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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6.16 중편 「틈새」- 『동리목월』
소설2013. 6. 16. 08:07

틈새

 

이 이야기는 실제의 큰 대회에 기대어 썼을 뿐인 완전한 픽션이다.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혹시 어쩔 수 없이 실명으로 거론되는 분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며, 독자에게는 순전한 픽션으로 읽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1.

유난히 태풍이 무서웠던 여름 끝자락에 경주를 향하고 있었다. 펜 회원이 아니면서 국제펜대회에 참석할 기회는 실로 행운이자 우연이었다. 프랑스어 동시통역 일을 맡게 된 것은 완전히 대타였으니까. 이래저래 작가들 틈새를 기웃거리게 될 행운으로 조금은 들뜬 채, 대회는 9월의 어느 월요일 아침부터이지만 일요일에는 도착할 양으로 버스터미널로 나갔다. 동서를 가르는 도로는 우리나라의 눈부신 도로 문화에 비하면 턱없이 열악하다. 신라의 고도 경주행 버스는 하루에 고작 두 번뿐이다.

 

경주 - 돌이켜 생각해보니 언젠가 겨울에 이 경주에 왔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차를 처음 사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였다고 기억된다. 인간의 상상을 절하는 석굴암이나 석가탑과 다보탑 등을 보여주시려고 그랬겠지만, 보문단지에서 묵었고 놀이기구가 많더라는 기억이 전부인 걸 보면 어린 시절 유적지 관람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가 보다. 나는 지금도 전혀 앞뒤 연관 없이 세계적인 문단의 거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이 부담 없는 시간을 미리 즐긴다.

소잉카 - 아프리카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월레 소잉카도 참석한단다. 그가 1986년에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탔다지만, 난 그때 아직 너무 어린애였다. 문학이 다 뭔가! 불문과 학생이 되고나서야 프랑스령을 포함한 프랑스어 문화권에서 프랑스 문화의 독점적 전황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나선 네그리튀드 운동을 처음 들었고, 그 주창자들보다 더 눈에 띤 작가가 그에 비판적인 소잉카였다. 세네갈의 시인이자 대통령까지 한 셍고르, 프랑스의 해외 레지옹의 하나인 마르티니크의 시인 세제르, 역시 프랑스령 기아나의 다마스 등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자행된 인종 차별을 완강히 거부하며, 흑인 공통의 정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하고자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 그런데 다음 세대라고는 해도 아프리카이건 카리브 해이건 프랑스에서건 흑인의 정체성을 한 데 모으자는 이 운동에 회의적인 흑인이라? 그 부분이 소잉카에 대한 내 엉뚱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었다.

 

소잉카는 네그리튀드라는 것이 자기도취를 부추기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 지닌 편견을 긍정할 뿐이라는 입장이었다. 유럽의 이성주의에 대한 아프리카의 감성주의라는 양분적 사고를. 그리고 정말 재미있는 문장이 있었다. “타이거는 타이그리튀드를 외치지 않는다, 다만 행동한다.” 처음에는 ‘타이그리튀드’라는 단어를 몰라서 낑낑댔다. ‘니그로’가 ‘네그리튀드’를 외치는 일에 대한 조롱인 것을 나중에야 알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 코 박고 찾으면 코만 막히는 것은 또 잠깐 잊었었다. 그 일로도 사전 찾지 않고 대충 이해하려고 애쓰는 습관을 기른 것은 맞다.

 

아차, 이렇게 막상 동시통역 일을 상상하자 자신이 무너진다. 정확성, 정확성을 어쩌나.

아니다.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소잉카는 영국에서 수학했고 미국에서도 아프리카문학을 강의했으니 영어에 능통하다. 내가 통역을 맡은 부분은 프랑스어인 만큼 한국어를 프랑스어로, 또는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하면 그만이다.

프랑스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가 참석한다. 그는 한국에 잘 알려진 외국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의 유수한 여자대학에 와서 객원교수로 강의를 하기도 했던 만큼. 그런데 불문학도로서 나는 왜 르 클레지오에게 혹하지 않았을까.

 

대학에서 전공 수업 들어간 첫해 르 클레지오의 이름이 나왔었다. 그 무렵 그는 프랑스 내의 잡지 - <독서>이었던가 -의 설문조사에서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되었다. 강의 시간에 그는 스물다섯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 편으로 국경을 넘어 문단을 강타한 괴테랑 비교되었다. 그러니까 괴테보다 더 이른 나이 스물셋에 혜성같이 나타난 신동에 가깝다고, 르 클레지오에 심취한 교수님께서는 ‘그 괴테보다도 더 이른 나이’라는 점을 강조하셨다.

독문학 개론 시간에서 들은 베르테르는 ‘친애하는 벗이여, 사람의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편지글로 말문을 열며, 당시 인간이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사회적 통념을 배척하고서라도 인간 본연의 감정을 예찬했다. 해방된 마음의 고양을, 그 권리를 주장하는 적극적인 정열을 토로했다. 하지만 내게 남아있던 기억은 왜소한 인간이 무궁한 자연에 파묻히는 거대한 느낌뿐이었다. 시작하자마자 반 페이지 넘게 계속되는 자연예찬 - ‘나는 이 현상들의 찬연함의 힘 아래에서 쓰러져 간다.’라던 인상이 강력하게 박힌 탓이었을까? 하긴 편지가 계속되는 동안 불행에 빠진 그는 똑같은 자연 속에서 이젠 ‘영원히 삼키고, 영원히 희구하는 괴물’만을 보게 된다. 감상성의 과다와 감정의 무조건성은 좌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무튼 당대의 사람들은 이 책에 대한 열광으로 베르테르와 같은 옷을 입었고, 또 베르테르적인 유행이 굉장하다 못해 그것이 열병으로 고양된 곳에서는 양식에 맞게 자살도 행해졌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러나 그 시절, 인구가 훨씬 적었을 그 시절에, 이천 명쯤이나 되는 독자가 베르테르의 슬픔에 동조하여 실제로 자살을 했다는 통계는 내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무감동. ‘동조’라니! 그것도 책 속의 주인공을! 나로서는 이십대 청년의 감정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스물세 살짜리 르 클레지오의 첫 작품 『조서』도 자연 속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어쩐지 왜곡된 자연으로, 산 중턱 빈집이었다. 버려진 짐승처럼 살고 있는 젊은이. 탈영병인지, 정신병원 탈출자인지, 그는 하필 이름이 아담이고, 다행히(?) 이름이 이브는 아닌 젊은 여자와 소통할 뿐이다. 아니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르 클레지오의 독창적인 발견이던가? 신문기사 삽입, 찢어진 광고지, 미완성 문장들, 심지어 지워버린 행.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사실성을 해체하는 것이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사실은 벌써 트렌드였다. 그래도 너무 이른 나이에 첫 작품에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는데 무섭지 않았을까. 이것 역시 독문학개론을 들을 때였는데, 사실주의 시대던가 어느 작가가 첫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는 그 명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일찍이 ‘퇴역작가’라는 명함을 들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었다. 젊어서 벌써 보름달 인생을 살게 된 천재들에 대한 내 불안감은 차라리 오지랖이었다. 평생 보름달 인생이 되어보지 못할 수많은 군상들을 몰랐단 말인가.

 

르 클레지오의 성공은 전혀 염려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졸업반 때 그의 『황금물고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소개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를 두고 젊은 명성의 후속을 걱정했던 나는 허탈과 안도감을 동시에 맛보았다. 30년 넘게도 계속 베스트셀러를 쓰는구나. 그렇다고 대강 소개받은 그 작품에 감동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검은 물고기, 어려서 인신매매 단에 유괴당한 검은 소녀의 파란만장한 삶. 입양된(팔려간) 집에서 신체적 성적 고초를 겪다가, 자라서는 혼자 떠돌며 가진 것이라고는 몸 밖에 없는 젊은 여자의 밑바닥 삶…… 모로코의 사창가, 스페인의 빈민가, 파리의 보헤미안, 마침내 미국 여행, 재즈 싱어가 되는 꿈을 이루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검은 대륙으로 귀향하는 순간 그 검은 물고기가 황금물고기가 된다는 설정. 이런 것은 많고 많았던 동화와 소설들의 세상 어딘가에 늘 존재하지 않던가. 물론 탈 유럽, 탈 서구 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점에서 유럽 순종인 르 클레지오가 돋보였다는 점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이후의 소설들, 소위 누보로망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 우선 너무 어려웠으니까 - 탓이기도 했다. 졸업반 때 나는 그냥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정석이니까 프랑스에 간다는 생각, 어찌 보면 단순했지만 프랑스에 갈 준비만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것이 나를 오늘 경주로 가게 한다.

 

 

2.

현대호텔은 이름만큼 현대식인 보문호반의 호텔이다. 하루 일찍 도착한 덕에 호텔에서 오후는 한가로움의 극치였다. 국제적인 대회라는 인상은 준비된 플래카드나 안내 표지판들로 넘쳤지만 사람들은 아직 느긋했다. 등록처라고 안내된 지하 1층에는 요원들 수가 더 많았으니 말이다. 프런트에서는 일반 참석자들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탓에 약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이내 방으로 들어서자 갑작스레 자유라는 단어가 온 몸에서 꿈틀거렸다. 사방 벽으로 갇힌 방에서 자유라니. 혼자인 내가 언제 부자유의 구속을 받았는가. 그러나 일상으로부터의 자유 아닌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국제펜 한국회원들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했고, 혹시나 사진에서만 보던 소잉카나 르 클레지오, 혹은 터키의 오르한 파묵이라도 일찍 도착해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을 셋씩이나 초청한 이 행사를 보면 한국의 위상도 제법인가 싶었다. 국제펜 회장 소울 씨도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언론인 출신답게 수많은 에세이에서 표현의 자유 등을 역설했고, 그것으로 고통 받는 세계 도처의 작가들에 대한 연대 또한 대단해서 마침내 국제펜 회장이 된 것이리라. 그래서인지 이번 대회의 주제가 “문학, 미디어 그리고 인권”이란다.

