 스피노자처럼 살기를 원했던 것 같아요. ‘이성의 완전한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자이다.’ 뭐 그런 말에 매료되었던 것도 같고. 다시 말해도 이성은 대단한 성질이죠, 우리 인간에게서. 너무 어렵지만요.
그 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함성은 내란이라는 이름으로 진압되었죠. 새빨갛게 물든 셔츠의 뒷모습을 잊고, 잊으려고 하면서, 숨죽여 온 세월이 이성적이었을까요? 할머니가 계시던 우리 집은 그날 이후 대문부터 안에서 봉쇄되었죠. 다시 학교가 풀렸지만, 졸업을 하기까지 들고나는 시간에 애들처럼 초저녁 통금이 붙었죠. 여자 애가 조신하게 있다가 결혼해야지. 그렇게 살다가 결혼하고 엄마가 되고. 그렇게 보통으로. 딴전을 부리며 살아남기. 공포를 누르고 잊은 체하기.
몇 백을 폭도의 이름으로 학살함으로써 전국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계산은 효과적이었죠. 겉으로는 안정되었으니까요. 죽은자도 행불자도 ‘다만’ 소수에 속했죠. 과외를 못해서 휴학하는 학생들, 가난에 지쳐서 팔려가는 공부벌레들, 그래도 죽느니에 비하면 대순가요. 소수를 밟고 다수가 행복했으니 합리적 이성의 승리였나 봅니다. 못난 소수, 잘난 다수. 그런데 어쩌죠, 참상은 참상인 걸요.
못 믿을 손 이성이여! 메피스토 당신의 말대로라면 신이 천상의 빛이라고 준 것이 이성인데, 이성이 빛이 아닌 거네요.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덕 - 인간은 태초에 선한 존재이다가 필요에 의해 악을 수행하나요? 이성의 힘으로? 말도 안 돼요. 아, 숨 막혀…….
5.
메피스토님, 아직 거기 있죠? 악령이라면 낮 시간 동안은 별로 할 일도 없는 것 아녜요? 세상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하고도 오히려 우울과 자기 환멸에 빠진 또 다른 파우스트를 찾아가기엔 이른 시간이죠 뭐.
오늘 이야긴 사정이 좀 달라지네요. 인간에게 만일 언젠가부터 죄의식 같은 것이 싹 터 있다면요, 부채의식이랄까, 그런 경우요. 그건 이성의 작용으로 해결 가능할까요? 살다 보니, 얼결에 아이도 낳고 기르고 깔깔 웃고. 그러는 세월 동안 죄의식인지 부채의식인지 무엇인가 무거운 장막을 드리우고 있음을 깨달았네요. 내가 너무 행복한 것 아닌가. 누군가를 ‘합리적’ 그러니까 이성적 이유 없이 외면한 내가 행복해도 되는가. 그건 그저 사적인 잘못이라 쳐도요. 이웃들의 불행을 불행이라서 참상을 참상이라서 깡그리 외면했으면서. 그런 죄를.
죄와 벌,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중죄가 아닐 때에는 뭔가 선한 행동으로 보속할 방법이 없을까. 죄를 지으면 절대자를 찾는다고, 신앙에 의지할까 생각도 했지요. 성당을 염두에 두고 알아 봤어요. 입교식을 하고 예비자가 되어 일반교리지식과 미사참례예절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데, 잘 해도 반년쯤은 걸린다더군요. 마지막엔 신부님과의 찰고라니 그건 좀 무섭고요. 성세성사라고 하는 것이 인류 전체에 관련된 원죄며 내가 저질렀던 본죄며, 그것이 내가 용서받고 싶은 것인데, 아무튼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 대단한 일이긴 해요. 하지만 회개라는 말도 심각하죠. 나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서 하느님의 길로 향한다?
아님 교회의 문을 두드릴까. 좀 더 편하지 않을까. 교회를 통해서 기본교육을 받는 건 같죠. 그런 후 신앙고백을 하고서 세례를 받고요. 신앙이 안 생긴다면 것도 큰일이죠. 또 교회들은 종류가 하도 많아서 교회의 바다에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기독교나 예수교나. 기장과 예장이라더니, 예장도 합동에 통합에. 우와, 합동과 통합의 차이를 잘 몰라서 국어사전을 찾았답니다. 얼핏 구별 못하겠더라고요.
합동: 둘 이상의 조직이나 개인이 모여 행동이나 일을 함께함.
통합: 둘 이상의 조직이나 기구 따위를 하나로 합침.
옳거니, 합동은 여럿이 함께, 통합은 하나로! 메피스토님, 당신은 한글을 알 리가 없죠. 아니, 마법적 능력으로 한글도 아시려나? 암튼 성서 어딘가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비슷한 말씀을 얻어들은 풍월로 기억해 냈지요.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 드는 사람이 적다’ 뭐 그런. 그래서 숫자가 적은 기장 쪽으로 입문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요. 일단 예장이란 교회는 엄청난 숫자니까요. 그래, 좁은 문으로 들어가자. 기장이라는 표식의 교회를 찾아보았어요. 일단 내가 찾은 것 만해도 셋이었어요. 어떻게 구별하느냐고요? 십자가 표식을 보면 되죠. 짙은 파란색 원에 왼쪽 아래 1/4은 보라색이고 경계선에 하얀 색으로 ‘기’자 표시되어 있으니까 금방 알죠. 십자가 이미지로는 예장합동이 맘에 들었어요. 신구약성서를 상징하는 듯, 책 모양의 파란색과 연두색 직사각형 사이에 하얀색 십자가. 성서를 초록색 두루마리로 나타내고 그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는 예장통합이더군요. 두루마리가 하나인 것은 하나를 지향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좋더군요. 교회 속내는 전혀 모르니 피상적인 인상이죠.