 

보문호가 내려다보이는 베란다를 상상했지만 방은 반대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높은 층이라 베란다에 나가보니 둥실 뜬 구름 속만 같았다. 얼마를 거기 의자에 앉아서 하늘 냄새를 느껴보았다. 천천히 짐을 풀고 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벌렁 누어보았다. 나에게는 분명 사치스러운 이 방. 같이 방을 나누어 쓸 사람은 내일 아침 일찍 대회장으로 바로 도착하는 대부분의 일행들과 함께 올 것이다. 밖이 어둑해져서야 뭔가 먹을 것을 구하러 로비로 내려갔다. 밖으로 나가면 호숫가를 산책할 수 있었을 것이나 너무 늦었다.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고 들어와 먹다보니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아직도 나는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서 거리를 배회함은 옛날 서양에서 모자를 쓰지 않고 나다니는 여자나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로맨스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파리에서 공부만 하다가 청춘을 잃은 것도 그런 가르침을 너무 충실히 따른 탓일까. 아니, 그건 아마 유전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청교도적인 열심. 하는 일 열심히 한답시고 옆길을 쳐다보지 않는 고지식함은 유전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요즘 세상엔 고지식으로는 밥도 못 빌어먹지만.

 

일찍 씻고 들어앉아 받아온 책자를 열어보니 오후나 저녁 내내 호텔이 조용한 이유를 알았다. 두 개의 선택으로, 불국사며 동리목월문학관 그리고 대릉원이라는 고분군 등에 사전 관광이 있거나, 뮤지컬 관람이 있었으니까 조용했었나 보다. 전체를 살펴보려니, 가방을 가득 채운 A4 그대로 크기의 책자는 두껍기도 했지만, 국어와 영어 쪽이 앞뒤로 겹쳐있으니 내용의 두 배의 두께였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흰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 가운데는 황색이라는 오방색을 상징화 했다는 로고도 참 한국적이었다. 무엇보다 문학포럼 <나의 삶, 나의 문학>에 나올 연사들의 글이 궁금했다. 99쪽을 찾아 열어보니, 좌장, 연사들, 소잉카, 고은, 르 클레지오…… 그런데 고은 씨의 글이 없다. 미리 원고를 내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기조연설의 파묵도 프로필뿐이다. 뭐 대순가, 이 정도의 대규모 행사라면 현장에서 통역 원고를 받는 당황함은 설마 겪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며 일찍 잠을 청했다. 이런 예상들이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빗나가게 될 것을 모르는 채로.

 

 

3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화려한 홀에서 조식뷔페가 제공되었다. 지하층을 기본으로 해서 일층까지를 커버하는 높은 천장이 화려함의 근원지였다. 나는 어쩌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조식 뷔페를 즐긴다. 이런 곳의 빵은 다행이도 내 젊은 시절을 되돌려줄 만큼 맛이 좋았다. 보리밥을 싫어했으면서도 파리에선 왜 검은 빵 맛에 홀렸을까. 맨날 슈퍼에서 사는 토스트 빵이 아닌, 학교 식당에서 자주 나오는 바게트나 크루아상이 아닌 검은 빵, 알곡 빵이라나 뭐 그런 빵을 난 별식으로 즐겼었다. 나는 수많은, 정말 수많은 요리들 사이에서 뚜껑들을 열고 내용물을 살펴보는 시간을 잘 못 참는다. 아침을 그리 무겁게 들 생각도 없었다. 그냥 검은 빵을 두 번 썰고, 유일하게 곁들일 수 있는 동물성인 완숙한 달걀과 살라미를 발견해서 기뻐하면서.

 

저만치 옆자리에 백을 놓고 갈까 말까 엉거주춤 망설이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동양여자였다. 어디선가 스쳤던 인상일까? 그러는 찰나였다. 그때 서양 사람처럼 생긴 서양여자가 서양 사람들에 어울리는 새파란 옷을 입고서 서양사람 같은 미소를 띠고 말을 거는 듯했다. 여기 자리가 어떻고……. 예,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게 여기 제 남편이랑……. 아무래도 합석을 하기에는 적당치가 않은지 동양여자가 테이블을 양보하기로 하는 모양이다.

그러자 저쪽에서 그 남편으로 보이는 덜 서양사람 같은 남자가 이미 착석을 하고 서양여자를 부르는 것 같았다. 서양여자는 동양여자에게 정색을 하면서 미안하다고 몇 번 씩 말하면서 자리를 떴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모습이 그랬다. 동양여자도 괜찮아요 같은 말을 여러 번 여러 번 했고, 이제는 음식을 가지러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곧 접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와서 앉을 태세였다. 그때 그 자리에는 이미 또 다른, 이번에는 큰 말소리 때문에 한국 사람이 확실한 젊은 남녀가 앉아있었다. 그 여자는 접시를 든 채로 웨이터들을 쳐다보았고, 미안해하는 웨이터를 따라 저만치 다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나치게 운이 나쁜 분이네 싶었다. 혼자라서 백을 들고 다니니까 빈자리라고 오해받는가보다.

 

쓸데없이 남 걱정을 하다말고 나는 커피를 한 번 더 가져와서 뜨거움과 향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저쪽 편의 아까 그 서양여자가 그 동양여자에게 다가갔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다가 일부러 다시 찾은 모양이었다. 정말 미안했다고 자기의 이름을, 이어서 남편의 이름을 이야기하면서 간곡히 사과를 하는 모양이었다. 참 사과에 열심이구나 싶으면서 남자의 이름이 언뜻 귀에 익었다. 데이비드 맥켄……, 그래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발표자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대회 시작 11시가 가까워 오자 지하1층 컨벤션홀에 마련된 대회장은 만원사례가 되었다. 대회장 밖에 임시로 화장실이 설치될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어느 대회장에서나 늘 그러하듯이, 중앙 앞 쪽은 지정석으로 되어있었다. 연단에 올라갈 임원들이나 기조강연 연사들을 당연하지만, 뭔지 모르게 중요한 인물들, 여기서는 중요한 작가들이 지정석에 이름을 올렸다. 드물게는 이번 행사에 저개발국 회원들을 초청하는 선행(?)을 베푼 분들도 거기에 포함된 듯 했다. 문제는 작가의 중요도라는 것으로, 지정석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거나 경계에 있는 상황이 애매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저만치 바로 그 경계에서 몇 번이고 어색한 장면들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하지만 그것도 지정석에 명사들이 착석한 뒤에는 수그러든다. 우리 측 이사장님, 사진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들, 회장, 그 옆자리엔 노랑머리가 아니라 거의 흰머리의 여성이 보인다. 회장 부인인가 보다. 그러는 사이 오르한 파묵이 예정을 취소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왜 돌연? 그런 이유에 정신을 팔 사이 없이 식이 시작되었다.

 

오프닝은 샌드 애니메이션. 텔레비전에서 한두 번 보았지만 실제로 - 물론 여기서도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 - 보니 더 신기했다. 모래를 확 뿌리는 동작, 그 처음 동작이 나중에 의미를 표시해내는 오묘한 기술보다 더 멋있었다. 한국본부 이사장의 환영사, 소울 회장의 개회사, 축사, 축사, 축사 - 이 모든 과정이 문제없다. 원고는 미리 있었고 (동시)통역은 일사분란. 대회장에는 1번은 한국어, 2번은 영어, 3번은 프랑스어, 4번은 스페인어로 자유스럽게 언어를 선택하는 작은 기계가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외국어 실력 때문에 뭔가를 할 수 없는 세상은 이미 아니다.

기조강연에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분 차례가 왔다. 제목은 <가장 오래된 미래의 길>. 세상사 대조적 현상들을 완벽하게 짜 맞춰 준비해 오신 명 연설임에 틀림없다. 특히 ‘좌-우’에 대한 설명이 좌뇌-우뇌 등을 넘어 한없이 상대적 대조적 개념으로서 제시되었다. 잠든 곰과 포효하는 호랑이를 비유한 판소리, ‘얽어도 장에 가고 굶어도 떡 해먹는 사람들’ - 한국인의 해학과 여유를 충분히 천착하셨다. 강연 내내 인터넷 동영상이나 이미지들도 소문대로 그 분야의 선각자답게 유려하게 사용하시고.

 

그러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로버트 리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스크린에 떠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이름이 두 번씩 흘러나왔다. 너무도 긴장해서 잘 못 들었을지 모른다. 나는 물론 로버트 리 프로스트라고 통역했다. 실은 순전히 내 귀의 착각일 수도 있었나 보다. 나중에도 다른 통역사들은 아무런 언급이 없었으니 말이다. 프루스트는 학부 내내 내겐 트라우마에 가까운 멀고 어려운 대상이었는데, 이렇게 또 나를 혼란케 한다.

그렇게 첫 행사가 끝났다. 갑작스러운 구절들은 많이 없었고, 좌중의 사람들은 작가들 특유의 진지함으로 너무 조용했다. 지정석이 끝난 바로 다음다음 줄에 아침 식당에서 낭패를 당했던 그 동양인이 유난히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혼자서. 대체 누굴까.

 

이어지는 축하공연은 뮤지컬인데, <미소 2 - 신국의 땅 신라>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미소 2’가 무엇일까. ‘미소 1’ 같은 것이 있었을까? 춤과 음악을 하는 주체에겐 숫자 2의 의미가 특별하겠지만, 관람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다만 불편한 첨가물이었다. 예상대로 볼륨이 너무 컸다. 예상대로? 공연예술들에 대한 내 인상은 늘 나의 기대보다 훨씬 큰 볼륨이 내용 몰입을 방해했다는 기억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상이 적중했다. 내겐 언제나 볼륨들이 너무 높았다.

 

점심에 통역사들 몇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더러는 함께 일한 적도 있었는지 서로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첫 행사를 마치고난 안도의 마음은 서로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에누리 없이’라던 연사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것 ‘벤또’처럼 일본말 아니냐고. 그러고 보니 그런가?

 

순간 잽싸게 표준국어대사전이 장착된 전자사전을 찾아보던 영어담당이 그건 고유어라고 했다. 한국의 고유어? 그랬군요. 처음 의심을 내놓았던 이가 얼버무린다. 우린 가끔 외래어 노이로제에 시달린다.

 

난 그것보다 갑작스럽게 통역을 더듬거렸던 일이 떠올랐다.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요, 어느 나라 아이들이건 에누리 없이 - 에누리 없이 손가락을 다섯 개로 그립니다.’ - 거기서 ‘에누리 없이’를 ‘값을 깎지 않고’라는 말로 떠올라서 당황했던 순간. ‘가감 없이’ 또는 ‘더도 덜도 아니라’라고 옮겨야한다는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동시통역이란 살벌한 일이다. 밥이 먹히질 않았다. 졸지 않으려면 커피는 충분히 마셔두어야 하리라. 첫날부터 지치면 큰일이니까.