교회를 찾아가는 것, 실은 그럴 용기가 부족했어요. 어떤 문도 두드리지 못했죠. 성서를 읽는 것으로나마 죄를 면해보려고요. 비겁하지만 그쪽으로 맘을 정했죠. 성서읽기는 인터넷이 좀 좋은가요. 허나 종류가 너무 많은 건 좀 힘들더군요. 하느님과 하나님의 다름은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머리로는 따라가죠. 여호와와 야훼와 주와 주님과…… 아휴, 이건 너무 헛갈리죠. 성서번역부터 다름인지 다툼인지가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어요. 서로 찢어지잖아요. 어찌되었건 성서를 가끔씩 읽는답니다. 좋아하는 찬송들도 생겨나고요. 악보도 쪼끔은 읽거든요.
어때요, 메피스토님, 성서 한두 줄 읽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수작이라는 것이 결국 이기적인데, 나만 그럴까요?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 아닌가요? 당신도 은근히 성악설에 기대는 거예요. ‘선한 인간이란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저 노인’의 성선설에 반대해서 내기를 건 것이니까. 사실은 종교가 성악설에 기초한 것 아닐까요?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타락의 원죄라고 하니 말이죠.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아니, 하느님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셨단 말인가요? 그렇담 하느님에게 인간은 무엇이죠? 하느님은 누구를, 무엇을 창조하셨나요? 설마 우리는 하느님에게 반려인간인가요? 신을 기쁘게 해주고 가끔 위로해줄지언정 선악일랑 모르는, 알면 안 되는 반려인간. ‘이제 인간아, 너희가 나처럼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생겼다면 더 이상 나의 반려인간이 아니니라. 나가거라! 낙원은 끝이다!’ 그로써 반려인간이 아닌 유기인간의 인생이 시작되다, 뭐 그런.
우리 인간에게서도 반려견이 유기견이 되곤 한다죠. 그런데 반려견의 삶이 유기견의 삶만 못하리라고, 그건 우리 인간이 오해한 것일 테죠. 만일 어쩌다가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난다면 나는 기꺼이 유기견이 되겠어요. 누군가의 반려견이 되어 재롱을 부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 개의 삶은 아니죠. 주인처럼 손을 흔든다거나 입맞춤을 한다거나, 쥐어주는 크레용을 들고 훈련받은 대로 뭔가를 그린다거나. 뭣 하러 본성에도 없는 것을 죽어라 연마하나요, 기껏 개 주제에.
바로 그런 이유로 인간으로 태어난 이번 생에서는 그냥 인간이고 싶군요. 겨우 자연의 일부를 먹어치우다가 사라지는 존재, 그게 억울할 것도 없답니다. 권태를 달래주는 장치들이 좀 많은가요. 세상 구경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만 있더라도, 온갖 죄들이 난무하는 신화며 성서며 문학작품들도 매력적으로 우리 곁에 있잖아요. 신도, 신들도, 위대한 인간들도 늘 방황하고 죄에 들곤 하더군요. 그러니 어리도록 젊은 날 누군가의 진정(?)을 외면한 것이 죽을죄인가요 뭐. 참상을 참상이라 인식하지 못한 것, 그건 좀 무거운 죄목인 것은 확실해요. 하지만 겁이 나서 모르는 체했을 뿐, 그로써 대단한 이익을 구한 것도 없고요. 굳이 죽을죄라면, 일신의 영달이거나 왕관의 탈취라거나! 타인을 밟더라도 오직 성공의 최정상을 향해! 실재하는 권력을 향해! 합목적적으로! 어라, 어찌된 일이죠? 이성의 합목적성은 진정 선인가요?
세기의 악령인 당신을 불러내서 뭘 하고 있는지. 이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미덕인양 서 있군요. 여기엔 제 허물이나 변명하는 맹한 인간이 투덜거리고 있을 뿐이고. 알아듣기나 하셨소? 언어라는 게 그저 뻔뻔한 수다에나 사용하는 도구로 전락했군요. 누군가 그랬죠, ‘언어는 생각의 하녀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그런 걸 이렇게 함부로 써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아니라 세치 혀가 병통, 아니 손가락들이 병통이군요. 말은 소리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어 흐르는군요.
어, 밖엔 비가 정말 왔었는지 실내 공기조차 축축하군요. 속절없이 날이 저무네요. 이제 어서 밤으로 날아가세요! 또 누군가 대단한 자를 유혹해 내려면 이번엔 어떤 무기를 사용하실까 궁금해집니다. 이런 오지랖, 인간이 악령을 걱정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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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 』 통권 590호, 2018년 4월호, 189~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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