오후 스케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서운하게도 파묵이 불참해서다. 그 사이 흘러든 말로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서라는 효자 설에 이어 동반자 문제라는 루머도 돌아다녔다. 동반자? 그보다 그의 문학적 대성의 뒤에는 끝까지 글 쓰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지원해준 어머니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으니 그쪽이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섣부른 직업을 갖지 않고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젊은 시절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호사는 아니다. 아들의 능력을 믿더라도, 환경적으로 허락이 안 되면. 아니면 결과적으로 불발이면.

 

상관없다. 소잉카의 등장엔 그 나름대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허옇거나 대부분 누런 사람들 틈에서 시커먼 얼굴의 그가 돋보이는 분위기. 꼭 노벨상 수상 때문이라기보다 역차별이랄까 흑인으로서의 자존심 하나만으로도 돋보이는 설정이었다.

 

그가 말하는 <마법의 등불>은 다름 아닌 창조성의 마법이었다. 예술적 창조로서의 글쓰기. 권력자들이 민중에게 호기심을 누르라고 명했을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선언은 혁명이었다. ‘변형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광범위하고 원초적인 테러를 상상해보라!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변형적인 마음’이라고 통역했는데, 나중에 한국어판을 보니 ‘변화를 추구하는 지성’으로 번역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 보편타당성 있게 느껴졌다.

 

이어서 르 클레지오는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이다>라는 제목으로 말했다. 화려한 마야문명은 사원의 화재 이후 책으로 남긴 역사가 없어서 해독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쇄술은 특권의 종말이요 지식을 분배를 뜻했다. 다만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도 식민지에서는 성서에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채찍아래 사는 노예들로 넘쳤다. 고향 모리스 섬에는 문맹이 30%. 현대에 와서 오히려 공부도 일도 않는 ‘니니’들이 생겨났다. 인간의 목소리인 언어만이 추상과 변화와 리듬에 의해 숭고함을 표현한다. 언어로 인해 인간은 완성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책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중에 접근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말문을 닫는다. 여기가 어딘가, 작가들의 잔치자리. 희망이 있구나.

 

첫날이라 긴장되었던지 방에 돌아와 조금 쉰다는 것이 만찬장에 늦었다. 아무렇게나 빈자리에 안내되어 앉고 보니 낯모르는 남성들 사이 불분명한 인종의 여성 하나만 끼어있는 테이블이었다. 그 여성도 나처럼 끼어 앉은 것일까. 까만 머리카락으로 봐서 한국인일까? 그렇지만 저리 큰 눈은? 가볍게 어디 누구라고 서로들 소개하는 틈에 보니 러시아에서 온 한국여자였다. 북소리 공연이 머리를 두둥두둥 울렸다. 큰 소리에는 정말 약하다.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4.

화요일 행사부터는 중복적이었다. 아침 이른 시간부터 이루어진 분과회의에는 통역이 필요 없었고, 컨벤션홀의 문학포럼의 일환인 <시조>에 참가하면 되었다.

시조 포럼은 21세기 황진이 같은 여성발표자와 하버드 대학의 맥켄 교수 그리고 네팔의 만능 시인 펜다이 회장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당연히 유창한 영어의 맥켄 교수, 매력 넘치는 한국어의 홍 시인에 이은 조금 독특한 발음의 네팔인 영어 - 청중들은 미국인 교수의 한국어 ‘청산리 벽계수야……’에 탄복해버렸다. 앙코르에도 만돌린에 맞춰 청산리를 열연하는 그 교수는 참으로 특이한 존재였다. 90세 아버지에게도 영어로 시조를 쓰게 독려했고, 아버지 또한 그것을 즐긴다는 완전한 시조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오후에는 평화, 투옥작가, 여성 등에 집중하는 분과회의가 있었지만 통역은 의무가 아니었다. 산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기웃거리는데, 지하층에서 카페를 통과하여 호숫가 산책로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낮 시간에 와인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자가 문 가까이 앉아 있었다. 첫날 아침 식탁에서 이리저리 좌석을 옮겨 다닐 때 보았었고, 오늘 점심 때 합석을 하게 되어 잠시 대화를 나누었던 그 한국분이다.

 

점심때는 4인 식탁에 그 사람이 혼자 앉아있었으니까 합석을 하게 되었었다. 앞에 걸고 다니는 이름표로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면서 그녀가 한국 사람이라서 괜히 편했다.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앉다보니, 저쪽 창가에 가까운 식탁에 맥켄 교수 내외가 보였다. 화제는 저절로 그리로 향했다.

 

저기 오늘의 주인공 맥켄 교수네요. 참 독특했죠?

예? 전 너무 놀라서. 뭔가에 그렇게 심취할 수가 있는 것인지. 더구나 남의 문화에.

그런데 어제 서로 만나셨죠? 제가 아침에 먼발치에서 본 것 같아요. 좌석 때문에 불편해하실 때.

예?

어제 아침 식사시간에 말입니다. 맥켄 교수부인이랑 좌석 때문에.

아, 뭐 대순가요. 우리가 손님 쪽을 배려해 줘야지요. 그런데 실상 미국이나 유럽 쪽에선 별로 유명 작가들이 오지 않은 것 아녀요?

네, 뭐. 본부 쪽 사람들 말을 들어보니 절반쯤이 초청 케이스라던데요. 86개국인가 참가라면 40개국 가까이가 초청국이라던가 뭐. 외국 참가자들이 한 200명은 된다지요?

그렇게나 많아요. 전 온통 한국 사람들만 보이던 걸요.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상당수가 ‘코리언 센터’ 명패를 걸고 다니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온 교포들이래요. 한국센터 뉴욕지회, 캐나다지회 그런 거라더군요.

그렇구나. 그런데 참, 초청이라니요?

네, 저개발국가의 작가들을 대거 초청했다는.

아, 그래서 서양 사람보다는 아시아나 중동 혹은 검은 모습들이 많았군요.

실제로 오르한 파묵이 오지 않았지만 터키 사람들은 좀 왔다던 걸요. 터키는 참 그 영토로 보자면 90퍼센트 이상 아시아에 속하니까 아시아 사람임이 분명한데도 우리 보기에는 좀 유럽 사람들 같지요?

파묵 씨 사진을 보면 아예 서양사람 같던 걸요. 사는 것도 서양인이죠. 난 처음에 그가 독일문화 쪽에 가깝다고 생각을 했어요, 왜 그랬었는지. 내가 파묵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이, 그게 독일어권 신문과의 인터뷰 내용 때문에 그리 되었으니.

그럼 혹시 독문과? 전 불문과라서 지금 통역으로.

예, 견원지간이네요, 후후. 그래요, 난 독문학을 전공했어요, 끝까지 해내진 못했지만. 건 그렇고, 파묵이 스위스 유명 일간지의 토요판 주간지 <매거진>에 말했던 것 때문에 독일 쪽으로 생각하게 되었나 봐요. 그 전엔 몰랐거든요.

주간 매거진에요?

예, 잡지 이름이 <매거진>이었을 겁니다. 3만 명 쿠르드인이 이곳에서 살해되었고, 백만 명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되었다. 그런데 거의 아무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말한다. 뭐 그런 정도였죠. 1915년 오토만 아르메니아인에게 일어난 이 엄청난 일이 터키에선 잘 감춰진 부분인데, 이제는 과거사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그게 반역죄 비슷한 재판의 빌미가 되어 한동안 떠들썩했지요.

노벨상 수상 전이었던가요?

예. 곧 바로 터키에서는 완전 보수 민족주의자 검사를 앞세워 공화국을 현현적으로 모욕한 터키인은 몇 년인가 징역형에 처한다는 헌법을 도입했어요. 파묵을 옭아 넣으려는 법이었죠. 소위 사후법에 의한 기소라서 더욱 반향이 거셌겠지요. 세계적 여론이 들끓었고, 유럽연합에선 아예 의문을 제시했어요. 파묵의 케이스를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있을 것인지 실험대에 오른 리트머스시험지라고까지 했으니까요.

리트머스 시험지라뇨? 파묵을 그냥 두면 이유에 가입 아니면 불가 뭐 그런 거요?

암튼 그런 분위기였죠. 국제 엠네스티는 파묵은 물론 그 법에 적용을 받게 생긴 다른 몇 명의 고소도 함께 취하하라고, 거의 압력이었죠. 국제펜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국제인권규약 중 자유권 규약을…….

자유권 규약이라고요?

예, 사회권 규약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법률적 효력이 인정되는 것이지만. 국제 규약이라는 것이 늘 권고 수준 아니던가요? 것보다 귄터 그라스다 움베르토 에코다 또 주제 사마라구, 바다 건너 업다이크도, 심지어 남미의 바르가스 요사 후작까지 엄청난 노익장 대가들의 반대성명들이 잇따랐지요.

요사 후작까지요? 그 사람은 페루 대통령에 나오고 그런 사람 아녀요? 하긴 놀랄 일도 아니네요. 작가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실연하고…… 그런 모양새는 이 시대엔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작가들이 반 권력 투쟁을 하다가 권력에 오르기도 하니까요. 돈 권력에도 이르고, 더러는. 아니 유명해진 상당수가.

어쨌거나 파묵은 곧장 비비씨에서 자신의 발언의 근본 취지가 터키 내에서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의도였을 뿐, 학살 사건 자체가 아니었음을 밝혔어요. 이로써 조국의 과거사와의 한판 승부에서 후퇴하는 듯 했지요. 하지만 곧 이어 그해 가을 스웨덴 아카데미는 파묵에게 영광을 돌렸지요. 앞서거나 뒤서거나 <타임>지에 세상을 흔든 100인에 선정되었고, 소신 발언을 한 영웅과 개척자 부분에.

 

(그랬었구나. 그런 재판과정에서의 소용돌이가 그를 돋보이게 하여…….)

 

난 내 생각을 재빨리 지워야 했다. 2005년 말에서 2006년 사이의 사건에 관해 난 왜 이렇게 까마득히 잊고 있는 것일까? 내가 행복했었던 시절, 모교에서 기대주로서 강의에 열중했던 시절에 난 무엇을 더 했던가. 그녀가 계속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이름은 빨강』을 보면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어요. 오래 묵은 책이라 1, 2권을 가져왔는데 헛물 켰죠.

책들을 가져와요? 헛물이라뇨?

예. 사인회에 가져갈까 했죠. 소잉카의 사인회는 지금 바로 가야되어요. 두시부터.

 

 

그렇게 서둘러 식탁을 떠난 그녀를 그날 오후 곧 바로 다시 만난 것이다. 이제 겨우 대회 이틀째인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나 자주. 그 순간, 그녀를 처음 본 것이 첫날의 아침 식탁이 아니라 그 전날, 그러니까 여기 도착했던 일요일 저녁때였다는 생각이 났다.

어머, 또 뵙네요. 이렇게나 자주.

참 그러네요. 낮술 들켰나요? 점심이 급했나 어째.

와인이 소화에 좋대죠. 그런데 저 여기 좀…….

예, 뭐. 전 그냥…….

그런데 혹시 대회 전날 오신 거 맞죠? 실은 그날 저녁에 로비 근처에서 뵌 것도 같아서요. 만물상 쪽에서 나오시는 걸.

어머나, 전혀 몰랐어요. 제가 눈도 나쁘고 또 멍하고. 그땐 감기약이 그곳에 있다고 해서 얼마나 반가웠었는지.

그럼 그 감기는?

예, 아마 버스의 냉방에서 그랬었나 본데, 약이 효과가 좋았는지 괜찮아졌어요. 약 먹기 전에 뜨거운 우동도 한 그릇 다 먹었거든요. 그것도 좋았겠지요.

다행이군요. 어떻게 아까 사인회엔 늦지 않으셨어요?

그럼요. 외려 소잉카가 거의 30분이나 늦게 왔어요. 인터뷰들에 지쳤노라고, 이해는 되었지만, 주최 측에서 하라는 대로 줄을 서있던 우리는 실은 더 지쳤는데도 암말 못했죠. 아니, 사인회용으로 준비된 신간을 살 때 받은 번호표대로 줄을 서라고 해서 좀 떠들긴 했죠. 내가 맨 앞에 서있었지만 들고 있는 표는 4번이었거든요. 세 사람 양보를 못해서가 아니라 일이 합리적이 아닌 것 같아 언성을 높이게 되었어요. 난 덤으로 『해설자들』을 가져갔기 때문에 마음이 좀 조급했었나 봐요. 그게, 우리가 미리 메모지에 사인을 받고자 하는 이름을 써내는데, 이름과 성을 혼동해서 새로 산 『제로 형제의 시련』에다는 내 이름을 잘 못 쓰더이다, 속상하게. 그게 미안했던지, 황망하게 들이민 『해설자들』 옛 판에는 제대로 쓰더군요.

그럼 오늘 사인은 일단 성공적으로…….

글쎄, 사인이 무슨 의미일 거라고. 암튼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그를 만났을 때 잠깐 인사를 건넸을 때의 인상과는 달랐어요. 피곤한 기색이 너무 심했어요. 내가 네그리튀드와 결부된 그의 유명한 문구를 적어두었지만, 그렇게 사인해줄까 싶어서, 하지만 일별도 하지 않고 내 이름만을 겨우 쓰던걸요.

네그리튀드? 그럼 그 쪽으로도 공부하신 거예요?

아니, 잘 몰라요. 아프리카의 검은 유산이라는 것이 프랑스의 정치적 엘리트주의적 패권과 지배에 대한 투쟁의 도구로 선포한 것이라면 사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도 있는 건지. 난 그것보다 타이거가 짓는 것 보았냐, 직접 행동하지, 그러니 니그로가 니그로의 유산만을 강조하는 구호가 무슨 쓸모냐, 그런 쪽에 의아심을 느꼈어요. 난 기회가 있으면 그 점을 질문하고 싶은데, 여기 운영방식을 보면 청중 측에서 질문이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질문을 준비하셨다고요?

예, 궁금했으니까요. 소잉카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나 무분별한 칭송이 자칫 현대화의 잠정적 이득을 무시하는 생각이라고 비판한 것 맞죠? 외침 대신 행동을 하라는 부분은 공감하지만, 난 그가 말하는 현대화가 무엇을 염두에 둔 말인지 궁금했어요. 유럽적인, 서양문명적인 변화를 말하는지. 또 그의 말을 확대해석하자면 한국문학의 경우에도 한국적인 것을 외쳐대는 대신 행동을 하라는 것인데…….

내일 저녁 다시 소잉카 발표가 있으니, 그때…….

질문이건 사인이건 참 부질없는 짓이지요. 알죠, 아는데, 여기 참가에 내가 괜히 자잘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나 봐요. 어쨌거나 파묵이 오는 줄 알고 가져온 『내 이름을 빨강』은 더 두꺼운데 두 권이잖아요. 그것들 들고 오느라 무겁기만 했어요. 펜에서도 파묵이 불참하는 것은 마지막에야 알았겠지요. 미리 그런 통보는 없었으니. 그런데 혹시 젊은 인도여자랑 오려고 했을까요? 그래서 그런 말들이…….

인도여자?

예, 인도 출신의 미국작가라던 걸요, 훨씬 훨씬 어린 나이이지만 첫 작품으로 무슨 상들에 빛나는 유망주라나 봐요. 파묵이 뉴욕에서 문예창작 가르칠 때 배웠을까? 서양에선 한 20년 차이는 차이도 아니지만요. 첫 결혼에서 ‘꿈’이라는 이름의 딸도 있다는데, 전 부인도 인텔리라 하던데, 역사학자라던가…… 암튼 이혼한 뒤에 인도여잘 만났나 봐요.

인도여자, 뉴욕…… 파묵에 대해서 꿰고 계시네요.

뭐, 독특한 일을 벌였잖아요. 재판도 그렇고, 필화사건을 겪는 작가들은 많지만, 무엇보다 그 박물관 말이어요. 노벨문학상 받은 뒤로 썼다는 그 『순수의 박물관』에 이르러서는 정말 뭔가 전혀 다른 문학의 콘셉트를, 난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네, 그건 나도 얼핏 들었어요. 소설에 나오는 박물관이 실제로 건립되었다고. 우리나라 어디 출판사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내 친구의 친구의 동생이 거기 파견 차 나갔다왔다고 들었는데. 생각만 해도 멋있던걸요. 189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라던데, 벌써 작품을 구상하면서 그 건물을 사들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박물관을 지을 발칙한(?) 생각은 노벨상 수상 이전의 것이라죠. 그런데 그 박물관 내용은 들어 보셨나요?

아뇨, 뭐 연인의 담배꽁초 등등을 모두 수집해 놓았다고 정도.

그게 3층에 다락까지 있는 건물인데, 1층에서 벌써 4000개가 넘는 담배꽁초가 있고 그것을 일일이 비벼 끄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방문객을 압도한다는군요. 생각해 보세요, 여자가 평생 피웠다는, 피웠을 담배꽁초를 모아서 거기다 날짜를 쓰고…….

…….

2층과 3층엔 소설 전체 83장을 말해주는 83개의 캐비닛에 수천 가지 사진과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다락 층에는 서술자 케말이 머물던 공간이라고 해서, 작품의 초고와 박물관 설계도, 세계 각지에서 번역 출판된 『순수 박물관』을 늘어놓은 거예요. 그쯤에 이르면 작가와 등장인물은 하나가 되고 말죠.

…….

퓌순, 그 여자, 퓌순의 귀고리로 대표되는 기념품 가게에선 온갖 잡동사니를 팔고 있고. 일단 박물관에 들어간 사람은 마취에 걸려서 기념품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겠죠, 자신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가 하는 착각에 빠져서.

슈퍼마켓 계산대 옆에 초콜릿이나 껌 등을 진열해놓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네요. 마지막 순간까지 고객의 푼돈마저 수탈하려는, 강력한 자본주의의 원리가……. 책은 꼼꼼히 읽으셨겠네요!

네, 뭐. 40권인가를 쓴 작가이고 보니 아직도 번뜩이는 말을 어찌 할까 싶은데 대단한 구절들이 있어서 놀랍기도 하고. 대부분의 인간에게 삶이란 진심을 다해서 살아가야할 행복한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 압력과 처벌,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말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요즈음 처음으로 느낀다…… 등 등, 무시무시한 진단도 아직 내 뇌리에 박혀 있어요.

말장난 같아도 대가들은 다르군요.

말장난일 리가. 차라리 천재들이죠.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심각한 질병이라고? 뭐 그런 인터뷰도 있었지요, 아마? 그렇게 단언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소설가들에겐 신선한 충격을 주죠. 어중간한 소설가들은 그렇게 단언하지 못해요, 경박하다는 평판이 두려워서라도.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주인공 케말을 긍정적 인물이라고 밀고 나아가는 작가 또한 정신병 아닐까요? 그 말이 심하면 4차원의 두뇌를 지녔다거나.

암튼 독특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탈 경계죠. 소설인지 현실인지. 음악이 춤과 공연과 페스티발로 확대되어 가듯이 문학도 영화로 인터넷으로 이제는 현실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것이겠지요. 현실에서 가상의 세계로 도피했던 문학이 가상의 세계에서 다시 현실로, 가능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다시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제의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제의? 제의라, 그렇군요. 그런 느낌이 들곤 하더군요.

군중들이 모이기로는 경기장뿐 아니라 음악을 좀 봐요. 거의 광란에 가까운 혼돈 속에서 열광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것이 음악인지 연극인지 원시시대 종교의식인지 알 수가 없게 되잖아요. 그냥 도취와 마취와의 경계도 없고. 약물에도 의존하는 인공적인 도취상태라면 말입니다.

인공적인 도취상태?

심했나요? 전 그냥 맑은 정신으로 그런 퍼포먼스를 해낼 인간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에요. 어떻게 5분 10분이 아니라 한 두 시간을 그런 망아의 경지에서 노래하고 춤 출 수 있죠? 알코올이든 더 강한 무엇이든, 인공적인 자극이 없이 그런 시간을 버틴다? 상상이 안 가서요.

참 별난 생각을 다 하셨군요. 난 그저 취미가 아니면 접어 버리는. 뭔가를 분석할 여지도 없이 덮어버리는 종류죠. 지금쯤이면 많은 것이 버거워서…….

아님, 일종의 경영?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재라는 건 돈과 성공으로 연결되지요. 완전히 창의적인 무엇인가만 살아남을. 이 피 튀기는 경쟁사회, 몇 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싸잡아 대중이죠. 대중은 쓰레기 인생. 주체는커녕 철저히 대상이라는 이름의 쓰레기. 그렇담 문학에도 철저한 마케팅이 필요한 세상이겠지요.

어머나, 젊은 분이라 생각이 다르군요. 천재의 전략쯤으로 본다는 말이죠. 난 그냥 소설 『순수의 박물관』 그 자체에도 질겁했어요. 그런 정도의 집착이라면 무서운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백하자면 내게도 그런 작은 집착이 있었다고 해도 될지…….

네?

이상하네요. 취기도 아니고, 왜 이런 망언이 불쑥 나오는지.

그녀는 조금 남은 잔을 훌쩍 들이켰다.

제가 바로 그 담배꽁초 때문에 타격을 입었거든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건 핑계이고, 어쩌다가 세 마디 꽁초를 내가 가지고 있게 되었어요. 짐 속에 묻혀 있었다고나 할까. 그것을 버리는 것은 참 새삼스런 일이라서 그냥 짐 속에 남아 있었는데, 알고서도 못 버리고. 그런데 『순수의 박물관』이 나온 거예요.

『순수 박물관』, ‘의’ 없이, 책 이름은 그렇게 번역되었어요.

예, 『순수 박물관』. 거기 옛 연인의 담배꽁초를 모으는, 아니 그녀와 관련된 모든 사소한 것들을 수집하는 광적인 집착을 자랑처럼 들고 나온 주인공 탓에. 아니, 파묵 탓에 내가 상처를 받았어요, 괜히. 난 그저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더 늙어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게 될까봐. 아니, 사실은 언젠가는 정신이 온전할 때 버려야 할 물건들이었지요.

물건들? 그럼 혹시 그런 것들이 더 있으…….

더 있냐고요? 더 있다면 더 있지요. 혹시 발견이 되어도 아무도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할. 그런데 그 담배꽁초 세 개는…….

꽁초 세 개는…….

그걸 이번 경주행 이전에 버렸답니다.

경주행 이전에요? 왜죠?

왜냐고? 젊은 분이라서 이해를 못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여행 중엔 죽을 확률이 더 많다는 건 아시죠?

거야.

그거죠. 그래서 남아있을 추한 물품 목록에서 그걸 빼자고 한 거죠.

그럼 그동안 여행일랑은 한 번도?

아뇨, 가끔은 여행을 했지요. 그땐 『순수 박물관』을 생각한 적도 없고 또 꽁초의 존재를 어슴푸레 잊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이번에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챙기면서 아차 이건 아니다 싶은 거죠. 꽁초란 것이 너무 적나라하지 않아요? 어쩜 디엔에이마저 그대로 존재할 터이니.

디엔에이요?

내 것인지도,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도. 지금 좀 애매하게 되긴 했지만.

아니 담배를……?

물론 아니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입에 대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장담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기억이 안 나는 상황?

멀리 가지 마세요.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언제부터서는 기억 자체가 의심쩍게 변하죠. 왜곡된다고나, 자의적 기억이라고나. 글쎄. 암튼 누가 디엔에이에 관심을 갖는다기보다는 뭔가 흔적이 있는 채로 남아있을 물건이, 온전하기는커녕 일종의 쓰레기인 그런 것이 을씨년스러워서. 아차, 이런 단어일랑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이라서 평생 쓰지 말아야 했었는데 왜 이렇게.

잠깐만, 문학한다는 사람의 전유물인 단어들이라고요?

예, 그런 느낌이 드는 단어들이 있죠. 나 문학한다…… 그런 울림의 단어들. 유난히 문학스러운 단어들이랄까 그런 표현들.

에이, 그건 너무 편파적이시다.

편파적이라?

그럼 뭔데요?

내 얘긴 그러니까 딱 보면 문학 냄새를 풍기는 표현들 있잖아요, 이건 굳이 말하면 호불호의 문제인데, 난 냄새나는 건 좀 피하고 싶거든요. 비문을 쓴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문학 냄새나는 문장들은 가까이 하기 싫거든요.

에이, 그렇다고 무슨 단어 하나에.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스산하다, 쓸쓸하다, 그러면 되는데. 을씨년스럽다, 그렇게 말하면 뭔가 내놓고 문학하겠다는…….

재미있으시군요. 문학스러워도 안 된다, 그렇지만 문학이어야 한다.

예, 난 기실은 시인에 대해 외경심이랄까, 시인들을 무서워하는 편이죠.

무섭다면, 좀 이해가 안 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 나을지. 종잡을 수 없어요. 시인이라면 일단은 존경스러운데, 언어의 압축이라는 미에 도달한 사람들이려니 했다가. 그런데 실제로는 가령…… 설명은 어렵군요. 너무도 표피적인, 그러니까 시인에게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서조차 너무 감상적으로 여겨지는 단어들을 직접 그들의 입에서 듣게 되면, 생활에서, 그게 순수인지 정열인지, 아니면 치기인지. 그 경계선은 어디죠? 난 물론 너무 심플하고 너무 드라이하다는 핀잔을 들었지만.

하하, 실례지만 심플하고 드라이하다면 시인이 아니신가 봐요!

시인이 못되는 거죠. 하지만 뭣보다 순수는 상처를 주지 않아야 순수죠.

상처까지야?

괜스레 상처가 되지요. 난 사람을 일반적으로 존중하는 편이예요. 각자 나름대로, 대개는 그리 달갑지도 않은 역할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모두를. 그런데 본능적이랄까, 명과 실의 간극을 보고 싶지 않거든요. 혼란은 상처가 되고…….

가볍게 생각하셔요.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 아닌가요?

하긴 그렇군요. 저 그럼 손이나 씻고 저녁 순서에 대비합시다.

 

 

5.

저녁에는 경주 예술의 전당에서 행사가 진행될 것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로비에 늘어선 인파 속에서 설마 다시 그녀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인파에 밀려 밖에 나오니 버스는 여남은 대는 족히 되어 보였다. 표현의 자유를 다루는,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행사였고, 다들 참석하는 모양이었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동시 통역기를 받아들고 회장으로 들어갔다. 좌장으로 나온 유명 소설가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이렇게나 친숙한가에 놀랐다. 육안으로는 난생 처음이지만 그의 소설 책 속표지 여기저기에서 보아온 얼굴이 저기에 있구나, 그 정도였다. 작가 특유의 있을 법한 고약함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참 괜찮은 평범한 얼굴이 좋아보였다. 그가 점잖은 좌장 역할만 담당한 것이 안 되었다. 의견 발표의 기회가 없다니!

 

첫 연사인 평론가는 많은 평론가 중에서 경주 출생이라서 여기에 온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그는 경주 출신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통일문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북한문학의 현황과 작가들의 인권에 관해 더 집중하고 있었다. 주체문예론, 선군문학예술에 관하여 객관적 자료들을 들어서 오직 인민군의 활동을 예찬하는 주제의 획일성을 - 예상대로 - 전달해주었다.

 

이어서 민족문제 관련 인사 역시 경북출신이었다. 한국의 필화사건을 시대별로 제시하며, 필화 사건이란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사상 및 표현의 자유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 중심에서 김지하 씨의 「오적」에 얽힌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괜히 눈물이 났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감동하면 절대로 안 된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니까.) 지난 70년에 있었던 국제펜한국대회 때 그가 바로 감옥에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구속된 문인이 없이 치르는 이 대회야말로 진정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시대가 아닐는지.

 

정작 북한의 실상을 다루는 발표들은 상상을 절했다. 탈북 작가들의 ‘참으로 눈물겨운 땅’ 그곳이라는 절절한 증언들은 차라리 그들의 발언이 우리 체제의 선전용이기를 바라는 억하심정을 유발했다. 어찌 사람이 사는 곳이 그 정도일 수가……. 한 여성은 원래 전설적인 무용가 최정희 씨의 직접 제자였다는데, 지도자동지의 은밀한 총애를 받은 무용수 아무개 씨와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던 자신의 생을 회고했다. 만찬 이후 감상할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조작된 누명으로 끌려갔었다는 남성의 경우도 비슷했다. 실명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이런 포럼에도 목적이 아주 없지는 않은 듯, 탈북문인들의 단체가 펜의 일원으로 인준을 받을 예정이란다. 물론 회원국 대표들의 투표에 의해서.

 

『풀하우스』로 한국에 일시에 유명해진 재일동포 유미리 씨는 고상한 한복 차림으로 머리에 한 줄짜리 첩지까지 얹고 그림처럼 앉아있었다. 사람들은 당연히 한국어로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유창하고 빠른 일어가 튀어나왔다. 이번 포럼에서는 프랑스어가 빠져서 가능하면 영어 버전으로 듣고 있던 나는 당황했다. 얼른 통역기 채널을 한국어로 돌리려다가 그냥 꺼버리고 한국어 발표문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녀의 일본어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텔레비전에서 모르는 외국 영화를 - 최근엔 독일어로 하는 <굿바이 레닌>이었던 같다 - 보게 되면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언어를 크게 틀어놓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일단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려면 소리를 들어야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동시통역이란 참 부족한 의사소통행위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간에 쫓겨 떨고 있었다. 순서가 마지막이다 보니, 또 좌장 소설가님이 마음이 독하지 못해서 앞 선 발표자들에게 시간 엄수를 잘 못한 바람에. 아니면 한복을 차려입고서 일어로 말하고 일어로 읽는 부조화에서 도망치는 속도일까.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제한으로 질의와 응답은 형식적이었고, 모두는 서둘러 다음 행사장인 5층 전망대로 올라갔다. 두 세대의 엘리베이터로 이동하기에는 퍽 많은 숫자였다. 전망대는 서늘하다 못해 추웠다. 중앙부에선 경주시장 중심의 주행사가, 양쪽 날개에서는 자유로운 삼삼오오 대화들이 펼쳐졌다. 추위 때문에도 알코올이 필요했다. 여러 칵테일까지 준비된 즉석 바에서 와인 잔을 들고 나오다가 그 소설가를 또 만났다, 역시 와인 잔을 들고 있는. 내가 열심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나, 정말 와인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닌데, 저 원래 소주를 좋아해요. 없으니까 이거라도. 그런데 왜 소주는 없을까요?

어머나, 술꾼이세요?

술꾼이면 다른 독한 칵테일을 마시겠지요. 그냥 뭔가 먹으려면 알코올이 필요해요. 춥기도 하고, 찬 음식은 별로거든요, 특히 고기를 먹어야 하면.

딱히 고기는 아니잖아요? 다른 것들도.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기 케밥 같은 것도…….

예, 뭐. 사실 난 가슴이 아파서 뭘 못 먹을 것 같아요.

안되어요, 뮤지컬이 꽤나 길다던데요.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러니 드셔야죠. 그런데 왜 가슴이. 아, 그 북한의 수용소 어쩌고.

예, 뭐. 아뇨, 난 유미리 씨 때문에 더 울고 싶어졌어요. 대한민국 국적임을 말하려고 한복을 차려입었을까요? 유명하다 해도 아직 젊은 나이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어렸을 때부터 마땅히 있을 장소가 없어서 사는 것 자체가 별로 재미없고 시시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가…… 매순간이 시련인 현실을 참아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썼다고, 유토피아,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창출해 내는 것이 이야기라고, 그렇게 말하는, 아직 젊다 못해 어린 그 얼굴을 차마 올려다보지 못했어요.

전 뭐 독특하고 똑똑한 젊은 여자 - 뭐 그 정도의 인상이었는걸요. 생각해 보세요, 일본이 우리보다 조금 더 일찍 개화되었다고는 해도, 어머니가 가출했을 정도의 가정환경이 구김살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밝힐 수 없다는 유부남의 아이를 가지고서 미혼모 선언을 하는가하면, 헤어졌던 연인이 말기 암이라는 걸 알고선 함께 살다니요! 의지가 확고한 작가 - 그런 인상이었는걸요.

물론 그랬죠, 저도. 그런데 오늘 갑자기 안쓰러움이 일었어요, 나 혼자. 유미리 씨가 들으면 자존심 상하려나? 암튼 정직하기도 외로울 것이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어머, 생각보다 감상적이시네요, 갑자기. 우리가 알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말이에요.

그러게요.

게다가 오늘은 요덕수용소로 눈길을 돌려야 주류에 속하는 것 아닌가요?

주류라뇨?

프리 더 워드 - 이것이 구체적으로 북한의 언론의 자유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정답일 걸요.

정답, 정답. 난 실은 미리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한답니다. 물론 힘든 일이겠지만, 힘들기까지야, 한참 번거로울 것이라서 그냥 이렇게.

관심이 없으세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무섭죠. 그려질 광경이 미리 떠오르기도 해서. 제가 개성엘 다녀왔었거든요. 개성관광이 금지되기 한 달 전쯤이던가, 당일 코스로. 새벽에 임진각에 도착해서 어둑어둑해서 되돌아 왔어요. 물론 종일 해는 떴지만 어둑어둑했단 느낌이지만요. 전체가 그림자 도시 같았거든요. 길에 면한 아파트 창문으로 사람 그림자 하나 안 보였어요. 얇다 못해 세트 같아 보이는 벽은 곧 무너질 것 같았어요. 얇아서가 아니라 꽁꽁 얼어 있다가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갑자기 부서져버릴 것 같은 느낌.

어머나, 겨울이었어요? 차들이 많았나요?

아니 겨울은 아니었고, 늦가을. 차들이란 게, 관광용으로 줄지어 가는 버스들 이외엔 차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죠. 세워진 차 한두 대가 종일 본 전부였거든요. 차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없었어요. 그곳 인구밀도가 그리 낮은 건지. 박연폭포를 향해 걷는 길이 처음 내딛는 북한 땅이었죠.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를 걷는데, 사람들은 남측을 통과해서 온 방문객들뿐이었어요. 평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북한 사람들은 정말 일터에만 열중하는가 싶었어요. 오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본 몇몇 사람들은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다른 색 복장으로 소리도 없이 걷는 인상이었어요.

그런 인상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그래서 수용소라면 미리…….

그렇죠, 하물며 수용소라면 얼마나 어두운 색깔로 그려질지.

어두움을 싫어하세요? 하긴 어둠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예, 어둠을 싫어해요. 지금까지 외면해온 어둠을 굳이 맞닥뜨리고 싶지 않다는 심정, 비겁하다고 해도 할 수 없죠. 인생을 꼭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어머나, 인생은 어둠이라고 단정해버리신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얼마나 밝을까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어머나, 한창 인생의 여유로움을 즐기실 차례 아닌가요? 저보단 좀 위이신 것 같은데, 자녀들 다 크고.

한참 위 맞아요, 한샘이 우리 애들 또래로 보여요. 그렇다고 여유로움 같은 건 아직.

그렇게 식은 식사가 끝나고 요덕수용소 뮤지컬이 시작되었다. 소리도 내용도 무대라서 과장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무대 위의 극을 견디어냈다. 냉방이 터무니없이 잘되어서 냉기를 견디기가 더 힘들었다. 1막이 끝나고 휴식 시간, 복도 구석으로 나가서 제자리 달리기를 했다. 마음 뿐 아니라 다리가 통째로 동태가 되었지만, 중간에 돌아갈 궁리는 나지 않았다. 아차, 그 사람은 어쩌고 있을까. 처음부터 아예 돌아가고 싶었다는 그 사람은. 밤은 벌써 어두웠고, 난 어둠 속에서는 유아가 된다. 함께 손을 잡고 있을 걸. 순진하게도 좌석표에 따라 앉은 우리는 각각 따로 얼고 있었다.

 

 

6.

수요일은 오전은 총회장에 있었고, 오후엔 관광이 있어서 한가했다. 저녁엔 본격적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중심으로 <나의 삶, 나의 문학>에 관한 발표가 있을 것이었다.

 

어제 나보다 더 얼었을 그 작가가 오늘은 보이질 않았다. 아침 식사에서도, 점심 식사에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닐까? 다른 개인적인 일정이 있는 것일까? 아니 시내관광에 참석했을까?

내 룸메이트는 또래 통역사들과 어울리느라 방에 늘 없다. 관광에 참석했을 수도 있겠다.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누워서 천정을 보면서 쉬려는데 이상하게 좀이 쑤셨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름 석 자, 한국인이라는 것. 소설가라는 것. 그 뿐이다.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 그것도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다. 그래, 인터넷을 찾아보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네이버 씨, 아무개를 찾아주세요. 엔터~ 직전에서 멈췄다. 아니다, 이것은 심부름센터 짓과 무엇이 다른가, 직접 들쑤신다는 것만 다를 뿐.

 

프런트의 다이얼을 돌리고, 방을 찾아서 전화연결을 부탁하는 것. 그것이 더 정직할 터였다. 연결이 된다면 쉬고 있는 것을 방해하는 일인데. 대답이 없다면 관광에 참석했을 것이고 쑥스럽기만 할 텐데. 어느 것도 좋은 모양새는 아닐 것이다. 딱히 용건도 없질 않은가. 아니, 어제 공연장이 너무 추웠고, 또 조금 겁을 내고 있었으니 안부 정도는? 나는 벌써 프런트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에 있었다.

 

예에.

저기, 선생님, 저 한금실이예요.

아이쿠, 한샘이 웬일이세요? 관광을 안 갔어요? 왜요?

그냥. 그보다 어제 공연장도 너무 추웠고 해서, 오늘은 어디에서도 안 보이시고 해서. 그러니까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못가신거예요?

아, 그게. 난 오늘 아침 금장대 버스를 타느라 일찍부터 서둘렀어요. 벌써 한 행보를 했으니 지쳤지요.

금장대라뇨? 시낭송회 말이어요?

예. 시낭송회요. 한샘, 이왕 방에서 쉬는 것이면 이리로 올래요? 전화로 이야기하느니.

어머나, 쉬시는데 방해가.

무슨 방해요. 그냥 함께 따로 쉬면 되죠.

네?

오세요. 여기 방에서 보문호가 다 내려다 보여요, 베란다에 의자가 둘 있잖아요.

아예 방문을 빼곡히 열어놓은 그녀는 벌써 베란다에 나가 앉아 있었다.

여기로 와요, 아직 해가 따뜻해요. 냉장고에서 뭐 하나 들고 와요.

아, 예. 괜찮은데요. 그런데 오늘 왜 시낭송 쪽으로 가신 거예요? 금장대를 보러 가셨나요? 「무녀도」의 배경이라서?

그걸 다 아세요? 난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거기 가니까 그런 소개가 다 있더라고요. 금장대 자체는 최근에야 복원했다더군요.

금장대에 가시려던 게 아니라면, 누구 시낭송하시는 분을?

아뇨. 꼭 참석해야 했어요. 나도 할 거니까.

하시다뇨? 시낭송을? 시인이 아니신 걸로…….

예, 일이 그렇게 되었답니다. 시낭송회를 본 적도 없는데.

그럼 어떻게?

그게 참 쑥스럽게 된 일이랍니다. 욕심이지 뭐겠어요. 일단 국제펜대회 참가는 망설임 없이 결정했어요. 지난 번 한국 개최 때에는 작가가 아니었고, 다음이라면 살아있을지 의문이고. 살아있더라도 그때까지도 무명이면 못 나서겠죠. 생애 한 번은 국제적인 작가대회에 참가한다 ― 순진한 발상이지만 그냥 그렇게 정했어요. 그런데 공문형식으로 ‘한/영문’으로 시를 집필하여 제출하면 대회장에서 발행되는 책자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왔어요. 첨엔 의아해 했어요, 시인도 아닌 터에. 다음엔 시를 쓸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죠, 게다가 영어로도 써야한다면 영어로 먼저 써야 운각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도 무지가 용맹이라고 참가한 흔적이라도 남길까 싶어서 시 같은 걸 짜내었죠. 그런데 이번엔 ‘영어로’ 낭송회가 있다는 전갈이 왔어요. 다시 망설였죠, 그러다 에라 내친 김에 - 그렇게 실없는 용맹을 부렸어요. 정말 시인도 아니면서.

잘 하셨네요, 그러면 은근슬쩍 시인으로 등단하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어림없죠. 우리나라 등단은 독특한 문화지요, 아주 엄숙한.

건 그렇고, 오늘 낭송회는 좋았어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던가요?

처음 프로그램 꼭 그대로는 아니지만 조금 변경된 순서가 제시되었고 그대로 진행되었어요. 한국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았고, 특히 경주지역 문인들이 잘 섞이었고, 어떤 언어를 선택하든지 하나의 언어로 진행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조금 무시되기도 하고. 이상하게 말해도 될까요?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는 거지요?

난데없이 웬 비빔밥.

아 그게. 비빔밥을 싫어하는 성미 때문인지는 몰라도.

몰라도?

외국 펜 회원들과 한국 펜 회원들이 아무렇게나 섞인 건 좀 수선스럽다고나 할까. 1부는 외국펜, 2부는 한국펜 그런 쪽이 나았을까? 정말 단아한 한국형 미녀이면서 영어가 유창한 아나운서였는데, 아나운서가 마이크로 소개해주는 대로 책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제가 또 느리기고 하고.

아, 그런 말씀이시군요.

암튼 오늘은 일찍부터 수선스러웠어요. 아침을 2층 보문에서 먹고 로비 쪽으로 서두르면서 희한한 풍경을 보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침부터.

무슨?

멀리 분홍 꽃 재킷에 분홍 바지를 잘 맞춰 입은 여자가 마주오고 있었어요. 이름표를 건 것이 펜 일행이었죠. 깜작이야. 멀찌감치 보아도 우걱우걱 양치질을 하면서 걸어오는 거예요, 복도 한가운데서. 말 그대로 아침 먹은 것이 솟구쳤어요. 틀림없이 한국여자야, 라고 누워서 침 뱉는 욕을 하면서, 피한다는 것이 화장실이었어요. 멍청했죠. 곧 뒤따라온 그 사람의 피 튀기는 열정의 양치질에 기겁해서 도망치다시피 다시 방으로 올라갔어요. 방에서는 룸메이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일찍 나왔던 참인데. 그렇게 출발 전부터 엘리베이터를 오르락내리락 했으니 진이 다 빠졌죠. 기러기가 쉬어간다는 금장대 구경이라고 맘먹고 기를 쓰고 올라갔어요. 시낭송회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볼 것이라서 꼭 가야만 했으니까요.

그럼 시낭송 스케줄을 다 따라하시려고요.

그게 나도 낭송을 할 양이면 다른 사람의 것도 들어줘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

그렇군요. 그런데 시내관광은 부러 쉬시려고 안 가신 건데 제가 이렇게.

아니 이렇게 느긋하게 ‘초추의 양광’을 즐기는 게 더 쾌적한걸요. ‘정원 한 쪽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떨어지는 해가 아니니까 즐긴들 죄로 갈 리 없겠죠. 그런데 한샘은 왜? 젊은 분이 일단 무엇이건 보고 참여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 아녀요?

저야 늦게 갑자기 참여하게 되어서 큰 관심이랄 게.

난 이만큼의 일정이 빠듯해요. 너무 많아요, 다 참석하기는.

그런데 문무대왕릉엔 가까이 가는 것 아니겠지요?

설마. 그냥 감은사지 석탑이나 둘러보겠죠, 바다 속 왕릉을 어찌.

그렇겠죠. 그때 7세기에 벌써 화장에 수장을 하다니, 그런 걸 보면 화장 개념이 불교에서 온 게 맞는데, 요샌 교인들이 앞장서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요샌 합리적인 사람들이 그렇다고 봐야겠지요. 우리가 전통적이라고 하는 게 무속신앙, 불교에 유교가 섞여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저녁에 동국대학교 캠퍼스로 갔다가 늦게 돌아올 예정이라지요? 뭐 따뜻한 걸칠 것을 챙겨가야겠지요?

네, 그전에 조금이라도 더 쉬세요.

예, 그럼 이따가.

그날의 대화는 거기쯤에서 끝났다.

 

 

시내의 대학 캠퍼스로 옮겨가려면 버스를 타야 할 시간이었다. 다들 관광을 가고 없으려니 했는데,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로비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설가는 내가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는 로비에 나타나지 않았다. 왜, 나는 또 그녀를 기다린 것일까?

 

호텔을 출발한 여남은 대의 버스는 10킬러미터 남짓이라는 학교까지 근 30분이나 걸렸다. 시작과 꼬리가 길다보니 그럴 것이다. 호텔 팀은 알맞게 도착하였는데, 시내 관광 팀은 늦어지고 있었다. 시내 관광이 지체되어 프로그램 진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과의 변이 전달되고, 그러고도 한참 있어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예정 시각인 6시를 20분도 더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진행자 쪽 무대 한 쪽이 소란해지면서 외국 회원 두어 사람이 본부석 마이크를 행해 돌진했다. 벌써 마이크 대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왁자지껄 수상한 것이…….

사정은 일촉즉발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순간 진땀을 흘려가면서 겨우 그들을 진정시켰다. 오후 관광 코스에 원전폐기물공단이 들어있는 것에 대한 항의인 모양이었다. 이미 돌아오는 버스에서 불만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작가들 중에 상당수가 원전에 반대하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인데, 특히 후쿠시마원전 사고 이후에, 한국의 원전은 안전하다는 식의 선전에 분개했더란다. 그러니까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간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였나 보다. 다행스럽게 합의가 도출된 모양이었다. 마이크로 그런 내용들이 확산되기 이전에 주최 측에서 간곡히 말린 것이 통했나 보다. 그런 항의를 ‘이해는 하고 또 한편 동감이지만, 항의를 할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주최 측의 고민을 이해해야 했다. 행사지원금을 받은 터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후문이었다. 행사 지원금이라는 것이 늘 말썽이다. 순수한 지원이란 드문 세상이니까.

찰나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연사들이 연단에 올랐다. 말을 해방하라, 프리 더 워드 제 2막에는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곤 하는 시인 고은 씨도 함께 <나의 삶, 나의 문학>으로 진행될 것이었다. 객석과 가까워 친밀감을 주는 무대 위에서 좌장 소울 회장의 빨간 양말과 르 클레지오의 하얀 양말이 두드러졌다. 서양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차림새에는 무신경 한 듯. 가운데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전통 복장을 고수했다. 그 헐렁한 원피스 같은 윗도리를 보며 생각했다, 의상은 가리게일 뿐이구나.

 

좌장인 소울 세계회장은 자유언론에 대한 수필과 소설을 쓰는 작가인데, 만해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경주와 친해졌다고 들었다. 그는 앉은 차례대로 먼저 소잉카를 소개한다.

소잉카는 <작가와 의례>라는 제목으로 말할 것이었다. 영어로 보면 제의적 의례라는 말일 것이 분명하다. 그가 쓰는 것들은 의례와 관련된다고 한다. 사회 자체의 표현이 의례요, 사회를 확인하는 것이 의례이고, 계절을 찬미하고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것도 의례라고 한다. 비합리적이 아니다, 미신적이 아니다, 영적인 것을 따르지 않는다 - 그렇게 자처하는 사회 속에서도 의례는 존재하는 것이란다. 의례는 어쩌면 권력과도 통할지 모르는데, 작가는 의례의 남용을 조사하고 비판하고 반대 의례를 창조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라고. 어려운 말인데 소잉카의 출발이 희곡 장르이고, 희곡 장르는 그리스 고전극의 의례에서 출발하기 때문일까? 그로서는 살아가는 것이 곧 글쓰는 일이라고 했다.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체험했지만, 그 단선적 교육이란 금기 사항뿐이었고, 그러나 창조성이란 영원한 것이라고.

 

다음 순서인 우리의 호프 고은 시인님은 청중에게 주는 원고 없이 시작했다. ‘푸른 산’과 ‘흰 구름’에 기대어, 노벨상 수상자들은 손님으로서의 흰 구름에, 자신은 주인으로서의 푸른 산에 빗대는 것 같았다. ‘관계가 의미를 만든다.’ - 자신은 구조주의에 가깝다고, 실존주의를 부정했다. 존재한다는 의미를 ‘언제 어디’에 두기 때문에, 우연의 생명체로서의 보편을 믿지 않고, 필연의 존재, 즉 특수성을 믿는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은 함께 존재하느니. 한국전 3년간 청년 1/3이 삶을 중단했다 - 그 결과로서 그가 존재한단다. 그러므로 그들의 중단된 삶이 그의 삶의 의미이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문학을 한단다. 그러므로 그의 시의 본질은 애도의 문학이라고. 우와! 자신의 문학의 본질을 확고히 알 수 있는 작가들이 몇이나 될까. 역시 출중한 분이구나 싶었다. 애도의 필요성에는 100% 공감한다. 옛날에도 그랬다고, 6만 년 전 어린아이 미라 옆에 히아신스 화석이! 장례문화는 곤충에게도 있다고. 5천년 이래의 과거가 오늘의 시가 된다, 시인들은 단명, 요절, 옥사, 자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음을 일깨운다. 겨우 30편 쓰고 죽은 시인이 그의 뮤즈이니, 그의 뮤즈는 과거에 헌신한다고. 그 발언 자체가 서사시다. 산자여 따르라…… 라던 빛고을 광주의 노래가 떠올랐다.

간단한 질문에 답할 때 나온 말, 이웃이 피해를 입을지라도 개인적으로 태풍을, 폭풍을 좋아한다고 - 어쩌나, 사회적 선한 의지만으로 뭉친 것만 같았던 그의 인간성의 다른 면이 드러난 것인가?

 

르 클레지오은 정 반대로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다. 제목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 때문에 쓴다.’는 요지다. ‘손으로 씨를 뿌리고 눈으로 수확한다.’는 속담이 고향 모리셔스 섬의 크레올 말인데, 작가는 무슨 싹이 날지도 모르면서 책을 쓰고 독자는 그저 읽는다는 말이란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솔리튀드를 느끼는데, 영-불 사이 부모를 두고 프랑스령 태어나서 2차 대전 상황에서 8살에야 영국군 의사인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 영어를 원한 아버지. 그러나 그는 따뜻한 옛것을 향한 그리움으로 시를 썼고, 나중에는 오케스트라에 심취하다가 코믹을 썼는데 자신의 선생님들을 등장시켰다고. 작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몹시 더운 여름 차일을 내리고 들어박혀서 더위를 피하며 쓰고 출판하고 상 타고 그러나보니 작가가 되어 있었단다. 이어서 많은 여행 속에서 작가는 인류학자라고 느꼈단다. 미국 인디언과 3년 정도 살면서 느낀 것, 문학은 글로 쓰지 않더라도 이미 존재한다는 것.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은 경이, 놀라움이다. 마음은 늘 다른 책들에 사로잡혀 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상황에 대한 갈망이다. 꿈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꿈, 다른 상황에 대한 열망,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현실을 떠남이다?

 

한국어로 들었으면 정확했을 뻔 했다. 그의 목소리도 그가 사용하는 단어도 중요했기에 영어로 들었다가 조금 낭패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시작된 만찬은 다른 어느 때보다 푸짐했다. 와인이 거의 무진장 제공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은 여기 저기 늦게까지 남아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떠들어 댔다. 나도 그렇게 해서 소울 회장의 테이블 가까이로 갈 수 있었다. 그 사이 회장은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고 부인만 내가 찾던 그 소설가랑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전 총독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더 라이트 호노러블’이라는 칭호를 부르는 그녀가 신기했다. 저런 걸 어찌 다 아남!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해서 이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아니, 내가 너무 무성의하게 여기에 참석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통역사로서. 나 자신도 누군가의 메모를 정리하다가 한두 편 단편을 발표한 글쟁이에 속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 소설가가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주면서 사진을 부탁하는걸 보니 정말 이 캐나다 여성을 존경하는가 싶었다. 사람들이 또 밀려오니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양반을 양보하고 우린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이 여성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되었어요. 지금은 은퇴했으니 파트너 동반여행 자체가 무리는 아니겠지만, 소울 회장보다 한참 연상인데 그럼 칠순도 넘긴 나이겠죠. 어디 동반뿐인가요. 행사마다 동참하잖아요, 걷기도 조금은 불편해보이면서. 홍콩 태생의 중국인이 어려서 부모를 따라 캐나다에 건너가서 캐나다에 뿌리를 내렸다 - 것도 모자라서 총독까지 지낼 수 있었다니.

우와, 그 정도이시구나. 그런데 왜 파트너라고 하시는지?

아, 일단 소울 회장과 다른 이름을 쓰고 있고, 클락슨은 첫 결혼의 성이라죠, 아마. 제가 그냥 훑어 본 바로는 둘 사이 오랜 동반자적 관계였다가 클락슨의 총독 취임 시에 거행된 결혼식이니까 그냥.

네, 그렇군요. 그런데 난 고은 선생님 이야기 들으면서 속으로 반론을 펴보았어요, 속으로만. 보편이 없으면 특수라는 개념이 생기는가요? 보편을 향하지 않으면 특수 이익집단을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해서요. 문화란, 문학도 그 범주에서, 구체적 특수성에서 해방적 관심을 보이면서 동시에 보편주의의 형태를 대변하는 양가적 것이라는 테리 이글턴적 관점에서 하나만을 선택한다는…….

어머나, 이글턴이라면 미적인 것이야 말로 인간의 에너지들을 근본적으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모든 헤게모니적이고 도구주의적인 사고의 적수로 본다 하지 않았나요?

아, 뭐. 꼭 그런 것 같지는 앉지만, 너무 가지는 맙시다.

그래요, 실은 난 공부에서는 손을 떼었답니다.

네 뭐. 준비된 노벨수상후보자 앞에서는 조용해야지요!

내 말에 머쓱해하던 그녀는 ‘증명사진’ 하나 찍어두겠다고 텅 빈 무대에 혼자 올라가 섰다. 우리 둘은 함께 찍지 못했다. 부탁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거의 파장이었다.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그녀는 낡은 책을 따로 들고 있었다.

식사에 책을 가지고 가셨어요?

아, 이거? 난 르 클레지오는 지한파라서 참석했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의 발언이 무척 솔직하여 감동적이었어요. 글쓰기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아팠어요. 내 말을 유명인사가 대신 해주는 것 같아서. 생각하지 못했던 감동에서 저녁식사에 오면서 혹시나 하고 이 책을 가져왔어요. 첫 번역출판본 『조서』 말이어요. 여기에 사인 받았어요, 조금 아까 여기서. 한국에서 첫 출판본이라고 하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80년대 이었으니까요.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내일은 뵙기 어렵겠지요, 난 종일 총회이고, 선생님은 시낭송회 가실 거라고요?

그래야죠. 잘 자요!

 

 

7.

목요일은 정말이지 종일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총회장에 매어있으면서 나는 왜 그녀를 찾고 있었을까? 시낭송회에 갔을 것이라고 알면서도 그랬다. 총회는 컨벤션홀에서 종일 계속되었고 시낭송은 근처 제이드홀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점심시간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엔 총회가 끝나자마자 시낭송 홀을 기웃거려 보았다. 그곳은 더 먼저 끝난 모양이었다. 하긴 저녁까지 이어질 인각사 관광을 위해서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인각사는 군위군이라고, 경주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예 경북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한참을 가다가 영천 쪽으로 올라갔다. 거의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린 느낌이었다. 처음 버스가 출발해서 마지막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를 서성이니까 그리 더 길게 느껴진 것일 게다.

 

군위의 동쪽에 있는 인각사는 정확히는 인각사지라고 할까.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썼다는 때문으로 유명한 곳이고, 명부전과 산령각 이외에 나머지 법당들은 새로 지은 것들이라 했다. 일연스님의 박물관이란 곳은 그 명칭에 걸맞은 자료는 없는듯했다.

 

근처 일연공원의 만찬에도 패션쇼 <삼국유사>에서도 뮤지컬 <삼국유사>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제 좀 과했었나, 여러 가지 의미로? 설마 여기에 참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여기에서 저녁식사 후까지 행사가 계속될 것이니까. 그보다는 ‘천년의 신앙, 천년의 기다림’이라는 부제를 단 도화녀와 비형랑의 뮤지컬 동안에도 그녀가 왔을까를 생각하거나, 무형문화재라는 줄타기 장인의 아슬아슬한 묘기의 순간에도 하늘 위가 아니라 그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가 우스웠다.

 

안개처럼 부슬거리는 비 때문인지 사람들은 비닐우의를 나누어 받고서도 기분들이 가라앉았다. 외국 회원들은 실망의 표정이 더욱 심했다고 느껴졌다. ‘프리 더 워드’에 꼭 인각사가 알맞은 메시지를 준 것이었는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조금 웅성거리기도 했다. 『삼국유사』를 역사보다는 문학 쪽으로, 기록문학의 의미로 보면 빠지지 않는다고 대꾸하면서도 나도 실은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쨌거나 긴 하루였다. 이제 하루만 더 견디면 된다. 이제 정말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8.

그렇게 금요일이 밝았다. 오전 오후 총회가 있지만, 4시경 폐회가 선언되면 이어서 기자회견으로 일정이 끝난다. 한숨 돌리고 나면 아주 편한 기분으로 환송만찬이 있을 것이다.

 

오늘 마침내 그녀는 시낭송을 했을 것이다. 오전 총회 후 곧장 시낭송회장으로 달려가 보았으니 벌써 끝나고 텅 비어 있었다. 제이드홀 옆 다이아몬홀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는데, 어디에도 사람들은 없었다. 벌써 점심식사 홀로 흩어진 뒤였나 보다. 시낭송회는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 텐데. 숨바꼭질이다, 꼬박 이틀 동안을.

 

어쨌거나 저녁시간 까지는 정리할 것들이 좀 있었다. 일이 끝났으니 간단히 통역사들끼리 정리 겸 마무리인사도 나누었다. 내일 남은 것은 떠나는 일 뿐이다. 조금은 늘어놓았던 짐들도 정리해 넣고, 저녁과 낼 아침에 쓸 것들만 남겼다.

다 저녁에, 갑작스레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가 벌써 출발해버린 것은 아닐까. 잠시 방에서 쉬다가 그 생각이 들자 좀이 쑤셨다. 우린 전화번호를 주고받는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 대부분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과 눈인사나 하는 정도가 이렇게 무슨 대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환송만찬에 가려다말로 프런트에 들려 보았다. 그녀가 묵는 방은 아니까 혹시 물어나 볼까 하고. 프런트에서는 내 예상대로 체크아웃 했다는 말을 한다. 설마.

 

아, 여기 메모가 있는데, 혹시 한금실 선생님이신가요?

 

그것이 다행하게도 내 이름이었다. 나는 메모를 받아들고, 받아만 들고 그냥 서 있었다. 지나가던 영어담당이 불러 세웠을 때야 만찬장으로 함께 향했다. 만찬은 파장답게 더 편안한 가운데 공연들도 더욱 수준급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참 제대로 된 소프라노와 베이스를 들어본 것이 언제 적이던가. 중창단도 재즈밴드도 몇 년 간의 문화생활을 하룻저녁에 다 맛본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둔 메모는 방에 들어와서야 펴 보았다.

한샘, 저 벼락같이 출발합니다. 허무하게 내 일정을 끝내고 나니까 할 일이 없어졌어요. 오후 총회엔 투표권이 있는 분들만 들어간 대죠? 오후를 어슬렁거리며 환송만찬을 기다리기엔 나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고 싶어져서요, 집에서.

나를 조금 걱정했겠죠, 아마도? 낭송은 조금 떨린 채 시작하니 끝이 나더군요. 몇몇 감동적인 외국 시인들의 낭송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실한 시도 영어도 부끄러웠는데, 끝난 뒤 뜻밖에 동문들 선후배들을 만나서 외롭지는 않았어요.

사족 : 책자에서 잠비아의 니콜라스 카윙가의 「우리 자신들」, 트리에스트의 안토니오 로카의 「아직은」을 읽어보세요.

 

그렇게 사라져버린 소설가 그녀를 생각한다. 시인도 아니면서 시낭송을 하려했다는, 그때까지는 도망가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던 그녀를. 그리고 도망가 버린 그녀를. 나는 그녀가 부끄러움에 도망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외로움에 사무쳤을 것이라고도 믿는다. 외롭지는 않았다고 쓰는 사람은 외로운 법이다. 나는 외로운가? 나는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거나 그런 말을 하지도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괜찮다.

 

나도 물론 메모를 썼다.

 

아무개 선생님, 총회 결과를 말씀드릴게요. 레바논과 망명 북한작가 펜 센터 가입안이 통과되었고, 2013년 펜대회 개최예정지는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랍니다.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학수호 도시래요.

아차, 그녀는 퇴실을 했고, 나는 그녀가 있는 곳을 모른다. 안다고 하더라도 이런 내용을 뭣 때문에 써 보낸단 말인가. 메모를 습관대로 잘게 찢어서 휴지통에 넣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 일찍 나는 첫날 아침을 먹던 자리로 가서 똑같은 빵에 똑같은 커피를 마셨다. 그날 아침처럼 자리 때문에 어색해하던 그녀는 물론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쪽을, 첫날 아침 그녀가 앉으려다 말다가 옮겨 다니던 테이블들을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순간은 반복되지 않는다.

 

나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들고 호텔을 나섰다. 내가 예서 누군가를 만났었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였다. 여기서 만나는 우리는 대체로 다시 만날 일들이 없는 사이라고 내가 그랬었다. 꼬박 일주일의 작가들 틈새 기웃거리기를 뒤로하고 일상을 향한다. 행여 내 틈새는 새나가지 않았기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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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6.5. 중편 「틈새」,『동리목월』 2013 여름호 (통권 12호), 233-279쪽.

Posted by 서용좌